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백색이짙게드리운미국에서
백인과의대화를시도하는흑인시인
어긋나는대화들,사무치는절망,
그럼에도억누를수없는다른미래를향한욕망
‘흑인의생명은중요하다’운동과더불어
미국에서가장널리읽히는흑인시인이된클로디아랭킨,
‘백인성’을주제로백인들과의대화를시도하다
흑인을상대로한경찰의폭력을규탄하며분출한‘흑인의생명은중요하다’운동이미국전역을휩쓸었던2014년,클로디아랭킨의다섯번째저작인『시민:미국의서정시』가출간되었다.시와에세이,시각자료를아우르는혼종적인형식을취한이책에서랭킨은자신과친구들이겪은인종차별,인종차별적언어의작동방식과언어자체의한계,세리나윌리엄스나지네딘지단같은스포츠스타에게덧씌워진인종적이미지,흑인을상대로한과잉진압과증오범죄를파헤쳤다.『시민』은당시의열띤분위기와맞물려출간직후부터커다란반향을일으켰으며,시로분류되는저작중에서는드물게베스트셀러가되었고각종매체에서올해의책으로선정되었다.또한독특한형식을증명하듯이례적으로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의시와비평부문에동시노미네이트되었고이중시부문을수상했다.2024년에는『뉴욕타임스』가선정한21세기의책100권중34위에오르기도했다.
놀라운비평적,상업적성공을거두며단번에그를미국지성계와문학계의변방에서중심으로옮겨놓은『시민』으로부터6년이지난2020년랭킨은후속작『그냥우리:미국의대화』를세상에내놓았다.흑인의생명은중요하다운동이여전히인종차별이횡행하는현실을폭로했음에도,또랭킨자신도『시민』으로이운동의한부분이되고명성을획득했음에도세상은더나아지지않았고오히려몇년전부터그어느때보다암울한시기에접어든상태였다.두차례에걸친버락오바마의당선은백인들-백인유권자의과반이오바마의상대후보에게투표했는데도-이‘미국에서인종차별이종식되었다’고선언할빌미를제공했다.또흑인이사상최초로미국대통령자리에오른사건은백인들사이에서반발과원한감정을점화했고,이것이백인우월주의자이자민족주의자,남성중심주의자를자처하며대통령직에도전한도널드트럼프가당선되는데중추역할을담당했다.
트럼프가당선된이후인2017~2018년은“현대미국역사상가장끔찍한사건들이연이어터진”시기였다(이저벨윌커슨의『카스트』).라스베이거스에서미국최대의총기참사가일어났고,학교를비롯해여러공간에서총기난사사건이발생했다.피츠버그의유대교회당에서예배를보던신도열한명이살해되었고켄터키루이빌외곽에서는한남성이아프리카계미국인들이다니는교회를테러의표적으로삼았다.버지니아주샬러츠빌에서는노예제를상징하는과거‘남부연합’기념물철거를반대하며백인우월주의자들이폭력시위를벌였고,이를막는과정에서백인우월주의자가반대편시위자한명을살해하는사건도벌어졌다.
『그냥우리』는이런배경에서집필되었다.오바마이후많은백인이인종차별과인종분리가과거의유물이되었다고믿은한편,새대통령이미국을다시위대하게만들겠다고공언하며보낸신호에힘입어흑인을비롯한유색인에대한편견과공격이더욱노골적인모습을취했다.그리고망연자실한채로“지금도이렇다니”(167)라고읊조릴수밖에없는상황앞에서클로디아랭킨은백인성과백인특권을주제로백인들과대화를나누어보려한다.『그냥우리』는이시도의실패와가능성에관한책이다.
공고한인종분리를깊은곳에서부터뒤흔드는
대화가없다면어찌변화를,통합을꿈꿀수있을까?
책을펼치면하얀종이에글자가채워져있는것이보인다.대부분산문이지만운문이끼어들기도하며,작은글자들이빼곡히들어차있는가하면곳곳에이미지가삽입된다.본문은오른쪽페이지에만인쇄되어있으며거기서클로디아랭킨은직간접적으로경험한대화를들려준다.왼쪽페이지에는오른쪽페이지에나오는특정구절의출처나사실관계가제시되고증거가될만한이미지(회화작품부터소셜미디어스크린숏에이르는)와그래프가배치된다.때로는본문과직접관련되어있지않지만연상작용을일으키는인용문이나이미지가놓이기도한다.왼쪽에아무것도없는페이지도많은데,백인의특권을가시화하고자하는책인만큼비어있는것이아니라백색으로채색되어있는듯이보이곤한다.
1946년한프랑스기자가프랑스로이주한흑인작가리처드라이트에게미국의‘흑인문제’를어떻게생각하느냐고물었다.라이트는이렇게답했다.“흑인문제는전혀없습니다.오직백인문제만있습니다.”그러므로인종차별을철폐하려면백인의특권을해체하고백인들이스스로의권리에대한기대를낮추게하는노력이병행되어야한다.그런데이과제를백인에게만맡겨둘수있을까?이과정은어떤모습을취해야할까?
『그냥우리』에서랭킨은인종차별반대활동을백인들이가로채고있다는흑인친구의말을전한다.백인의공간에서다양성워크숍이열릴때자신보다는백인여자강사가섭외될가능성이높다는것이다.이얘기를듣자마자랭킨은반문한다.“흑인이랑갈인이그동안요구해온게그거아니야?‘백인을가르치는건우리일이아니다’라는말을그동안얼마나지겹게들었던가”(81).하지만이내친구의말에공감한다.이영역에서조차백인이흑인의자리를침식해서가아니라그런방식이공고한인종분리를재생산하기때문이며,올바른말을배우는것이언제나진정한이해와변화에이르는최선의길은아니기때문이다.흑인으로서무시와무례를감당하며살아야했던랭킨은오랫동안백인과의대화를꺼려왔지만이런깨달음들이대화를시도하도록그를떠민다.그리하여그는,구체적인목표도성과에대한확신도없는채로,각종공간에서만난사람들,특히가깝거나낯선백인과이야기를나누어보고자한다.
그런데인종적상상력이메말라버린백인들과
인종을주제로대화를시작하는것이정말로가능할까?
랭킨은공항에서백인남자와어쩌다말은튼다.그는“다양성카드를써먹을수없”어아들이원하는대학에입학하지못했다며억울한심정을토로한다.랭킨은이를기회삼아당신의백인특권을어떻게생각하느냐고묻지만돌아온답은“전예외예요.제가가진건다열심히노력해얻은거거든요”다(57,59).어느저녁식사자리에서마주친백인남자는큰키가자신의최고특권인것같다고말한다.“그쪽이가진최고의특권은백인성같은데요”(185)라고랭킨이응수하자남자는뜬금없이예전에농구를했기때문에흑인과함께하는자리가불편하지않다고답한다.백인이다수인또다른식사자리에서는트럼프의당선요인이화두에오르지만인종차별은거의언급되지않는다.랭킨이인종차별을입에담고어색한분위기가이어지는가운데한백인여자가디저트쟁반이정말아름답다며화제를돌리려한다.분노가치민랭킨이“지금제말씹힌건가요?”(195)라고큰목소리로묻자여자는뭐라대답하는대신친절을거절당한사람처럼고개를떨구고,이를신호로백인의결속을다지는순간이찾아온다.이렇듯랭킨의대화시도는연신난파한다.많은백인이여전히자신의백인성을직시하길거부하며,인종차별적편견은아직도일상적인상호작용구석구석을강하게지배하고있다.숱한세월,차별과억압,저항과변화에도불구하고변하지않는사실은백인이변화를원하지않는다는것이다.
물론진보적일뿐아니라인종문제에촉각을곤두세우는백인도있다.백인사진작가로랭킨과20여년간인종차별에반대하는활동을함께해온남편이그런사람이다.공항이나비행기에서만난남자들이방어적인태도를보였다는랭킨의말에남편은로빈디앤젤로의책제목인‘백인의취약성’을언급한다.확실히남편은올바른편에서있지만랭킨은정답만을말하는그와의관계에서도외로움을느낀다.“지난25년간나와함께세상을살아온이백인남자는본인이자신의특권을이해하고인정하고있다고생각한다.확실히그는어떤용어를쓰는것이바람직한지잘알고있는데,다만그렇게서로합의된용어만쓰다보면얼떨결에진정한인식의순간에다다르는때를놓치기도한다.그런용어들-백인의취약성,백인의방어적태도,백인의전유-은복잡하게얽히고설킨진실한대화가들어설자리를대체하는경향이있는터다”(55).유방암투병으로죽음의위협을실감한후그는세간의인종차별로인해그동안겪은고통과외로움을남편과온전히나눌수없었다는사실을되새기며급기야결별을제안하기에이른다.결국이혼하는대신부부상담을받지만백인인상담사도외로움의근원과무게를가늠하지못한채문제를사적인차원에서만이해한다.참다못해랭킨은이렇게묻는다.“하지만제남편도,이사람이어떤사람이든간에,어쨌든백인들의미국에속해있지않나요?”(103)
때로는흑인친구들과의대화도그를한없이우울하게만든다.어느흑인여자친구는네살배기아들이어린이집에서투정을부리다교실밖으로쫓겨났다는이야기를들려준다.그것으로도모자라원장은아이의행동을‘폭력적’이라는말로표현한다.“폭력적이라니,라고친구는연거푸말한다.네살밖에안된애한테”(215).흑인남성이특히폭력적이라는뿌리깊은인종차별적가정이어린이집교사와교장의언행배후에똬리를틀고있음을알면서도친구는아들을‘보다좋은’어린이집에전학시키는식으로대처한다.거창한근거를대지만사실은문제해결을회피하고이를정당화하는친구의모습에랭킨은속으로“씨이이이이이앙,져놓고이긴셈칠수는없는거잖아요”(221)라고생각하며울분을삼킨다.
독자인우리에게보내는초대장이자
우리안에서대화와면밀한독해의욕망을일으키려는시도
가끔은정말로대화가벽을허물고상호이해의순간으로인도하기도한다.한번은비행기에서드물게편안한백인남자가옆자리에앉는다.살갑게대화를이어가던중남자는“전피부색은보지도않아요”라고말하고랭킨은“인종을볼수없다면인종차별도볼수없을텐데요”라고답한다.남자는곧바로자신의실언을인정한다.“나는그가현실이라고주장하는현실이내현실이되지않도록맞섰다.그리고그런순간을내가아무렇지않게넘기지않아서,짐짓예의바른태도로상대를침묵하게만드는방식에반기를들수있어서,그가한세월넋두리를늘어놓는일이없어서기뻤다.그가수동적인태도로나를괴롭히지않아서기뻤다.내가처한현실에존재하는혼란을그가받아들일수있어서기뻤다”(69,71).얼마후그는그대화후에자신의삶을반추해봤으며평온하다고생각해왔던삶주변에언제나인종차별의그림자가드리워있었다는걸잊고살았다는,잊고싶었던것같다는내용의메일을보내온다.
다른일화에서는가까운백인여자친구와재키시블리스드루리의연극을보러간다.연극도중한등장인물이백인관객은무대위로올라와달라고요청하는데,많은백인이당황하면서도일어선반면친구는끝까지자리에남아있는다.친구의거부를납득하지못한랭킨은그와의우정을의심하는지경에이르고친구의해명을기다리다더는참지못하고왜그랬던건지묻는다.처음에는가볍게“그러고싶지않았어”라고답하던친구는랭킨이재차묻자그자리에서글로자신의생각을정리해보여준다.“내가느낀당혹감,피로감,슬픔의일부는그런요구가다시또다시,그리고또다시찬란하고도다급하게제기되고,그러면많은백인이어깨를으쓱해보이거나감정적으로고양되는흥분감을느끼지만결국에는아무것도하지않는현실에서비롯한것같아”(265).흥미롭게도대화가이해에이르는일화들은편지로마무리된다.좋은대화란대화가끝난뒤에도계속내면에서파장을일으키며대화의순간만이아니라내삶과내게배어있는태도와가정전체를돌아보게만드는것이기때문일터다.
그렇지만이런드문경우를제외하면대화는어김없이실패한다.예의바른침묵,천진한넋두리,수동적인공격이난파한대화의조각이되어그와함께떠내려가며,대화사이사이에경찰에게목졸리는흑인,아무잘못도안했는데각종공간에서(심지어는자신이예약한호텔방이나자기집에서조차)쫓겨나는흑인,백인경비원에게내동댕이쳐지는흑인청소년,공공장소에서백인에게무시당하고모욕당하며보이지않는존재로취급당하는흑인,강제수용소나다름없는구금시설에갇힌미성년자난민,백인우월주의를공공연히지지하며흑인을살해하기까지하는백인의이야기와이미지가머릿속을떠나지않고끊임없이랭킨을괴롭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