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횃불, 봉선사와 태허 스님 : 봉선사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독립운동의 횃불, 봉선사와 태허 스님 : 봉선사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15.00
Description
수행하듯 살다 가신 님, 매화꽃이 만발하였다.
수행에는 간절함 말고는
별다른 요령이 없구나

운암 김성숙의 삶을 “물 위에게 그림자 진 구름같이 젖지 않는 구름, 아무리 물결이 뒤집혀도 젖을 수 없는 구름”이요, “거리 복판에, 정치의 복판에, 사상의 복판에 서 있는 바위, 아무리 뒤흔들어도 움직일 수 없는 바위”라고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시인은 칭송했다. 한평생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살았던 운암 김성숙 선생이기에 에게 받을 수 있는 찬사일 것이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1898년 3월 10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江岩洞)의 한 농가에서 부친 김문환(金文煥)과 모친 임천(林川) 조씨(趙氏) 사이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선생은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익혔다.
삼촌으로부터 독립군의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성숙은 구국의 의지를 불태웠다. 결국,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하고 18세가 되자 신흥군관학교에 입학하고자 집을 나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만주 봉천으로 가서 독립운동가가 되려는 꿈은, 마침 땅을 판 돈을 훔쳐 품 안에 넣고 집을 떠나 함경도 원산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어떤 힘센 어른에게 붙잡혀 목적지를 추궁받은 끝에 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주인에게 돈을 달래서 품 안에 간직하고 서강사라는 절을 찾았다. 절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도망갈 기회를 엿보다가 새벽에 절을 나서는데, 마침 산등성이에서 경기도 양평 용문사 풍곡 신원 스님을 만났다.
저자

정수일

저자:정수일

전남청산도에서태어나,한국방송통신대학교국어국문학과를졸업하였다.

1977년만화계입문후15년여간만화수업을하였다.

1992~94년『석왕사보』에처녀작「십대제자」를연재하였으며,부천시민신문만평작가(1993~95),방송통신대학교신문만평작가(2011~16),인터넷신문한국투데이만평작가(2011~16),인천예총미추홀문화회관캐리커처강사(2012~16),충남도립대학교평생교육원캐리커처강사(2018)등으로활동하였다.

주요작품으로『정본파브르곤충기』(전10권삽화),『춤추는스님,원효대사』,『나라를구한스님,사명대사』,『독립운동가이자시인,만해한용운』,『한국불교의중흥조,경허스님』,『캐리커처제대로그리기』,『알아두면쓸데있는사물의인문학』등이있으며,현재『석왕사보』에「숯타니밝다」를연재중이다.



원작:유응오

1972년충남부여출생.

2001년〈불교신문〉,2007년〈한국일보〉신춘문예단편소설당선돼등단.

불교계언론사편집장,《불교와문학》주간,현대불교문인협회사무총장역임.

소설집《검은입흰귀》,장편소설《하루코의봄》,《염주(念珠)》,영화평론《영화,불교와만나다》등을출간했다.



컬러:정태영

목차

제1화.설원의발자국을따라서7
제2화.가출에서출가로31
제3화.용문사은행나무아래서57
제4화.봉선사가는길81
제5화.월초스님과의법거량103
제6화.친일과항일의사이123
제7화.의암손병희의가르침139
제8화.만해에떠서흘러가는만월151
제9화.봉선사사하촌에울려퍼진독립만세165
제10화.서대문형무소창살에내리는햇살183
제11화.일왕의생일,독립운동가의생일195
제12화.수행자의길,혁명가의길215
제13화.형제지간,사제지간231
제14화.국사와불사247
제15화.독립운동가의마지막가는길265

부록.봉선사소개289
사찰안내291
운암(雲巖)김성숙(金星淑)행장294

출판사 서평

우리민족의
독립도다르지않으리

그길로김성숙은스님을따라양평용문사로가서승려가되었다.독립군이되겠다고집을나섰다가스님이된것이다.그후,봉선사에서월초스님으로부터가르침을받으며만해한용운스님과의암손병희선생과교류한이야기가당시시대흐름에분노하게한다.출옥하고난후,봉선사큰스님의권유에따라운허스님과법연을쌓는다.

일제의감시를피해봉선사에머물던선생은김봉환,김규하,김정완,윤종묵,차응준등승려5명과함께금강산유점사를거쳐압록강을건너서중국북경으로건너가서독립운동에투신한다.

1923년북경의민국대학에입학한선생은정치학과경제학을전공하면서선진강국들의정치정책과경제정책을공부하였다.만국대학재학당시선생은고려유학생회를조직해회장으로활동하는가하면,창일당(創一黨)을조직해《혁명》이라는기관지를발간했다.

이후선생은일본제국의수뇌부를암살하는독립운동단체인조선의열단에가입하여활동하다의열단선전부장에선출된선생은《혁명동맹》의주필을맡아활약했다.그리고유학한국혁명청년회(留學韓國革命靑年會)를조직하고기관지《혁명행동(革命行動)》을발간하였다.8월선생은중국공산당의광주봉기(廣州起義)에참여하였다.같은해대한독립당촉성회(大韓獨立黨促成會)광동지구분회를조직하는데참여하였다.이후선생은재중국조선청년동맹을직접조직하고항일운동에앞장섰다.

반제동맹(反帝同盟)에가입한뒤기관지《봉화(烽火)》와잡지《반일민중(反日民衆)》의편집위원으로활동하는가하면,중국군19로군(十九路軍)에종군하기도하였다.선생은중국각지의독립운동가들을모아조선민족해방동맹을조직한뒤선전부장에취임하였다.이듬해에는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결성하고선전부장에취임했다.

해방이후선생의생활이어떠했는지1955년2월23일자일기는능히짐작할수있게한다.
“오늘200원을꾸어쌀을사왔다……내가독립운동을하고정치를한다고돌아다니면서도가족을굶기며살고있구나.”

3·15부정선거에따른4·19혁명으로이승만정권은붕괴하였으나장면정부에서도선생은통일사회당을창당해야당정치인으로활동하였다.5.16군사정변이후군정에의해공포된특별소급법‘특수죄처벌에관한특별법’이제정되었다.당시선생은대한민국임시정부동지인장건상과함께체포돼10개월간옥고를치러야했다.군사혁명재판소의집행유예판결로석방되었다.

통일사회당창당에발기인으로참여하였고,대표위원으로추대되었다.이후통일사회당은신한당에흡수되었다.선생은신한당발기인으로참여하였고,정무위원회위원에선출되었다.신한당과민중당의통합으로신민당이창당되자선생은신민당에입당하였으며운영위원으로선출되었다.이듬해에는신민당지도위원으로선출되었다.

추위가한번뼈에사무치지않으면
어찌코를찌르는매화향기를얻을수있으리오

선생은71세의일기로1969년4월12일별세하였다.선생의장례는대한민국정부의발표에따라서사회장으로봉행되었다.조계사에서봉행된영결식에는국회부의장,신민당총재,총무처장관등이참석해조의를표했다.선생은경기도파주조리면장탄리에묻혔다.승려출신임에도불구하고선생의장례가화장이아니라매장으로봉행된것은선견지명이있었던도반운허스님의주장에따른것이다.선생이별세한뒤1년뒤,선생의묘비를세웠다.묘비명도노산이은상시인이지었다.

운암김성숙선생은비바람이앞을가리는여정속에서도부정과불의에굽히지않고지조(志操)와절개(節槪)의삶을살다가셨다.선생께서는“추위가한번뼈에사무치지않으면(不是一番寒徹骨)어찌코를찌르는매화향기를얻을수있으리오(爭得梅花撲鼻香)”라는가르침을몸소보이셨으니,비록선생은가고없으나,애오라지조국의앞날만을생각한선생의민족얼은후대에세세생생계승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