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 이야기, 또는 미술의 불완전함에 관하여

껍질 이야기, 또는 미술의 불완전함에 관하여

$18.00
Description
"무엇인가가 눈 달린 자를 멈춰 세우고 거기 없던 입구를 열어 보인다."
관심을 끌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미지들과 긴급한 목소리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 미술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미술 비평가 윤원화는 코로나 19 팬데믹 기간에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으로 본 미술 전시들을 되짚으면서 오늘날 미술이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며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볼 수 있을지 이야기한다.
파편적인 산문들로 이루어진 이 책을 하나로 엮는 것은 껍질의 형상이다. 껍질은 그 자체로 알맹이가 아니지만 그와 같은 것이 깃들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보는 자의 눈길을 끌고 입을 열게 하지만 어떤 말로도 붙잡히지 않는다. 『껍질 이야기』는 이탈로 칼비노의 조개껍질과 앙리 르페브르의 거미줄에서 출발하여, 유 아라키의 노래하는 굴껍질, 파트타임스위트의 웅성거리는 입자들과 김주원의 조각난 사진들, 텅 빈 미술관 공간을 360도로 벗겨낸VR 전시, 고해상도로 촬영된 이사무 노구치의 조각 정원, 문경의의 허기진 그림들과 현남의 쭈글쭈글한 껍질 더미, 몸의 잔상들로 포화된 신체훼손 요리 쇼, 브뤼노 라투르의 부드러운 땅껍질, 서울 한복판에 숨겨진 돌산, 언메이크랩이 생태공원에서 발견한 깨진 자갈과 김아영의 방랑하는 돌, 바다를 가로질러 해변에 다다른 코니 정의 사변적 씨앗에 이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껍질의 이야기는 살아 있는 몸이 더 많은 삶을 향한 열망과 환멸 속에서 자신이 놓인 장소를 고쳐 그리는 성장과 이주, 피난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서로 불일치하는 몸과 이미지의 삐걱거리는 상호작용을 따라가면서, 이 책은 현재의 제한된 지평을 흐트러뜨리는 미술의 불완전한 힘을 긍정한다.

저자

윤원화

저자:윤원화
서울을기반으로활동하는시각문화연구자,비평가,번역자다.전시공간을실험실처럼사용하여몸과이미지의상호작용속에서생성되는시간성을탐구하고그것을통해현재작동중인역사의모양을고쳐그리는데관심이있다.저서로『그림창문거울:미술전시장의사진들』,『1002번째밤:2010년대서울의미술들』등이있으며,역서로『사이클로노피디아』,『기록시스템1800/1900』등이있다.아카이브전시《다음문장을읽으시오》를공동기획했고,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2018에서〈부드러운지점들〉을공동제작했다.

목차

머리말

1장.껍질의우화

조개껍질아래의목소리
방랑하는껍질들
몸이라는공간
이미지의자리

2장.텅빈오케스트라

세계를재현하는법
우리의이미지
미디어의동굴에서
노래하는시간

3장.배속의늑대

몸들의정원
껍질들의집
콘텐츠농장
먹고남은것

4장.돌,씨앗,흙

유령행성에서뛰어내리기
박힌돌과구르는돌
얽힌통로들
흙또는씨앗

보론.껍질이굴러간자리에서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껍질같은것들은지난몇년사이에미술관과갤러리에서자주목격되었다.얇거나두껍거나쭈글쭈글한것들,제대로된몸을갖추지못하지만그렇다고몸을버리지도못하는딜레마속에서나름의자세를취하고경로를모색하는사물들이우글거렸다.관람자는그배치를이미지들의모험이상연되는일종의연극처럼바라볼수도있을것이다.실제로이미지들은전통적분류체계를고수하기어려운오늘날의물질적조건에서새로운연합을구성하려애쓴다.그러나우리는외부적관찰자의위치에서한가롭게그분투를구경할수없는데,왜냐하면이이미지들이우리의닮은꼴로발견되기때문이다.껍질은한쪽에서보면이미지의몸이지만다른한쪽에서보면몸의이미지다.그것은자족적이지도,자립적이지도않은몸의불완전함을상기시킨다.하지만껍질은몸의잔상이사물화된것으로서또다른몸을주조하는거푸집이될수있고,이를통해과거와미래,여기와저기의몸들을분절하고연계하는매개체로작동할수있다.만약껍질을하찮은부산물이아니라변성을수반하는운송수단으로보고그에탑승한다면,그것은우리를예기치못한곳으로데려다줄지도모른다.
---p.16~17

우리는통제에실패하는주체이자통제를회피하는대상이다.지구전체를조망하는광범위한데이터시각화의평면에서우리같은개체들은인간과비인간을불문하고한무더기의입자들로표시된다.거시적관점에서우리는미세먼지처럼관측되고바이러스처럼억제되고플라스틱쓰레기처럼규제를벗어난다.우리는너무많이알려진동시에일일이알필요가없는것으로서앎의공백을내포한데이터의껍질이된다.정말로우리는어떻게재현될수있을까?이질문에는우리가과연재현될만한가치가있는가하는불안이은밀하게깔려있다.이러한재현의위기가발생하는까닭은세계가더이상인간이귀속되는장소이자인간의성취를보여주는활동의무대로그려지지않기때문이다.세계가인간의존재를의미있게하는배경에머물지않고나를둘러싼것들과의관계와경계가불분명해질때,우리는우리자신에게알수없는대상이된다.우리가무엇이고무엇이될수있다는가능성의영역전체가잘보이지않는다.그리고이같은인식의구멍은어떤맥락도필요하지않은자명하고잘보이는이미지들로메워진다.그것은인간형상이든아니든간에우리를대신해서살아간다는점에서재현보다대체물에가깝다.
---p.76

노년의미켈란젤로는시스티나성당의〈최후의심판〉을제작하면서천상의바르톨로메오가든육신의텅빈껍질에자신의얼굴을그려넣었다고전해진다.일그러진표정의껍질은폭력적인분리가수행되고각인되는장소로서예술가의초상이된다.눈에보이는세계를통째로집어삼키려는자에게남는것은축늘어진껍질밖에없다.〈동굴〉은이껍질들이뭉쳐지면서말그대로이빨을드러낸모습을보여준다.이빨사이에는조그만인간들이끼어있고,피부는녹아내리는이미지로뒤덮였으며,눈과코가있어야할자리는주저앉아시커먼동굴이되었다.이렇게훼손되고훼손하는몸은정말로무엇이라고불러야할까?그것은뭔가나쁜것에홀렸나,아니면원래그럴수밖에없는것인가?일그러진이미지,얄팍한살,복구불가능한구멍으로이루어진손상된몸들은달콤한과자의집,한없이늘어날수있는위장,부서지지않는이빨을꿈꾼다.또한그것들은회화와조각을꿈꾼다.더할나위없는시각성의몸체가되어온전히자기만의시공간을확보하고싶다는소망이있다.하지만정말로그런특별한사물들만오를수있는천국이있어서그곳에서평온하게세계를관조하는일이가능할까하는의문도있다.미술은또다른과자의집이아닐까?불완전한몸들은허기에사로잡힌채생각에잠겨있다.
---p.127~128

극중에서씨앗을찾는사람들이허술한방호복으로무장하고해변을뒤지는동안,해양쓰레기를겹겹이뒤집어쓴정체불명의방문자는황폐한풍경을떠돌며어긋난시간과장소를비춘다.씨앗을추적하는몸짓과씨앗을연기하는몸짓은크게다르지않다.이들은물결에휩쓸리고땅에파묻힌사물들,어떤경로로거기까지왔는지알수없는물건들을발굴하여조심스럽게자기를겹쳐본다.비가시적내부를구획하는씨앗의폐곡면은각자의시점에서보이지않는것이있음을암시하며눈에보이는세계를대하는다른관점들을이끌어낸다.결국씨앗은과거의잔해속에서결정화된미래의입구다.각각의궤적속에서저마다의기억과가능성을숨기고있는모든사물과사람과장소가씨앗의형상과연합될수있다.하지만씨앗은또한인간과비인간,삶과죽음의경계가모호해지는지하의입구다.씨앗을따르는사람들은반복해서꽃과열매사이,줄기와뿌리사이,식물이자라거나자라지못하는땅에눕는다.웅크린몸들이잠들었는지,죽었는지,아니면외부활동을멈추고내부를재구축하는지겉보기로는알수없다.씨앗의소문은무엇이씨앗이고그것이자라무엇이될지모른다는불확정성을전파하면서그에연루된것들을조용히진동시킨다.
---p.194~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