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에는 학문이 필요 없다’ ‘장사꾼이 학문에 눈을 뜨면 도리어 해가 된다.’라는 짧은 생각들이 만연했던 에도 시대. “생산노동과 이익추구는 ‘인의도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상인, 수공업자, 농민)’들의 본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사는 모두 악”이라고 말하던 에도 시대의 상업천시 기풍. 그리고 쇄국정책으로 인해, “지식은 점차 낙후되고, 활력은 쇠퇴하고, 형식은 번잡해져 사무라이 정신은 퇴폐해지고 상인은 날이 갈수록 비굴해져, 결국엔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허위가 판을 치는 국면에 접어(232p)”들었던 에도 시대 말기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시부사와 에이치.
그는 “17세 때 사무라이가 되고 싶다(82p)”는 뜻을 세웠다. 인간 취급을 받기 위해서였다. 1858년, 에도 막부가 서양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항구를 봉쇄하라는 천황의 지시를 무시한 채, 불평등 조약인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시부사와 에이치는 서양오랑캐들과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을 전개했다. 1863년 23세의 그는 69명의 무사와 지사들을 규합해, 다카사키 성을 탈취하고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에 화공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봉기는 불발이었다. 불령선인으로 쫓기다, 도쿠가와 요시노부(?川慶喜, 15대 쇼군)의 가신이 됐다. 당초 막부 타도를 외쳤던 그가 막부 체제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으로 대변신을 한 것이다. 그리고 1867년 27세의 그는 인생의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했다. 쇼군의 명으로 파리 만국박람회에 가게 된 것.
그의 첫 번째 서양 여행은 충격 그 자체였다.
“여태껏 사농공상의 봉건적 신분제도가 존재하며 ‘상업은 유교에 반(反)하고 상공업은 비천한 자들의 몫’이라던 낡은 관념이 우세하던 일본과 달리, 연회 장소에서 정부 관리와 기업인이 평등하게 대화를 나누고 신분적 차별도 관존민비의 풍조도 없으며, 도리어 상공업자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시부사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년 시절에 관리로부터 ‘더러운 장사꾼’이라는 수치를 당한 후 봉건적 신분제도에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던 시부사와는 파리에서 서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상공업자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 국가 발전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그 자체가 충격이었다. 이때 시부사와는 ‘상공인의 실력을 길러 상공업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일본의 부국강병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320p)”
메이지 원년인 1868년 12월 3일 2년 만에 귀국한 그는 존왕양이 근황지사에서 이미 근대 계몽가로 변신해 있었다. 그리고 29세가 되자, 다시 인생의 항로를 바꾸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양자본주의 경제 지식과 탁월한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그가 대장성에 입성해 조세정(조세국장)으로 첫 관료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이렇게 높은 직책을 맡은 까닭은 만국박람회 사찰단의 일원으로 얻은 다양한 해외 견문과 경리 업무 지식이 높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었다. 또한 그는 개정괘장(구조개혁국장)으로 개혁안을 기획하고 입안해 도량형, 조세, 은행, 회계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1873년 33세의 시부사와 에이치는 예산 편성을 둘러싸고 오쿠보 도시미치(사이고 다카모리와 기도 다카요시와 더불어 메이지 유신의 삼걸)와 대립의 각을 세우다, 이노우에 가오루 대장대보와 함께 관직에서 은퇴했다. 그리하여 5년 6개월간의 관료 생활을 마친 그는 다시는 절대로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관계를 떠나 민간으로 내려왔다. 이후 시부사와 에이치는 60년 동안 오직 일본의 경제 발달만을 위해 헌신했다.(323p)”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서양의 각 나라들이 융성하고 있는 까닭은 바로 상공업의 발달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일본이 단지 이렇게 현상 유지만 한다면 언제 서양과 비견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굴기(?起)를 위해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싶다! 이런 생각이 너무나 강렬하게 들며, ‘일본의 비즈니스맨이 되겠다.’라는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이죠.(83p).”
사무라이를 꿈꾸다, 근왕지사, 막부의 가신, 메이지 정부의 관료에서 결국 상인이 된 시부사와 에이치는 일본 근대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쓸 수밖에 없는 최초의 사업과 제도를 수없이 꾸려나갔다. 제일국립은행, 니혼유센(日本郵船), 도쿄가스, 도쿄해상화재보험, 일본 제1위의 제지회사인 오지제지(王子製紙), 치치부시멘트(태평양시멘트), 데이코쿠(帝國)호텔, 치치부철도, 게이한전기철도(京阪電??道), 도쿄증권거래소, 기린맥주, 삿포로 맥주, 일본우선회사(日本郵船?社), 세키스이(淸水) 건설 등등 500개 이상의 다양한 기업의 설립에 관여했다. 그는 다른 상인이나 재벌과 다르게 단순한 사적인 영리추구 차원이 아니라 국가경제라는 공적인 차원에서 일본 근대 실업계의 방향을 이끌었다.
부귀는 인류의 성욕과도 같은 가장 원시적이며 근본적인 욕구……
진정한 부는 ‘논어=도덕’과 ‘주판=이익’을 통일시킨 의리합일義利合一
시부사와 에이치의 인생은 곧바로 ‘『논어』의 실천’이었다. “왼손에는『논어』, 오른손에는 주판을 들고” ‘일본 금융의 왕’ ‘일본 근대 경제의 최고 영도자’ ‘일본 현대 문명의 창시자’가 되었다. 우선 그는 현실적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부귀는 인류의 성욕과도 같습니다. 가장 원시적이며 근본적인 욕구입니다(227p).”라고 말했다. 하지만 “에도 시대의 유학자들이나 송나라의 유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인의도덕과 영리추구는 절대로 모순 관계가 아니”라면서, “‘인의도덕과 이익 추구는 더불어, 함께 추구할 수 있다’는 대원칙(175p)”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래서 논어(도덕)와 주판(경제), 서로 달리 보이는 이 두 가지를 융합하는 것이 지금, 가장 중요한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 시부사와 에이치의 저작 『논어와 주판』은 일본에서 ‘비즈니스의 바이블’로 불리며 전해져 오는 책이다. 91세로 생을 마친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치가 1873년 33세의 나이로 관계를 떠나 실업계에 투신한 이후 여기저기서 행한 강연을 1927년 추세도(忠誠堂) 출판사가 엮어 냈다.
『논어와 주판』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의리합일(義利合一)=도덕ㆍ경제 합일=논어ㆍ주판 통일’이다. 진정한 부는 인의도덕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절대로 지속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논어』「술이」편 12장을 보자.
“만약 부가 추구해서 얻을 수 있고 떳떳한 것이라면 비록 말채찍을 잡고 임금의 길을 트는 천한 일이라도 나는 하겠다. 하지만 구해서 부당한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하겠다.”
시부사와 에이치는 “도리가 뒷받침하지 않은 부귀를 얻는 것보다 오히려 빈천한 편이 낫지만 만약 올바른 도리를 다하고 얻은 부귀라면 도리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게 바로 공자의 전언이라고 주장한다. 『논어』에는 결코 부귀를 천시하는 내용은 없었고, 공자가 ‘부귀=악’이라고 보았다는 해석도 후세의 오독이라고 단언한다. 본래 공자는 부귀하여 방탕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을 뿐인데, 이것을 가지고 공자가 부귀를 싫어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시부사와 에이치는 이러한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 ‘본래의 공자=『논어』’를 찾는다. 그는 송나라의 주자학에 뿌리를 둔 에도 시대의 유학은 ‘이(利)를 배척하고 인(仁)만을 강조’했기에 공자의 『논어』와는 다르다고 한다. 애초에 공자는 의(義)와 이(利)는 불과 물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라고 주장한 게 아니라 ‘의리합일’을 외쳤다는 것이다.
시부사와 에이치에 따르면 공자는 ‘도리로 얻은 부는 오히려 빈천보다 더 낫고, 진실로 도리로 얻은 부는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정당한 도리와 방법으로 얻은 이익은 그 자체가 선이라고 한 게 공자의 주장이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공자는 『논어』「이인(里仁)」편에서 “부귀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부귀를 누리지 않아야 한다(181p)”고 말했다. 그래서 시부사와 에이치는『논어』에서 ‘논어ㆍ주판 통일이론’이라는 경제 윤리를 추출해 ‘한 손에는 건전한 부의 윤리를 강조하는 ‘『논어』’, 다른 한 손에는 화식(貨殖)의 ‘주판’을 들고 당당하게 경제 활동을 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른바 ‘도덕ㆍ경제 합일설’이다.
또한 상업은 사리사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공익을 동반해야 한다며 ‘공익과 사익의 통일’을 역설한다. 개인의 영리 활동이 공익과 국가의 부를 전제로 한다는 것, 즉 “개인의 이익 추구가 결과적으로는 국가와 공공의 이익으로 연결 된다”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도 관점이 일치(7p)”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논하려면 『논어와 주판』을 들라!
의리합일설과 논어주판통일 이론의 핵심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서양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경영학(management)』(1974년)에서 “시부사와 에이치는 누구보다도 먼저 경영의 본질이 책임과 신뢰란 것을 꿰뚫어 보았다”며, 기업의 목적이 부의 창출일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공공성이라는 것을 시부사와 에이치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시부사와 에이치는 피터 드러커의 평가대로 『논어』에서 그의 경영사상의 프레임을 짜냈다.
독일의 사회경제학자 막스 베버가『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지적한 것처럼 서구의 근대자본주의는 금욕, 검소, 청렴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관이 동력이었다. 시부사와 에이치 역시,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영국의 상인과 은행가들의 신용이 높았던 까닭도 그 덕분이라고 지적한다. “당시 아메리카의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앵글로색슨계 미국 신교도)로 불리는 사람들도 신용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기업가들이 영국 신사와 아메리카 실업가들을 존경한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