상자인간

상자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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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상자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은 육교 밑이라든가 공중변소와 가드레일 사이 같은 곳에 끼여 있어, 꼭 쓰레기처럼 보인다.” 사회의 잉여이자 탈락자인 그들에게 “등록된 번지에서 제대로 현금을 지불하며 사는 녀석들”은 적의와 멸시의 시선을 던지기 일쑤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경제적 실패자로 단순화되지 않는다는 데에 소설 『상자인간』의 문제성이 있다. 초현실주의적인 수법을 통해 문학성과 인간 소외, 정체성 상실 등 현대 사회의 문제를 심도 있게 파고든 실존주의자 아베 고보의 1973년작 『상자인간』은 빈 골판지 상자를 거주공간으로 삼고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다. 상자를 간이주택으로 개조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는 말문을 연다. 한때 직업을 가졌으나 스스로 신분증명서와 직업을 버린 채, 상자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세상을 내다보는 삶을 선택한 상자인간들. 그들은 사회적인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에도 등록하거나 소속되지 않는다. “전국 각지에는 상당한 수의 상자인간이 몸을 숨기고 있다.” 상당수 존재하지만 언급되거나 회자되지 않는 것은 상자인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으면서 엿볼 수 있기에 호감은 물론 반감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상자의 이야기에 홀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인지, 말해진 것 중 사실은 무엇인지를 가늠하던 독자는, 캄캄한 상자 속 미아가 된다.

영원히 엿보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상자인간이 된 느낌도 든다
구석구석 관습과 유행과 타산에 지배되던 우리가 이 모두를 전부 내던져버린다면, 세계는 어떻게 보이고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풍경은 균질해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기던 것과 무가치하게 여긴 것이 동등한 가치로 눈에 들어올 것이다. 상자인간의 전업이 카메라맨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상자에 뚫어놓은 엿보기용 프레임에 잡힌 세상은 그에게 매번 새로운 피사체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타인을 자유롭게 엿볼 수 있다는 양보할 수 없는 특권. 소설의 대부분은 주인공 상자인간과 그의 상자에 대한 ‘권리’를 구매하려는 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실랑이를 따라가는 데 할애된다. 이성과 알몸으로 마주할 기회보다는 두 남녀를 상자 내부에서 엿볼 수 있는 시선의 주도권이 중요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고 본다는 것은 자유일까, 아니면 또 다른 감옥일까.

당신들을 포함해서 그 진찰실 자체가 내 상자의 낙서였어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앞으로 일어날지 어떨지도 모르는 사건에 대한 공술서.” 소설은 중반쯤 가서야 상자의 권리를 놓고 벌이는 싸움 자체가 온전히 상상의 소산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가 작은 상자 안에 자신만의 왕국을 구축할 수 있던 것은 무엇보다 ‘글쓰기’ 덕이었다. 구술이 이어지다가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낙서를 닥치는 대로 읽어내려가듯 종횡무진하는 이 작품은 인물(들)의 심리와 사고를 검열 없이 내보인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서로의 자리를 탐하고 가짜와 진짜가 혼란스레 공존하는 동안, 이 소설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상자 안쪽을 빼곡 채운다. 독자는 어느 순간 상자의 바깥을 읽고 있는 손이 아니라, 상자 안쪽을 함께 써 내려가는 주인으로 자리매김한다. 즉 우리들의 독서와 함께 상자는 책으로, 단수에서 복수의 목소리로, 정체성에서 익명성으로 확장을 거듭한다. (누구든 될 수 있는) ‘나’의 서술은 사진, 보도, 시, 우화 등 소설의 바깥을 내부로 끌어당기며 상자의 면적을 넓혀간다.

작가 탄생 100주년, 새로운 얼굴과 목소리로 만나는 2026년판 『상자인간』
2024년 아베 고보 탄생 100주년을 지나, 그의 문학은 매 순간 새로운 독자들과 접한다. 이번 한국어판의 새 번역은 아베 고보의 문학세계를 천착해온 번역가 이선윤의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독파하기 어려운 소설을 시선과 권력, 통제와 정체성의 키워드로 풀이한 해설은 작품 전반에 흩어진 난해한 구조와 상징들을 꿰어낼 열쇠를 선물한다. 텍스트의 시각적 해석인 표지도 흥미롭다. 그래픽디자이너 강문식은 원제 箱자의 윗부수(대 죽)만을 의도적으로 노출하여, 상자 안쪽으로부터의 강렬한 시선을 느끼게 설계했다. 재킷을 벗기면, 상자인간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 듯 뒤틀리고 무너지는 글줄의 리듬이 독자로 하여금 문장의 실험성을 본격적으로 예감하게 한다. 상자인간의 전리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리 풍경 스틸(아베 고보 촬영)이 수록된 이번 판본은 독자에게 특별한 기념이 될 것이다.
저자

아베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