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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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국가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부족했던
신생 대한민국이 붕괴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자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초창기 한국 정부는 군대와 경찰 같은 안보 자원뿐만 아니라 재정과 인력 측면에서도 심각한 부족에 허덕였다. 국가는 부족한 물적 자원의 대체물로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을 수시로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북한이라는 실질적인 군사적 위험, 국내에 발생한 광범위한 저항과 반란의 위협 앞에 민족주의 이념은 수축되고 왜곡되는 과정을 겪었다. 생존의 기로에서 국가는 부일 세력과 우익 단체를 국가 건설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안보 위기를 넘겼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폭력과 유혈, 국가범죄로 인해 정치적 정통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은 정치적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토지개혁과 의무교육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고, 그 결과 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귀속감이 증대했다. 이를 지켜본 중도파들이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가 건설에 대거 참여해 정치적인 정당성이 증가하는 가운데, 적어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ㆍ사회적 안정성이 상당 부분 확보되었다. 촉박한 국가 수립 일정, 부족한 예산 및 자원 속에서 초라하게 탄생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대국이자 세계 7위의 군사 강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이 책은 취약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객관적ㆍ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최초의 시도이자, 그 시대를 산 건설자들에 대한 헌사이다.
저자

이택선

서울대학교정치외교학부대학원에서해방전후의한국정치사와동아시아국제관계사연구로박사학위를받았다.조지타운대학교외교학대학원아시아연구소방문연구원을거쳐서울대학교를비롯한여러대학교에서강의했다.현재충남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교수연구원과서울대학교국제문제연구소객원연구원으로재직중이며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연구위원,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와한국정치외교사학회연구이사로활동하고있다.
주요연구분야는문명전환기권력의이동에따른한국의국가건설과외교이며,한국과동아시아역사의보편성을중시하면서도한국의특수성을고려한역사적설명과독자적이론개발에힘쓰고있다.
주요저서로『동아시아문화협력체추진방안연구』(공저,2020),『한국근대공화주의자6인의리더십』(공저,2019),『북한과국제정치』(공저,2018),『한국의민주주의와한미관계』(공저,2014),『지식과국제정치』(공저,2008)등이있다.

목차

머리말

1장취약국가론의배경
현대사를보는두관점|취약국가론의핵심

2장취약국가탄생의서막
미군정의상황(1945년9월~1948년8월)|미군정기의경찰|미군정기의군대|미군정기의재정·조세기구

3장내란의시작
본격화된내란과5·10총선거|노동쟁의와파업의본격화|9월총파업과대구10·1사건|좌우익청년단체|제헌의회선거와향보단|제주4·3사건

4장대한민국의국가건설1
초라한출발|부족한예산과안보위기로미뤄진경찰개혁|대한민국초기의군대|초기의재정·조세기구

5장대한민국의국가건설2
미국을만족시킨젊은장교들|제헌헌법|좌초된반민특위|여수·순천사건|국가보안법과일민주의|토지개혁|의무교육실시와근대인의정체성수립|중도파의국가건설참여|국가성의획득과기획처의활약

6장근대국가의기틀을마련하다
과대성장국가론의신화|취약국가형성과정에서발견되는한국특유의특징

후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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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국가형성’의관점에서새롭게본해방전후사
〈취약국가대한민국의탄생〉은해방이후부터한국전쟁발발직전까지의한국현대사를국가형성(nationbuilding)의관점에서객관적,실증적으로재구성한책이다.저자인이택선박사(서울대외교학과)는‘근대국가는합법적폭력의독점에서출발한다’는막스베버의관점에따라핵심국가기구인경찰과군대,재정및조세기구의형성과정을기술하면서신생대한민국의탄생과국제정치적배경을살폈다.특히2000년대초반아프리카와중동,중앙아시아국가들의국가형성과정을연구한랜드연구소의표준국가모델과비교검토한부분은상당히흥미롭다.21세기의국가건설사례들과비교해보아도턱없이부족한자원을가졌던대한민국이지난한역사속에서성공적인발전을이루었는데,이는한편으로모범적이면서도대단히이례적인케이스이기때문이다.신생대한민국은어떻게그토록부족한자원과심각한위기속에서도,오늘날에수없이볼수있는파탄국가(failednation)들처럼붕괴하지않고존속할수있었을까?또한취약국가에서출발하여숱한위기를넘기는과정에서노출된취약성이어떻게최근까지우리사회에깊은그림자를드리우게되었을까?

과대성장국가가아니라취약국가로태어난대한민국
한국현대사를해석하는관점중하나인‘수정주의’는한국이처음부터과대성장국가로출발했다고말해왔다.과대성장국가론은브루스커밍스등의수정주의역사학자들이제시한것으로,한국에서는서구와달리시민사회가형성되기도전에근대적인관료체계와경찰력을가진국가기관들이비대하게성장하여사회를지배했다는주장이다.이책의저자이택선박사는이를정면으로반박하며한국은처음부터물적ㆍ인적자원이부족하여국가기구가허약한취약국가로출발했다는명제를제시한다.한국은과대성장국가가아니라모든자원이부족한취약국가였다.

미국은처음부터대한민국‘국가건설’계획이없었다
해방후한반도이남을점령한미국은애당초한국인들의국가건설에대한장기적인비전을가지고있지않았다.한국은물적자원이부족해미국의원조에철저히의존할수밖에없었지만,한국에대한미국의지원은매우불충분했다.미국의대외전략에서한반도가차지하는중요도가유럽에비해한참떨어졌기때문이다.한국을포함한동남아시아지역에대한미국의대외경제원조비율은유럽과일본의1/10에도미치지못했다.이는미국이유럽에서의공산주의봉쇄에더치중했기때문이다.미국은1947년7월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완전히결렬되기전까지만해도소련과의협상을통해한반도에서품위있게철수하는데집중했을뿐이었다.다시말해미국은한국의국가건설에적극적으로임하지않았다.해방후1년동안남한경제가무질서하고혼란스러운상황인데도미군정은예산과자원부족을들어장기적인경제건설계획을추진하지않았다.민생과직결된문제에만임기응변식으로대응했고소극적인관리와유지에급급했다.이러한사정은미군정기간에도입된4억3,400만달러어치의원조물자가운데식료품이전체의39%를차지한반면,건축자재와철도자재는1.7%와3%에불과했다는데서단적으로드러난다.미군정은공무원들에게최소한의생계를유지할수있는수준의봉급마저지불할수없었고,결과적으로공무원들이상납과뇌물에의존하고원조물자를밀거래하는등부패문제가구조적이고고질적인문제가되는데빌미를제공했다.

자원의부족으로인해민족주의에의존한미군정
미군정은물적자원의절대적부족을만회하기위해이념자원에의지할수밖에없었는데,그것은바로‘민족주의’였다.미군정도처음에는경찰과군대에친일부역자들을철저히배제하고항일투쟁과민족주의적대의명분을가진인물들을의도적으로고위관리직에임명하여이념자원을활용하고자했다.또한이승만과같은우파정치인을주로지원하기보다는김구,김규식등임시정부인사들과중도파들을포괄하는연합노선을시도했다.청년단체도극우반공단체대신임정출신들을중심으로출범해정통성을지니고있던조선민족청년단같은단체를공식후원했다.그러나인적자원의부족문제를극복할수없었다.근대국가의핵심기능인합법적폭력을독점하고관료제행정을담당할인력의부족문제가너무나심각했기때문이다.

부일경찰과우익청년단체가국가건설에참여하다
1946년4월부터미군철수가본격화되자치안분야에서상당한공백이발생했다.이를틈타공산세력들이국가전복을시도했지만미군정은인적자원의부족으로치안유지에어려움을겪었다.당시한국은식량문제가심각했는데해외에서귀국한사람들과월남민의수가급증했기때문이다.경찰의부패와금품강요도일상적인일이었다.1945년9월기준한국경찰의봉급은3달러에불과했는데,이는북한위관급장교들이받은260달러(1,300루블)에비해턱없이적은금액이었다.식량부족과만연한부패는민중의불만을야기했다.결과적으로1946년9월총파업과10월1일대구항쟁이발발했다.대구는당시“제2의모스크바”로불릴정도로좌익세력이강성한도시였다.
미군정은국가에대항하는폭력세력에체계적으로대응할수없어결국우파청년단체들의협력을용인했다.우익청년단체들이국가건설과정에참여하게된것이다.부일관료들도국가기구에계속존속하게되었다.미군정은일제치하에서행정경험을쌓은한국인을최대한동원하는방식으로경찰력을증강했다.그리하여1948년에이르면2~3년전에비해경찰규모가2배이상증가하게된다.

광복군중심의군대에서부일세력의군대로
1947년단독정부수립이결정되자경찰뿐만아니라군대도규모가커져7개월만에3배증가했다.미군정기와대한민국정부출범초기에는광복군출신들이절대적수의열세에도불구하고군대에서최고지도부를형성하고있었다.처음에는임시정부와광복군출신인사들이국군의중심이되어야한다는사회적분위기가팽배했기때문이다.그러나광복군출신의군지도부는이데올로기적정통성은갖췄을지모르나현대적전술과지식을구비하지못했고무능했다.1948년제주4ㆍ3사건과여수ㆍ순천사건을계기로일본군출신의군인들이다시기용되었다.국가안보위기가발생하자일제강점기의전력을이유로스스로근신하고있었던50~60대의일본군출신자들이1947년말부터전격입대했기때문이다.이들은1948년부터제주도와여수,순천,옹진지구등최전선을중심으로배치되었다.이와함께20~30대의젊은일본군출신장교들이미국이요구하는현대전의기준을빠르게수용하면서군에서주도권을갖게되었다.

갑작스럽게결정된국가건설과안보위기
1947년미국과소련의협상결렬로갑작스럽게국가건설이결정되었고새로운국가를건설하고자하는인민의열망으로제헌선거가성공적으로치러졌다.그러나김구와김규식을중심으로한중도파는분단고착화를염려하여국가건설에참여하지않았다.한편1948년4월에남한단독정부수립을받아들이지않았던제주도에서내전을방불케하는폭력사태가일어나수만명의사상자가발생했다.뒤이어10월에일어난여수ㆍ순천사건으로신생대한민국은최대위기를맞이했다.군내좌익세력이제주도에대한진압을거부하여반란을일으킨것이었다.여수ㆍ순천사건은정부출범2개월만에발생한좌익의본격적인봉기였으며,이를진압하는과정에서민간인학살과같은막대한국가폭력이행해졌고전체희생자가1만여명에달했다.
여수ㆍ순천사건을계기로국가안보의문제가최우선과제로등장하고사회분위기가급변했다.안보적위험에서초기국가를보호하기위한극단적조치들이계속시행되었는데,국가보안법이제정된것이다.또한반민특위가해산하게되었으며,경찰과군대규모가급증했고,국가안보의명목으로부일경찰과우익청년단체를적극적으로활용하게되었다.

오늘날에는낯선제헌헌법의사회민주주의적요소들
대한민국초기국가건설과정에서나타난가장큰특징중하나는부족했던자원들을대신하여이념자원을극대화하려는노력을기울였다는것이다.즉임시정부의유산을계승하고자하는대중들의열망을충족시켜국가권력의정당성을높이려고했는데,그대표적인것이제헌헌법의제정이다.특히제헌헌법이가진사회민주주의적요소들은자유시장경제와현격한거리가있어현재의시각에서보면상당히낯선측면이있다.이는임시정부가표방했던삼균주의를계승하고자했기때문이다.토지의국유화,정치ㆍ경제및교육에서의평등을강조한임시정부의삼균주의는국유의범위를광범위하게설정함으로써자본주의시장경제와거리를두었다.제헌헌법역시중요자원과중요기업에관해국유ㆍ국영제도를원칙으로했으며토지개혁과의무무상교육을주창했다.이렇게자본주의경제질서에서는매우파격적인권리들이헌법상으로시도될수있었던것은임시정부의헌법을계승해야한다는대의명분이정치현실을지배하고있었기때문이다.
자본주의체제가상당부분자리잡은현시점에서는모순되고이해할수없는내용이지만,물적ㆍ경제적기반이취약해국가가직접생산과소비의주체로활동하면서일제가남기고간기업들을운영관리해야했던당시의현실에서는매우적절한조항들이었다.

토지개혁,국가건설의정점
대통령이승만은토지개혁을추진해국민대다수를차지하고있었던농민들의지지를얻어정치적정통성을획득하려고했다.이를통해정부는국민의요구를국가건설과정에반영하고,부일관료들을계속기용한탓에훼손되었던민족주의적이념자원을어느정도보완하는데성공할수있었다.
토지개혁은수천년동안농민의자유를구속하고군림하던지주가사라지고국가구성원모두가근대국가의일원으로거듭날수있게된계기였다.1949년6월유상몰수,유상분배를기초로한농지개혁법안에따라농민들이농지를분배받았다.토지개혁성공의이면에는조봉암의공로가컸다.물론공산당출신인조봉암을발탁한것은이승만이었다.이승만의입장에서는토지개혁으로한국민주당의경제기반약화,농민의지지확보,좌파의공세차단이라는1석3조의효과를얻을수있었다.토지개혁으로자신소유의농지를경작할수있게된농민들은한동안이승만의주요지지자가되었을뿐만아니라,한국전쟁이일어났을때도북한공산군의선동에현혹되지않고대한민국을굳건하게지지했다.

중도파의참여로안정화되는신생공화국
토지개혁과의무교육제도의실시로국가에대한국민의귀속감이증대하자,다수의임시정부출신인사들과중도파인사들이점차대한민국의건국을현실로받아들이고국가건설에참여하고자했다.제헌의회선거를거부했던다수의중도파들도1950년5월30일실시된제2대국회의원선거에서대부분무소속으로입후보해당선되었다.특히삼균주의의아버지인조소앙은전국최다득표로당선되는기염을토했다.안재홍,조소앙,원세훈,윤기섭,오하영등의중도파당선자들이중도무소속세력을이끌고새로운정치를펼칠것을다짐하는분위기였다.
제1공화국이점차안정화되어감에따라국가내부의자생적인발전역시나타나기시작했다.특히기획처장이순탁과기획처의중도파관료들의활약이두드러졌다.기획처는경제기획원의전신에해당하는기구로,당시의기획처는생산과분배를계획경제체제로운영하려는중간파의입장을대변했다.이순탁은자유주의경제정책으로는당면과제를해결할수없고종합적인국가계획수립이필요하다는입장을견지하고있었다.1950년즈음에는예산이균형을이루고세입이증가했으며인플레이션이통제되고환율이안정되는가운데경제전망이바람직한전환점을맞이했다.그리하여미군이완전철수하면쉽게무너질것같았던제1공화국은미국의지원이기대에훨씬미치지못했는데도경제의부분적회복과균형재정을이루며한계속에서도점차국가성을획득해나가고있었다.

피땀눈물로이룬국가건설의역사
대한민국은취약국가로태어났다.대한민국건설의역사는그출발선에서부터안보,물자,인력등모든차원에서자원이심대하게부족했다.따라서한국의국가건설과정은이를타개하기위해민족주의라는이념자원을수시로동원한역사이기도했다.그러나신생공화국은금세절체절명의안보위기를겪음으로인해민족을배신했던부일관리들을기용하고폭력적인우익청년단체를준국가기구로활용하여이념자원을훼손하는질곡의길을걸어야했다.
또다른한편으로이념자원에대한과도한의존은부작용을낳기도했다.민족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