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한 우리는 써야 한다!
- 글쓰기의 존재론과 실전팁이 담긴 ‘양생과 구도, 밥벌이로서의 글쓰기’ 책!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20여 년간의 공부공동체 활동을 통해 경험해 온 고전 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비전과 노하우를 담은 책. 무엇보다 사람은 왜 글을 쓰며, 인간의 본성과 글쓰기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왜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읽고 써야 하는지를 다룬 1부 ‘이론편’의 ‘글쓰기의 존재론’이 압권이다. 자기를 성찰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매개인 말과 글을 가지고 내가 창조하고 조율하며 소통할 수 있는 능력-바로 그것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읽고 써야 한다. 특히 저자는 읽기와 쓰기의 관계에 대해서도 단순히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어야 한다는 정도를 넘어 “쓰기는 읽기의 연장선이자 반전이며 도약”이기에 “읽으면 써야 한다”면서,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로 가득 찬 고전들을 맹렬히 읽고 쓸 때, 글쓰기는 “양생술이자 구도이며 또 밥벌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2부 ‘실전편’은 실제 진행했던 글쓰기 강의의 녹취록을 토대로 한 것으로, 실전 글쓰기에 도움이 될 노하우가 ‘칼럼 쓰기’, ‘리뷰 쓰기’, ‘에세이 쓰기’, ‘여행기 쓰기’ 등 네 개의 카테고리에 담겨 있다.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지은이 인터뷰
1. 많은 글쓰기 책이 있지만, 선생님의 이 책은 다른 글쓰기 책에서는 볼 수 없는 ‘글쓰기의 존재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글쓰기’야말로 우리의 생명과 존재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하고 계신데요, 어떻게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거라고 여겨 왔던 글쓰기가 존재 일반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간략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간략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보통 글쓰기를 여행이나 운동 등 여러 취미 활동 중 하나이거나 조금 전문적인 취미처럼 생각하기가 쉽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고요. 그런데 제가 한 20년 동안 백수지성으로, 매년 한 두 권의 글을 쓰고, 여러 가지 (공동체) 활동과 삶을 실험하면서 ‘글쓰기’ 자체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것들이 생겼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글쓰기’는 여러 취미 활동 중 하나가 결코 아닙니다. 간략히 요점 몇 가지만 말씀드려 볼게요.
지금은 ‘대중지성의 시대’입니다. ‘대중지성의 시대’란 대중이 (전통적인 의미의) 엘리트가 되는 시대라는 겁니다. 그럼 ‘엘리트’는 뭐냐,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인식과 사유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엘리트’입니다. 그게 아니라 (엘리트들이) 생산한 글을 받아보고, 그 사유를 받아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대중’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글쓰기’란 다른 활동들과는 다르게 어떤 ‘본질적 능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모든 사람이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환경 속에 있습니다. 말인즉, ‘대중’과 ‘엘리트’의 구분이 과거와 같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는 겁니다. 디지털 네트워크,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무한한 독서를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것들을 잘 편집해서 ‘나의 사유’를 펼치면 되는 거죠. 그런데 글쓰기를 보통의 취미나, 아니면 특별히 전문적인 무언가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인식과 사유의 방향 설정)까지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중에 글쓰기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이 자체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니까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책들이 ‘테크닉’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데요, 제가 공동체에서 ‘글쓰기’와 관련된 여러 활동을 해 본 결과 ‘테크닉’은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한 게 아닙니다. 1~2년 배우면 똑같습니다. 기술적인 건 배우면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왜 어떤 사람은 책을 내는 데까지 가고, 어떤 사람은 그냥 포기하고 마는가 생각해 보니, (포기하는 경우는) 이 ‘글쓰기’가 우리의 생명, 삶에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걸 모르고, 그저 거쳐 가는 한 과정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보통은 ‘테크닉’을 잘 익히면, 글을 잘 쓰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글쓰기’를 욕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걸 내 삶에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시키는지가 중요한 겁니다. 책에 쓴 것처럼 ‘글쓰기가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이죠. 글쓰기를 존재의 근거로 생각하면 중간에 멈추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걸(글쓰기)를 계속해갈 동력을 얻는 것이죠. 저는 글을 쓸 때 내 안에 차오르는 어떤, 충만감? 그런 것이 있는데 그건 정말 미세합니다. 나 말고는 아무도 눈치를 챌 수 없죠. 그건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겁니다. 테크닉이 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 자신은 글을 쓰는 게 너무너무 성취감을 주는 거예요. 왜 그런 걸까? 그건 바로 내가 글쓰기를 내 존재와 직접 연결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깨닫고, 책에서도 그 점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그런 관점은 인생 전체의 비전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어떤 화려한 직업, 성공한 직업도 ‘은퇴’라는 게 있어요. 그럼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은퇴를 하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화려하고 성공적인 일을 했더라도 그걸 써놓지 않으면 그건 그냥 흩어져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들 하죠. 이건 말인즉 ‘노동’이 점점 사라져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노동하느라 부족했던 시간들이 남는 시간으로 바뀌는 와중에 도대체 무얼 할 것인가. 인간은 결국 인식의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해부해서 성찰해 봐야 하고요.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럼 그때 필요한 게 뭘까요? 바로 말과 글입니다. 저는 말과 글이 가장 보편적이면서 자기를 성찰하면서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그러한 매개라고 보기 때문에, 이건 모든 사람의 비전이 될 수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 중요한 일을 예전처럼 엘리트에게 맡겨놓고 그걸 따라가겠다?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거죠.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들이 막 이렇게 어우러져서 새로운 어떤 중중무진의 우주를 만들어 내는, 이런 게 아마 디지털 혁명이 가져다준 새로운 삶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말과 글을 창조하고 조율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글쓰기의 존재론’을 되새겨 볼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2. 앞질문과 연관해서 어떻게 글쓰기가 ‘양생과 구도 그리고 밥벌이’가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셔요.
양생의 핵심은 내 몸의 기운, 정기신(精氣神)과 내 몸 바깥, 자연의 기운을 조화롭게 소통시키는 것입니다. 기운은 사람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고, 계절에 따라 또 달라지죠. 이렇게 천변만화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활한 소통 상태를 만들려면 집중해야 합니다. ‘집중력’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문제인데, 이때 ‘집중’과 ‘집착’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은 몸의 욕망, 에너지를 특정한 한 가지에 쏟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것들과의 소통은 끊어지지요. 그러면 몸이 망가집니다. 집중은 몸 전체의 기운을 모으는 능력이에요. 이 능력이 떨어지면 사람의 몸과 마음은 항상 흩어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언제나 산만하려고 하죠.(웃음) 한마음으로 무언가를 해내려고 하면 1분도 사실 힘들어요. 그런 걸 매 순간 느끼죠. 그러니까 ‘정신줄 잡아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이해가 됩니다. 그걸 놓치면 그냥 하루 종일 붕 떠서 사는 것 같죠. 그래서, ‘집중’을 해야 하는데, 이걸 하려면 기운이 몸 아래쪽은 내려가서 딱 버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위로 올라와서 방방 뜬다? 그러면 바로 그게 ‘중독’이에요. 아래로 딱 내려와서 버티는 힘을 내는 상태, 이걸 의역학에서 ‘수승화강’이라고 부릅니다. 명상을 하거나, 기도나, 백팔배를 하거나 하는 것들이 그런 상태를 만들려고 하는 활동이죠. 그런 활동들이 일상에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행자’가 아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활동이 뭐가 있을까요? 바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겁니다. 이 일은 절대 중독이 안 돼요. ‘독서’에 중독된다? 그런 사람은 없어요. 특정 장르에 중독이 될 수는 있겠죠. 그렇지만 그런 사람에게 ‘불경’이나 『주역』을 가져다주면 절대 중독되지 않아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중독이 되나요? 불가능합니다. 글을 쓰는 데 중독이 된다? 그건 자기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고 쓰면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과 세계를 성찰하는 데 중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글쓰기를 하면 몸 전체가 기운을 수렴해 집중하게 됩니다. 양생에 이보다 좋은 건 없는 셈이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최고의 행위, 일단은 독서고 그다음은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구도’는 자신의 인생을 길게 보는 겁니다. 자신의 생로병사를 보는 건데, 그것의 핵심은 생사, 결국은 ‘죽음’이죠.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게 핵심이에요. 죽음은 ‘절대적’인 겁니다. 이걸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냥 살다보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피고, 자기 삶에 응용하고, 그러니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2600년 전 카렌 암스트롱이 ‘축의 시대’라고 불렀던 그 지점으로 가게 됩니다. 소크라테스, 공자, 노자, 부처가 등장했던 시대죠. 그 분들의 주제도 ‘죽음’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내가 죽어도 삶은 계속되죠. 이걸 ‘역사’라 부르든, ‘우주적 순환’이라 부르든, ‘영혼 불멸’이라 부르든 어쨌건 그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정답은 없죠. 정답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찾아갑니다. 그게 ‘구도’인 거고요. ‘답’이 있고, 그걸 찾으러 가는 게 ‘구도’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질문을 붙들고 지평선을 향해 계속 가는 행위가 ‘구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