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의 역사 (광인의 수용소에서 프로작의 시대까지)

정신의학의 역사 (광인의 수용소에서 프로작의 시대까지)

$36.33
Description
어디까지가 병이고, 어디까지가 정상인가?
정신의학의 경계를 묻다
광인을 수용소로 보낸 19세기,
급증하는 정신질환자와 생물학 패러다임의 승리까지
과학과 사회 사이의 좁은 틈새를
위험스레 질주하는 정신의학의 생생한 역사!

진료실의 정신과 의사는 머리를 싸매야만 한다. 일상적 고통과 치료해야 할 질환을 감별하기 위해, 그리고 한정된 의료자원을 분배하기 위해서다. 시장경제 논리가 팽배해지면서 수동적이던 환자는 소비자 고객으로 변화했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요구는 윤리적 질문에 부딪힌다. 그것은 고통의 존재론이다. 고통은 그 자체로 없어져야 하는 감정인가? 고통으로 점철되는 스트레스와 불행을 둔감하게 하는 약물은 상황 개선의 노력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신과 의사가 아니면 다가갈 수 없는 고통은 무엇인가? 다양한 심리 치료가 난립하는 현실에서 정신의학은 일상의 불행을 치료할 역할을 정당하게 부여받은 것일까? 정신질환의 기준은 정상성인가, 주관적 불편함인가?
저자

에드워드 쇼터

Edward Shorter
토론토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의학의 사회적 변천과 그 추이를 탐구하는 의학사학자이다. 의학사뿐 아니라, 출산의 의료화, 의사-환자 관계의 변화, 정신신체적 질환과 정신약리학의 역사, 근대 가족과 성애의 역사까지 폭넓은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1995년에, 캐나다 왕립협회가 캐나다 의료 정책의 기틀을 세운 제이슨 A. 해나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제이슨 A. 해나 메달을 받았고, 2000년에 이 책 《정신의학의 역사》로 다시 해나 매달을 수여받았다. 1991년부터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의사학醫史學 해나 좌座 교수로 재직 중이며, 1996년부터는 정신과 교수를 겸하고 있다.《근대 가족의 탄생The Making of the Modern Family》을 비롯해 《마비부터 피로까지: 근대 정신신체적 질병의 역사From Paralysis to Fatigue: A History of PsychosomaticIllness in the Modern Era》 《성적 욕망의 역사Written in the Flesh: A History of Desire》 《충격요법: 정신병에 사용된 전기충격 요법의 역사Shock Therapy: A History of Electroconvulsive
Treatment in Mental Illness》 등 다수의 저작을 출간했다.

목차

서문

제1장 정신의학의 탄생
정신과가 없던 시절, 광인들은 집에 묶여 있거나 길거리를 배회하거나, 혹은 호스피스 등에 치매, 걸인, 부랑자들과 뒤섞여 감금되었다. 19세기 비로소 정신병자 수용소가 탄생하면서 정신의학은 비로소 독립된 전문분과로서 첫발을 뗀다.

제2장 수용소의 시대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치료적 수용소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구속과 사슬이 없어지고 광란의 울부짖음도 사라지는 그 즈음 수용소는 몰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초만원으로 변하는 수용소에서, 의사들은 밀려오는 환자들에 짓눌린다.

제3장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탄생
19세기 과학혁명의 물결은 틀이 잡혀 가던 정신의학에도 흘러 들어왔다. 1세대 생물정신의학자들은 정신질환이 운명이 아니라 뇌의 질병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빈약한 근거와 퇴행이론 등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정치적으로 악용된다.

제4장 신경성 질환의 시대
혐오의 대상이 된 정신의학, 하지만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환자와 대중의 혐오를 피하고 부자 환자를 유치하려는 의사는‘신경성’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다. 신경성 환자를 유치하기 위한 온갖 치료법이 난무하던 이 시기 드디어 심리적 치료의 싹이 튼다.

제5장 정신분석, 그리고 정신의학의 단절
각종 요법이 성행하던 시기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고안해 내어 부르주아 계층의 자기성찰 욕구를 채워 주게 된다.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은 정신분석을 치료에 적용하고, 더 나아가 운동의 차원으로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제6장 대안을 찾아
정신분석과 수용소 사이에서 정신과 의사들은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신경매독의 열치료법과 수면연장법 등은 약물혁명을 예고했는가 하면, 전기충격요법과 뇌엽절제술은 격렬한 반反정신의학 운동을 야기했다. 그리고 치료공동체라는 새로운 대안이 등장한다.

제7장 생물정신의학의 부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신의학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정신질환의 후천적 원인을 주장하는 정신분석 진영과, 유전적, 뇌화학적 요인 등 기질적 원인을 주장하는 진영, 그리고 그 사이의 절충적 시각이 혼재하는 과도기적 시기가 다가온다.

제8장 프로이트에서 프로작으로
지역사회 정신의학은 실패하고, 온 세계를 휩쓸던 정신분석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약 회사의 주도로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약물이 대중의 욕구를 채워 주게 된 것이다. 이 변화에 큰 역할을 한 것은 항우울제 프로작이었다.

옮긴이의 글
개정판 옮긴이의 글
주석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정신의학의 역사를 쓴다는 것
과학과 사회의 틈새를 질주하는 기록

근대 이전 광인은 각 가정이나 마을에서 알아서 “처리”되었고, 17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정신의학은 ‘대감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그 첫발을 내딛었다. 의사들은 저급한 뇌수술을 시행하였고, 환자들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두개골을 절단당하고, 냉온수 마찰과 전기충격 같은 근거없는 치료법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그로부터 50년 후 현대의 정신과 의사집단은 개인의 성격적 특이성과 실존적 고통을 모조리 질병의 범주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으며, 거대 제약회사는 프로작 같은 정신약물을 가정 상비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책이 쓰는 역사는 직선적이다. 18세기 말 치료 수용소의 등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20세기 말 정신과 개원의의 조용한 진료실에서 끝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정신의학을 장악했던 프로이트 이론은 겨울의 마지막 눈처럼 사라져 가고 있다. 정신의학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시점이다. 정신질환의 근거가 뇌에 있다고 보는 흐름은 우리 시대에 와서 뇌에 최우선 순위를 둔 생물학적 관점에 도달했다. 또한 이 책이 쓰는 역사는 지성의 역사가 아니라 망각된 인물을 생생하게 복원하는 사회사이다. 정신의학이 문화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초점을 맞출 것이다. 종종 순수한 과학의 승리라고 묘사되는 사건에도 문화와 상업성이 어떻게 침투했는지 보여줄 것이다.

이 책의 원서《A History of Psychiatry》는 1997년에, 한국어판 역서는 2009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2020년, 역서의 개정판이 출간된다. 대략 10여 년의 간격을 두고 있다. 2009년의 정신의학을 1997년의 특성이 양적으로 팽창하고 범위가 넓어진 것으로 본다면, 2020년은 10여 년 전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200여 년 동안 정신의학이 추구해 온 궁극적인 주제는 사회적 가치관과 정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질환의 과학적 실체를 찾는 것이었다. 의료는 질병을 넘어서 삶의 불행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가? 어느 지점에서 ‘필요’가 ‘욕구’로 넘어가는가?
(옮긴이의 말 545쪽 참조)

질병 극복의 영웅담이 아닌
인간을 향한 의학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담긴 역사

정신의학의 역사를 사회사적 시각으로 살핀 캐나다의 저명한 의학사학자 에드워드 쇼터의 《정신의학의 역사》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의 원서 초판은 1997년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정신의학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또한 단순히 정신의학 전공자를 위한 역사 교재가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인간 정신의 실존적 고통에 대한 의료화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사회적 의미를 지닌 책으로도 평가받아 왔다.
정신의학의 역사는 일반적인 의학사와는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질병의 극복과 새로운 치료법의 개발 같은 영웅담으로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면서도 가장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은 광인들, 끔찍하고 치욕적인 수용소, 냉온수 마찰과 전기충격, 각종 쇼크요법 등 저급하고 비인간적인 치료법까지, 인간에 대한 의학의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분야가 바로 정신의학이다.
18세기 말 치료적 수용소의 풍경에서 시작된 이 책의 이야기는 20세기 말 정신과 개업의의 조용한 진료실에서 끝난다. 푸코의 ‘대감금’ 주장에 대한 반박, 초기 수용소의 끔찍한 상황, 프로이트에 대한 혹평 등 이 책에는 우리가 전혀 몰랐거나 일면만 알고 있던 사실들에 대한 반전으로 가득하다. 또한 최근 거대 제약회사들이 벌이는 정신이상의 의료화 음모에까지 파고들면서 정신의학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수용소의 환자 기록으로 본
푸코의 “대감금”에 정면 반박하는 근거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의학이 국가권력에 의한 인민의 통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병리를 관료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발명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당시 유럽 전역에 “대감금”이 있었다고 말한다. 푸코의 이런 주장은 20세기 지식인들 사회에서 대유행을 하게 되었고, 정신의학에 대한 편견과 오명을 강화시키는 기제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푸코가 말하는 “대감금”은 어처구니없는 난센스에 불과하다. 푸코는 “정신의학”이 국가권력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 하는데, 국가 통제가 강력했던 독일에서도 19세기까지는 ‘정신과’라는 단어조차 없었다. 또한 저자는 수많은 역사적 기록과 통계자료를 들어 당시의 광인 수용 시설과 수용자의 수를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가장 컸던 시설인 비세트르도 사실상은 종합병원 시설이었고, 여기에 수용된 광인은 간질환자와 정신지체를 포함하여 245명뿐이었다.
푸코가 ‘대감금’의 사례로 꼽은 잉글랜드에도 1826년의 조사를 보면 공립이든 사립이든 수용소에 있던 사람은 소수였고, 베들렘과 세이트 루크 병원에 있는 환자를 다 합쳐도 500명이었다. 감옥에 있던 자 중 광인으로 분류된 사람도 53명뿐이었다. 따라서 푸코의 말처럼 정신질환자가 3000만 명이 넘었다는 ‘대감금’의 근거는 희박하다.

“봐라, 봐라. 저기 미친놈이 간다”
정신과가 없던 세상, 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튼튼한 남자나 여자가 미쳤다고 간주되면, 마을에서 이들을 관리하는 방법이라고는 오두막 바닥에 구멍을 파서 밀어넣은 다음 기어나오지 못하게 덮는 것이다. 구멍의 깊이는 1.5미터 정도 …… 대개는 그 안에서 죽게 된다.” _ 1817년 아일랜드 지역구 의원의 기록 (본문 14쪽)
정신병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정신병은 부분적으로는 생물학적이고 또 유전적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의사들이 정신병자를 돌봐 왔고 관리 지침서 등이 있긴 했지만, 18세기 말 이전까지 전문 의학 분야로서의 정신과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18세기 이전까지 광인을 돌보는 주체는 가정이나 마을이었다. 그러나 ‘돌봄’의 방식은 매우 드물었다. 전통 관습과 사회적 역할이 중요했던 그 시절, 마음과 기분의 병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다뤄졌다.
1870년 스위스 프라이부르크 주에서 정신병자 실태를 조사했다. 확인된 164명의 정신병자 중 5분의 1은 냉방이나 광에 묶여 있어서 “비좁고 어둡고 습한 곳에서 오물 냄새에 절어” 있거나 “자기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짚더미에” 있었다. 집안이나 마을에 광인이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그래서 행여 수용소가 있다 하더라도 가정 단위로 범죄에 가까운(강제격리)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회개혁가인 도로시아 딕스가 메사추세츠 주의 시골을 다니며 발견한 것은 “새장에 갇힌 여자” “사슬에 묶인 정신박약 한 명” “17년간 축사에 갇혀 있던 사람” “쇠창살 우리 안에 네 명의 여자” 등이었다. 이런 일화들은 극단적이고 기괴한 상황이 아니라 당시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정신의학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환자들은 관대한 처우를 받지 못했으며, 멋대로 돌아다니게 방치되지도 않았다. 동정심 없는 야만스러운 처우와 추방만이 그들에게 허락된 모든 것이었다.

“치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사회로 복귀할 가능성은 있다.”
계몽주의적 의사들의 등장과 치료적 수용소의 탄생

1793년, 프랑스의 자코뱅 정부는 38세의 젊은 의사 필립 피넬에게 비세트르 호스피스의 운영을 맡긴다. 계몽주의와 사회진보철학에 고취된 피넬은 비세트르에서 정신질환의 치유 가능성과 인도주의적 돌봄이라는 개혁주의적 이상을 발휘한다. 그는 이곳에서 광인을 사슬로부터 풀어내 명성을 얻게 되고, 그 덕에 1795년 살페트리에르의 원장이 되면서 그곳에서도 광인의 사슬을 풀어 주었다. 필립 피넬의 주장은 명료했다. 수용소 감금은 치료적으로 이용되어야 하며, 수용소의 본질은 심리적 치료를 하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환자들과 친밀했고, 따듯한 목욕으로 환자를 안정시켰으며, 환자들은 부지런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프랑스에 필립 피넬이 있었다면, 독일에는 할레 대학의 요한 레일이 있었다. 수용소의 끔찍한 실상에 경악한 계몽주의자 레일은 인류애와 시민의식이 실종한 이 불행한 사태를 해결할 이는 의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용소가 가족은 제공할 수 없는 시설과 보조적 치료를 담당하는 곳이어야 한다며 인간적 대우를 강조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했다.
이렇게 18세기 후반으로 넘어서면서 정신병자 수용소는 치료적 수용소로 조금씩 탈바꿈하고 있었다. 당시 수용소가 치료적 효과를 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공동체 정신을 갖춘 환경, 또 하나는 의사-환자 관계였다. 이중 의사-환자 관계를 강화한 방식은 “도덕치료”라고 불렸고, 이는 수용소가 이전의 “광인의 집”과 구별되는 새로운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

“누구도 나에게 이런 것을 물어보지 않았어요!”
정신분석은 과연 정신의학의 혁명인가, 역사적 퇴보인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의 역사상 반세기에 이르는 커다란 ‘단절’이었다. 정신분석이 정신의학계를 지배한 몇 십 년 동안 정신의학은 일반의학으로부터 멀어지고, 과학적 발전은 오랫동안 침체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단절이 정신의학계에 미친 파장은 엄청났다. 그중 가장 큰 의의는 정신과 의사들을 수용소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 식의 정신분석은 정신과 의사로 하여금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진료소에서 환자를 보는 전문의사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게 해주었다.
정신분석에 대한 기존 정신의학계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성이 정신질환의 원인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주류 정신과 의사들은 “프로이트 식 사교에는 구역질이 난다”거나 “경험 많은 정신과 의사가 역겨움을 느끼지 않고 프로이트를 읽을 수는 없다”고 반응했다.
이와 같은 학계의 부정적인 반응과 달리, 중산층 사회는 프로이트에 열광한다. 이러한 열광의 배경에는 정신적 고통을 안고 있는 고학력의 중산층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가 ‘광인의 수용소’에 갇혀야 하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련된 상담실에서 두어 시간의 상담으로 해결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