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부정 (박준서 소설집)

화부정 (박준서 소설집)

$15.00
Description
박준서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으로 단편 여섯 편과 표제작 화부정花富停을 일본어로 번역해 같이 싣고 있다. 소설집 『화부정』의 주인공들은 더듬이가 없다. 여기서 더듬이란 눈치, 경쟁, 이기주의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그런 더듬이가 없다 보니,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제 몫을 하지 못하는 더듬이뿐이라 그들의 삶은 온통 찢기고 상처받고 외롭다. 거의 자신의 의지 여부와 상관없이 삶의 국면에서 소외되어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가정의 가장으로 살면서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을 믿지만 그들의 의도적인 배신이나 사고에 의해 일상이 산산이 부서진다. 작가는 그런 사람들의 묘사를 통해 사회 내부의 구조적 모순과 개인들의 실존적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특유의 희화성을 바탕으로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화부정』 인물들은 평범하면서도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채 이명, 더블백, 곰 인형 정령 같은 짐을 하나씩 나누어지고 있는데, 그들은 그 짐을 통한 ‘환각’이나 ‘환상’을 꿈꾼다. 그것은 일상을 파괴당한 삶들이 만나고 싶거나 확인하고 싶은 또는 탈출하고 싶은 심리적 근원을 묘사한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보여주는 환각과 환상의 크기는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온 사회적 고통이나 개인의 고통의 크기를 짐작하게 만든다. 소설의 결말은 대부분 쓸쓸하고 비극적인데 그것이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모의환자」는 인간의 저 밑바닥을 아주 정확히 꿰뚫고 있는데 삶의 안과 밖 즉. ‘진짜’와 ‘모의’가 서로 부정하지 않고 맞닿은 채 공존해야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현실을 강조한다. 「더블백에는 인어가 산다」는 죽은 오봉길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풍자적으로 풀어나가면도, 작가의 물질적 정서와 정서의 융합에 관한 더블백의 상징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더욱이 더블백 속에서 느끼는 텅 빈 결핍을 끈적거리거나 축축한 어둠의 인어로 끌어내는 효과는 정서의 환기력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밀레니엄 전후를 즈음하여 사람들의 뒤통수 부분에서 더듬이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더듬이가 나오면 자취를 감춘다」는 더듬이가 없는 사람들의 삶의 고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작품이다. 사회에서 인칭을 부여받지 못하고 노숙자처럼 살아가는 더듬이 없는 사람들과 세상 사이 관계의 모호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홍의 전쟁」은 실버타운에 입소한 노인들의 삶과 일상을 통해 우리 사회의 오늘을 보여주고 있다. 실버타운이라는 현실적 공간은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빠르고도 정확하게 그리면서, 늙음과 죽음이라는 원초적 감성이 지배하는 이차적 상징의 세계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세계에서 본성을 잃지 않은 노년의 인물들을 통해 현실 세계를 무엇보다도 정직하게 보여준다. 「악인 조도사」는 조선시대 ‘지금의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동 자리인 석천면 구지리 마을에 이천利川을 본관으로 하는 조씨曺氏 성을 가진 양반’에 관한 이야기이다. 「화부정花富停」은 일본의 여관 화부정을 찾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로 몽환적인 분위기의 소설인데 이야기가 정교하고 치밀하다. 휴대폰에 달린 곰인형 정령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지점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인물의 행위들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정령이 만들어낸 몽환적이면서도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이중구조의 엮임 속에서 신화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화부정』에 깔린 희화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진지성은 오히려 버거운 현실에서 일탈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고 있다. 또한 오래된 상처나 갑자기 버려지는 상황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인물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껴안으려는 작가의 의지가 짙게 배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가 구체적인 작품 속에서는 빗나거나 어긋나는데 그것이 도리어 삶의 본질과 한계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나타나 사뭇 색다른 상황으로 발전한다. 즉, 인간 위선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자신을 방기한 듯한 몸짓으로 인간 본성의 진면목을 직간접적으로 두텁게 묘사해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인간적 가치가 무엇인지 묵직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