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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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절멸될 수감자들”
1938년 3월 독일 제3제국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지 며칠 후, 새 정권은 오스트리아에 집단수용소를 건설할 계획을 발표한다. 나치 친위대는 포로의 수가 급증할 것을 내다보고 수용소 추가 건설을 고려했다. 동시에 나치 친위대 사령부는 건설자재 산업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이렇게 친위대는 강제수용소 확장을 정당화하고 수용소 내 활용 가능한 노동력을 독점함으로써 친위대의 재정을 튼실히 하고자 했다. 친위대는 그들의 경제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용소 부지를 물색하는 데 착수하여 마침내 화강암 채석장을 인근에 둔 마우트하우젠(Mauthausen)과 구젠(Gusen)을 낙점했다. 나치 친위대 기업은 독일 제3제국의 화려한 기념물과 건물에 필요한 건축 자재를 수용소 포로들을 동원해 채석하게 함으로써 공급할 계획이었다.

1938년 8월 8일,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포로를 태운 첫 기차가 마우트하우젠에 도착했다. 포로들은 자신들이 수감될 수용소 건설을 위해 노동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화강암 채석장 개발과 확장에도 동원되었다. 수감자들은 극도로 열악한 조건 아래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적합한 도구나 작업복조차 받지 못했고, 늘 부족한 음식에 시달려야 했으며, 적절한 의료적 조치를 받지 못해 숱한 질병에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심각한 사고의 위험 속에서 생존해야 했다. 고된 노역 과정에는 친위대의 끊임없는 폭행이 이어졌다.

1938년 설치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는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약 33만 명이 수감되었으며, 그중 12만 명 이상이 죽었다. 마우트하우젠은 나치에 의해 기획된 절멸수용소(Extermination camp)였다. 이 명칭은 공식적으로 존재한 적은 없으나, 실제 역할은 다른 강제수용소와 명확히 구분된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비롯한 6개의 강제수용소는 대량학살을 목적으로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설립했다. 이곳은 범죄 행위에 대해 형벌을 주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전쟁 중 절멸 정책을 일괄 마무리하는 곳이었다. 희생자의 시체는 통상 소각 처분 내지 집단 묘지에 묻어 처리했다.

1941년 1월 2일, 당시 나치 독일의 국가보안본부 수장인 하이드리히(Heydrich)는 25개에 달하는 강제수용소를 3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카테고리I 수용소는 나치의 입장에서 개선 가능성이 있는 수감자들을 위한 수용소였다. 다하우, 작센하우젠, 아우슈비츠 등이 그런 곳이었다. 카테고리II 수용소는 부담스럽지만 재교육 가능성이 있는 수감자들을 위한 수용소였다. 부헨발트, 플로센뷔르크, 노엔가메, 비르케노 등이 그런 곳이었다. 카테고리III 수용소는 교화 가능성이 없는 수감자들이 수용되었고, 그들은 노동을 통해 절멸될 운명이었다. 나츠바일러-슈트루토프, 마우트하우젠, 구젠 등이 그런 곳이었다.
저자

문박엘리

서울에서자라학교를다녔으며대학졸업후프랑스파리에서유학했다.철학과언어학을공부했으며일반회사와시민사회단체에서일했다.인간과자연과우주만물의연계에대해관심이많으며,옮긴책으로《프랑스아이의과학공부》,《생물의다양성》이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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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나치의만행을폭로한마우트하우젠의사진사,프랑시스코부아”

지정학적관점에서보면스페인은제2차세계대전의피해를상대적으로덜입은곳이라고생각할수도있다.프랑코와히틀러가조기에맺은동맹을참작할때말이다.그러나《마우트하우젠의사진사》는안티-파시스트군대가유럽의다른곳보다일찍조직된스페인의복잡한실상을드러낸다.스페인공화주의자들은파시즘에대항하여무기를든최초의사람들이었다.1936년스페인공화주의자들은독일·이탈리아의파시스트정권의지지를받은프랑코장군에맞서싸웠으나패하고말았다.이들은신속한귀환을희망하며프랑스로대거망명했는데,그수가50만명에달한다.
안전한피난처로굳게믿었던나라에서스페인공화파망명자들은자신들을“달갑지않은빨갱이”로바라보는시선속에서프랑스각지로흩어져야했다.남자들은프랑스군대,외인부대,보병대대또는군사시설인외국인노동자회사(CTE)로들어가도록강요받았다.공장,농장,군사방어시설의건설현장에서하급노동을수행하면서그들은“삽과곡괭이부대”가되어갔다.1940년5월독일부대의공격으로희생된사람들이바로이런회사에서일한스페인망명자들이었다.생존자들은흩어져도주하거나스위스로들어가려는시도를계속하다가독일국방군에체포되었다.약1만명에달하는이들을비시정부(Vichy政府)는프랑스군인으로생각하지않았기에포기해버렸다.스페인정권도히틀러와협상하면서마찬가지태도를취했다.결국고국인스페인으로도,망명지인프랑스로도갈수없었던이들은대부분마우트하우젠강제수용소로이송되었다.
1940년8월시작된강제수용은1944년까지이어졌다.대략1만명의공화파사람들이공화정의정당성을옹호하고파시즘에맞서투쟁했다는이유로나치강제수용소에구금되었다.1941년1월27일1506명이라는가장큰이주대열속에한명의사진사가있었다.그가바로이책의주인공‘프랑시스코부아(FranciscoBoix)’다.
초기에마우트하우젠강제수용소로이송된스페인포로들에게는유리한점이한가지있었다.수용소내주요한보직에접근할수있었다는것인데,이는더좋은식단과생존의기회가보장된다는의미였다.미용사,음악가,소목장등의직군에서일하면서이들은수용소에서비교적오래존속할수있었다.수용소를지휘하는나치친위대의입장에서도이들을부리는편이유용하다고여겼다.이런특별한혜택을받은수감자들을‘프로미넨텐’이라고불렀다.
프랑시스코부아는스페인수감자들인동료들에의해프로미넨텐으로연결되었으며,수용소내에있던신원확인국에서일하며필름을현상하는일을맡았다.그곳에서그는나치에의해은밀하게작동하는끔찍한체계를목도한다.프랑시스코는신원확인국의책임자였던파울릭켄을도우면서그가꾸미고있는일의실체를파악하게된다.파울릭켄은나치친위대나카포(수감자를관리하는수감자,나치의앞잡이)에의해살해된포로들의시신을자살이나사고사로위장했다.때로는수용소탈출을시도하다죽은것처럼꾸미기위해시신의자세를바꾼다음사진을찍기도했다.이뿐만이아니었다.파울릭켄은노출,초점,구도등을완벽하게통제하면서죽은사람들을촬영했다.그는단순히시체의모습을찍는게아니라마치자연의아름다움을불멸화하는것처럼,영상의구성과원근법에각별한주의를기울여자신만의미적감각을총동원해예술작품으로승화시키려했다.
프랑시스코부아는스페인수감자들의지하레지스탕스한가운데에서동지들과함께목숨을걸고나치의범죄행각을드러내고나치최고수장들을고발하는데증거가될필름을빼돌리려는은밀한계획을세운다.하지만위험천만한이계획은나치의만행을고발하고진실을밝히기위해나선대장정의출발일뿐이었다.
《마우트하우젠의사진사》는한인물의영웅담을기록한단순한이야기가아니다.역사적으로잘알려지지않은스페인홀로코스트와강제수용소에서살아남은스페인생존자들의운명을알리는것이목적이다.그래픽노블은역사적사실에근거한실화이며,책의후반부는사료를중심으로강제수용소수감자들의참혹한삶을증언하고있다.
프랑시스코부아는뉘른베르크재판에증인으로나서서마우트하우젠강제수용소에서빼돌린필름으로나치의만행을만천하에드러냈다.그의용기있는행동으로수많은홀로코스트의희생자들이역사적으로조명되었다.그의생생한증언은언제까지나기억될것이며,그가남긴기록역시불멸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