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적상산의 품에서 시의 숨결로 걸러낸 언어미학
- 이봉명 시집, 『검은 문고리에 빛나는 시간』
- 이봉명 시집, 『검은 문고리에 빛나는 시간』
문명에 훼손당하지 않은 詩의 영토
무주 산골에서 꿀벌을 치고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이봉명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검은 문고리에 빛나는 시간』을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하였다.
시인은 1956년 전북 무주에서 태어나 1991년 『詩와意識』으로 등단하였으며, 무주작가회의, 전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 한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꿀벌에 대한 명상』 『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 『포내리 겨울』 『지상의 빈 의자』
『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 『가풀막』 『자작나무 숲에서』, 산문집 『겨울엽서』 가 있다.
이번에 펴내는 이봉명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총 60편의 시를 수록했다. 농경문화 속에서 끄집어낸 시의 질감이 예전의 시편들과 확연히 다르다. 자연과 사람의 만남을 시의 눈금으로 걸러낸 그의 시편들을 통해 이봉명 시세계의 숭고한 갱신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무주 적상산의 품에서 문명에 훼손되지 않은 시의 숨결로 오래 걸러낸 이봉명 시인의 곰삭은 언어미학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안도현 시인은 “그의 시는 겨울에도 얼음 밑으로 숨죽여 흐르는 계곡 물소리 같다. 그 어떤 폭설이 내려도 멈추지 않는 그 지속성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하고 경외해야 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시인이 쓰고자 하는 대상을 얼마나 골똘히 바라보았는지, 그 대상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를 읽고 나면 이 시집이 그저 “조곤조곤 어제를 풀어 놓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적상산 아래 포내리에 1930년대 백석이 다시 찾아왔나 싶을 정도다. 세상을 말로 파악하는 백석의 태도를 이으면서 시인만의 경험을 보편화하는 기법은 가히 절정에 다다른듯하다. “눈먼 정이 눈 뜬 사람 잡는” 이야기를 “까마귀 열두 소리에 고운 소리 하나 없다 꺽꺽하고 장끼 날아갈 때 아로롱 까투리 따라가”는 이 좋은 말씀을 이봉명 시인이 아니면 누구에게서 들으랴“고 평한다.
이분법적 사유를 벗어던진 이봉명의 서늘한 시
장마라지만 비가 와도 좋고
안 와도 좋았다
심심하면 불러올리던 물귀신을
돌다리 밑으로 밀어 넣고
도깨비 여울 건너듯 시내에 붉덕물이 흘렀다
매캐한 연기에 콜록거리다 여든셋 황 노인 깊은 잠 들었다
솥뚜껑에 전 부치는 소리로 비는 내리고
그새 유두콩 싹이 한 치나 자랐다
─ 「그 사이」 전문
시의 시간적 배경은 장마이다. 그런데 장마가 빚어내는 눅눅한 분위기가 시에 생략되었다. 비가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빗줄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다는 듯 사람의 영역에 물귀신과 도깨비를 호출하여 적상산 골짝에서 쏟아지는 ‘붉덕물’을 즐기기까지 한다. 물귀신이란 액귀를 완벽하게 손아귀에 틀어쥔 사람들의 여유, “도깨비 여울 건너듯”에서 보이듯 작은 양의 붉덕물(붉은 토사가 섞인 물)을 도깨비에 빗댄 언사는 적상산의 품에 사는 사람들의 낙관적 기질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황 노인이 “깊은 잠 들었다”라는 진술은 한 개인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 노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장례를 준비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위해 솥뚜껑에 전 부치는 냄새가 난다. 그리고 전 부칠 때 나는 소리로 비가 내리고 인간사와 관계없이 “유두콩 싹이 한 치나 자랐다”로 시를 맺는다.
장마 속 삶의 형세를 담담하게 접근한 이봉명의 이 시엔 옳고 그름, 흑과 백, 선과 악, 있다와 없다 등등의 이분법적 사유에 닿지 않는다. 장마, 붉덕물, 죽음, 유두콩 등이 어울려서 사람살이를 보여줄 뿐 유두콩의 싹은 옳은 것이고 붉덕물과 죽음은 그른 것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나 있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의 이치를 시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장대비가 쏟아져 붉덕물이 흐르는 것도 노인의 죽음도 유두콩 새싹이 난 것도 “그냥 그런 것”으로 여길 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화산이 폭발하여 농토를 일시에 덮쳐버리거나 허리케인이 들이닥쳐 사람의 목숨 수백 명을 빼앗아버리는 사건을 선악으로 나누지 않고 자연의 작용 중 한 개로 여기는 것처럼 적상산 근처의 자연에도 이분법적 판가름은 없다. 인간사가 자연사의 한 부분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뿐이다. 이분법적 사유를 벗어던진 이봉명의 시는 서늘하다.
적상산을 펑펑펑 덮는 눈
순식간에 적상산을 가둬버린 눈
우리가 오가던 길목마다
토끼며 장끼 발자국이 어지러울 것이었다
삼촌들은 펑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등 뒤에 두고
(중략)
함박눈이 이틀째 펑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싸이나 먹은 토끼며 장끼를
토막 치는지 벌써 매운탕 끓여
얼큰해졌는지 삼촌들은
우리를 찾지 않았다
동전 한 닢 없는 호주머니를
맥없이 뒤집어 보기도 하고
구멍 난 양말에 엄지발가락이
튀어나와도 우리는
부끄럽지 않았다
─ 「눈 내리는 날」 전문
적상산에 함박눈이 쏟아진다. 꿩이며 토끼를 주우러 산에 산에 간 삼촌들을 기다리는 어린 화자의 눈앞에 적상산의 길목 여럿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어린 화자는 삼촌들이 산짐승 잡을 때 쓰는 ‘싸이나’가 우리말인지 일본말인지 모른다. 농약인지 독약인지 그것도 잘 모른다. 어깨 너머로 삼촌들이 메주콩 꽁무니에 바늘로 작게 구멍을 내어 싸이나 가루를 집어넣고 촛농으로 막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시인의 유소년기 경험을 토대로 시가 촉발되었을 이 정경은 서정과 서사가 어우러진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초가집일망정 집이 안 보이니 동네가 보일 리 없고 동네 사람들도 안 보인다. 어린 화자와 그 또래들이 삼촌을 기다리는 장소도 안 보인다. 펑펑펑 눈 내리는 배경에 어린 화자와 또래들이 기다림이 시상에 어릴 뿐이다. 하지만 농경문화를 통과해 온 독자라면 적상산 아래 눈 내리는 정경을 또렷하게 그려낼 수 있다. 그러함으로써 맵고 짠 하루를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이봉명의 시가 그려낸 서정과 서사의 화폭에 자신의 경험을 맞대보면서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그늘을, 생활의 쉴 짬을 시가 마련해준 셈이다. 순정한 이들이 살았던 정경,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시의 정서가 애틋하다.
시를 깊게 물들인 고요한 응시의 내면
사는 건 마디를 접는 일이지
살갗이 주름 접으며
눈물 없이 잠들고
꼿꼿하게 머리 들었다가
가만히 고개 숙였던 그런 날
시간의 휘어진 마디를 곱게 접는지
너도 손을 떨었다
─ 「너도 손을 떨었다」 전문
시에 적힌 ‘마디’는 어떤 마디를 뜻하는 것일까. 어쩌면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물일 수 있고 오랜 시간 포기하지 못한 꿈일 수도 있겠다. 일반인에 널리 알려진 사회 담론의 의미 가치를 폐기하자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로부터 “열심히 살자.”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보편적 합리주의로 가장한 숱한 담론들을 접는 것 말이다. 자본과 문명의 세상에 필연적으로 끼어든 이기적이고 악의적인- 자신이 떼돈을 벌면 누군가가 쪽박을 찰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에서도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열심히 생활한 결과가 흰머리만으로 채워지지 않기를 바라듯 화자는 “휘어진 시간의 마디를 곱게” 접는다. 이때 손이 떨린다. 살아온 모든 날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리라.
박남준 시인은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다. 틀림없을 것이다. 백발의 세상을 건너온 시인의 시에서 은목서꽃 그윽한 향기가 난다. 은은한 시의 향기는 잘 빚은 막걸리 항아리에 싸리나무 용수를 박아 뜬 맑은 청주 같아서 달큰하기조차 하다. “사는 건 마디를 접는 일”이었구나. 그렇구나. “시간의 휘어진 마디를 곱게 접”고 “손을 떨었”을 시인의 창밖에 머물지 않고 흐르며 오래도록 움직였을 고요한 응시의 내면이 시인의 시를 깊게 물들였을 것“이라고 평한다.
어머니의 흰 고무신 끄는 소리
나무 사이사이로 별빛 스며드는 낌새에
호롱불이 흔들리는 시간
바람이 눈발을 껴입을 모양이었다
은색 손톱 같은 초사흘 달은
전등 없는 마을 입구에 걸어 두었다
─ 「초사흘 달은」 전문
어머니의 고무신 끄는 소리와 나무 사이로 별빛이 스미는 낌새가 어울렸기 때문에 호롱불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이들의 관계에 인과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시행은 더 기막히다. 호롱불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바람이 눈발을 껴입을 모양”이라고 언술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눈발을 껴입는다는 표현도 절묘하지만, 고무신 끄는 소리와 별빛의 낌새에 호롱불이 흔들리고 그 결과로 바람이 눈발을 껴입는 것 같다는 직관, 눈이 내릴 것 같다는 직관에는 자연과학의 필연적 질서가 닿지 않는다. 그냥 밤이고 별빛이고 호롱불이며 바람 등등이 한 자연인의 섬세한 촉수처럼 살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자연의 우연한 질서를 인간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현대시의 정점을 탁월하게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이처럼 이봉명의 시편들에 잔소리는 없다. 시인의 목소리가 시 현실에 간섭함이 없는 미덕은 시적 긴장이 형편없이 풀려버린 일부 시인들의 시편들과 궤를 달리한다. 기존의 시쓰기 방법에서 탈피하여 일상에 소속된 여러 현상을 객관적 시점으로 확보해내면서 시 형식과 내용의 갱신을 꾀할지언정 지루한 산문적 진술도 없다. 시는 간접적으로 말하는 언어의 무늬라는 점을 시인이 잘 알고 있으므로 과감한 생략을 통한 시상의 돌연한 울림이 시의 내구력처럼 빛날 수 있다.
이봉명의 시가 그려낸 서정과 서사의 화폭!
이봉명 시인과 삼십 년간 시를 주고받는 인연을 이어온 이면우 시인은 “이번에 받은 시편을 읽다가 정말 빙긋이 떠오르는 웃음을 만났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를 바꿔나가는 일은 참으로 지난하다. 그러나 시는 태생적으로 천변만화千變萬化를 꿈꾼다. 모든 시적 새로움은 그것이 형태와 관련될 때 진짜가 된다. 이번에 시인은 그걸 해냈다.”고 말한다.
기억 속의 풍경을 재현해내는 언어의 결, 시의 동적 상황에 집중하여 촉수를 빛내는 어법은 한국 시 정신의 일면이자 시의 새로운 출발점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민족의 숨결을 닮은 토속적 단어들을 시에 끌어들여 새 의미를 얻는 순정한 세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자연과학의 인과적 질서나 이분법적 판가름에서 벗어난 그의 언어미학은 자연과 인간은 동격이며 누구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봉명의 시편들이 확보해낸 시원의 공간에는 사람과 짐승, 식물이며 사물이 너나들이로 어울려 샘물처럼 맑디맑게 살고 있다. 시는 별개의 생명체가 아니라 부박한 현실 논리에 훼손당하지 않은 언어의 영토라는 점을 전하고 있으리라.
이병초 시인은 해설에서 “이봉명의 시편들이 확보해낸 시원의 공간에는 사람과 짐승, 식물이며 사물이 너나들이로 어울려 샘물처럼 맑디맑게 살고 있다. 시는 별개의 생명체가 아니라 부박한 현실 논리에 훼손당하지 않은 언어의 영토라는 점을 전하고 있으리라”고 평한다.
수십 년 동안 적상산 그늘의 품에서 꿀벌을 치고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는 시인. 그러나 그는 시골 또는 촌구석에 외따로 존재하는 시인이 아니다. 문명사회의 흐름을 놓침이 없고 자연과 사람의 만남을 시의 눈금으로 걸러낸 그의 시편들은 인류의 보편적 정서로 품을 넓힌다. 이제 이봉명의 시가 그려낸 서정과 서사의 화폭은 더 넓은 시의 바다로 항해할 것이다.
무주 산골에서 꿀벌을 치고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이봉명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검은 문고리에 빛나는 시간』을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하였다.
시인은 1956년 전북 무주에서 태어나 1991년 『詩와意識』으로 등단하였으며, 무주작가회의, 전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 한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꿀벌에 대한 명상』 『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 『포내리 겨울』 『지상의 빈 의자』
『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 『가풀막』 『자작나무 숲에서』, 산문집 『겨울엽서』 가 있다.
이번에 펴내는 이봉명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총 60편의 시를 수록했다. 농경문화 속에서 끄집어낸 시의 질감이 예전의 시편들과 확연히 다르다. 자연과 사람의 만남을 시의 눈금으로 걸러낸 그의 시편들을 통해 이봉명 시세계의 숭고한 갱신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무주 적상산의 품에서 문명에 훼손되지 않은 시의 숨결로 오래 걸러낸 이봉명 시인의 곰삭은 언어미학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안도현 시인은 “그의 시는 겨울에도 얼음 밑으로 숨죽여 흐르는 계곡 물소리 같다. 그 어떤 폭설이 내려도 멈추지 않는 그 지속성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하고 경외해야 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시인이 쓰고자 하는 대상을 얼마나 골똘히 바라보았는지, 그 대상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를 읽고 나면 이 시집이 그저 “조곤조곤 어제를 풀어 놓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적상산 아래 포내리에 1930년대 백석이 다시 찾아왔나 싶을 정도다. 세상을 말로 파악하는 백석의 태도를 이으면서 시인만의 경험을 보편화하는 기법은 가히 절정에 다다른듯하다. “눈먼 정이 눈 뜬 사람 잡는” 이야기를 “까마귀 열두 소리에 고운 소리 하나 없다 꺽꺽하고 장끼 날아갈 때 아로롱 까투리 따라가”는 이 좋은 말씀을 이봉명 시인이 아니면 누구에게서 들으랴“고 평한다.
이분법적 사유를 벗어던진 이봉명의 서늘한 시
장마라지만 비가 와도 좋고
안 와도 좋았다
심심하면 불러올리던 물귀신을
돌다리 밑으로 밀어 넣고
도깨비 여울 건너듯 시내에 붉덕물이 흘렀다
매캐한 연기에 콜록거리다 여든셋 황 노인 깊은 잠 들었다
솥뚜껑에 전 부치는 소리로 비는 내리고
그새 유두콩 싹이 한 치나 자랐다
─ 「그 사이」 전문
시의 시간적 배경은 장마이다. 그런데 장마가 빚어내는 눅눅한 분위기가 시에 생략되었다. 비가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빗줄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다는 듯 사람의 영역에 물귀신과 도깨비를 호출하여 적상산 골짝에서 쏟아지는 ‘붉덕물’을 즐기기까지 한다. 물귀신이란 액귀를 완벽하게 손아귀에 틀어쥔 사람들의 여유, “도깨비 여울 건너듯”에서 보이듯 작은 양의 붉덕물(붉은 토사가 섞인 물)을 도깨비에 빗댄 언사는 적상산의 품에 사는 사람들의 낙관적 기질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황 노인이 “깊은 잠 들었다”라는 진술은 한 개인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 노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장례를 준비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위해 솥뚜껑에 전 부치는 냄새가 난다. 그리고 전 부칠 때 나는 소리로 비가 내리고 인간사와 관계없이 “유두콩 싹이 한 치나 자랐다”로 시를 맺는다.
장마 속 삶의 형세를 담담하게 접근한 이봉명의 이 시엔 옳고 그름, 흑과 백, 선과 악, 있다와 없다 등등의 이분법적 사유에 닿지 않는다. 장마, 붉덕물, 죽음, 유두콩 등이 어울려서 사람살이를 보여줄 뿐 유두콩의 싹은 옳은 것이고 붉덕물과 죽음은 그른 것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나 있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의 이치를 시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장대비가 쏟아져 붉덕물이 흐르는 것도 노인의 죽음도 유두콩 새싹이 난 것도 “그냥 그런 것”으로 여길 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화산이 폭발하여 농토를 일시에 덮쳐버리거나 허리케인이 들이닥쳐 사람의 목숨 수백 명을 빼앗아버리는 사건을 선악으로 나누지 않고 자연의 작용 중 한 개로 여기는 것처럼 적상산 근처의 자연에도 이분법적 판가름은 없다. 인간사가 자연사의 한 부분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뿐이다. 이분법적 사유를 벗어던진 이봉명의 시는 서늘하다.
적상산을 펑펑펑 덮는 눈
순식간에 적상산을 가둬버린 눈
우리가 오가던 길목마다
토끼며 장끼 발자국이 어지러울 것이었다
삼촌들은 펑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등 뒤에 두고
(중략)
함박눈이 이틀째 펑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싸이나 먹은 토끼며 장끼를
토막 치는지 벌써 매운탕 끓여
얼큰해졌는지 삼촌들은
우리를 찾지 않았다
동전 한 닢 없는 호주머니를
맥없이 뒤집어 보기도 하고
구멍 난 양말에 엄지발가락이
튀어나와도 우리는
부끄럽지 않았다
─ 「눈 내리는 날」 전문
적상산에 함박눈이 쏟아진다. 꿩이며 토끼를 주우러 산에 산에 간 삼촌들을 기다리는 어린 화자의 눈앞에 적상산의 길목 여럿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어린 화자는 삼촌들이 산짐승 잡을 때 쓰는 ‘싸이나’가 우리말인지 일본말인지 모른다. 농약인지 독약인지 그것도 잘 모른다. 어깨 너머로 삼촌들이 메주콩 꽁무니에 바늘로 작게 구멍을 내어 싸이나 가루를 집어넣고 촛농으로 막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시인의 유소년기 경험을 토대로 시가 촉발되었을 이 정경은 서정과 서사가 어우러진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초가집일망정 집이 안 보이니 동네가 보일 리 없고 동네 사람들도 안 보인다. 어린 화자와 그 또래들이 삼촌을 기다리는 장소도 안 보인다. 펑펑펑 눈 내리는 배경에 어린 화자와 또래들이 기다림이 시상에 어릴 뿐이다. 하지만 농경문화를 통과해 온 독자라면 적상산 아래 눈 내리는 정경을 또렷하게 그려낼 수 있다. 그러함으로써 맵고 짠 하루를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이봉명의 시가 그려낸 서정과 서사의 화폭에 자신의 경험을 맞대보면서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그늘을, 생활의 쉴 짬을 시가 마련해준 셈이다. 순정한 이들이 살았던 정경,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시의 정서가 애틋하다.
시를 깊게 물들인 고요한 응시의 내면
사는 건 마디를 접는 일이지
살갗이 주름 접으며
눈물 없이 잠들고
꼿꼿하게 머리 들었다가
가만히 고개 숙였던 그런 날
시간의 휘어진 마디를 곱게 접는지
너도 손을 떨었다
─ 「너도 손을 떨었다」 전문
시에 적힌 ‘마디’는 어떤 마디를 뜻하는 것일까. 어쩌면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물일 수 있고 오랜 시간 포기하지 못한 꿈일 수도 있겠다. 일반인에 널리 알려진 사회 담론의 의미 가치를 폐기하자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로부터 “열심히 살자.”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보편적 합리주의로 가장한 숱한 담론들을 접는 것 말이다. 자본과 문명의 세상에 필연적으로 끼어든 이기적이고 악의적인- 자신이 떼돈을 벌면 누군가가 쪽박을 찰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에서도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열심히 생활한 결과가 흰머리만으로 채워지지 않기를 바라듯 화자는 “휘어진 시간의 마디를 곱게” 접는다. 이때 손이 떨린다. 살아온 모든 날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리라.
박남준 시인은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다. 틀림없을 것이다. 백발의 세상을 건너온 시인의 시에서 은목서꽃 그윽한 향기가 난다. 은은한 시의 향기는 잘 빚은 막걸리 항아리에 싸리나무 용수를 박아 뜬 맑은 청주 같아서 달큰하기조차 하다. “사는 건 마디를 접는 일”이었구나. 그렇구나. “시간의 휘어진 마디를 곱게 접”고 “손을 떨었”을 시인의 창밖에 머물지 않고 흐르며 오래도록 움직였을 고요한 응시의 내면이 시인의 시를 깊게 물들였을 것“이라고 평한다.
어머니의 흰 고무신 끄는 소리
나무 사이사이로 별빛 스며드는 낌새에
호롱불이 흔들리는 시간
바람이 눈발을 껴입을 모양이었다
은색 손톱 같은 초사흘 달은
전등 없는 마을 입구에 걸어 두었다
─ 「초사흘 달은」 전문
어머니의 고무신 끄는 소리와 나무 사이로 별빛이 스미는 낌새가 어울렸기 때문에 호롱불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이들의 관계에 인과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시행은 더 기막히다. 호롱불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바람이 눈발을 껴입을 모양”이라고 언술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눈발을 껴입는다는 표현도 절묘하지만, 고무신 끄는 소리와 별빛의 낌새에 호롱불이 흔들리고 그 결과로 바람이 눈발을 껴입는 것 같다는 직관, 눈이 내릴 것 같다는 직관에는 자연과학의 필연적 질서가 닿지 않는다. 그냥 밤이고 별빛이고 호롱불이며 바람 등등이 한 자연인의 섬세한 촉수처럼 살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자연의 우연한 질서를 인간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현대시의 정점을 탁월하게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이처럼 이봉명의 시편들에 잔소리는 없다. 시인의 목소리가 시 현실에 간섭함이 없는 미덕은 시적 긴장이 형편없이 풀려버린 일부 시인들의 시편들과 궤를 달리한다. 기존의 시쓰기 방법에서 탈피하여 일상에 소속된 여러 현상을 객관적 시점으로 확보해내면서 시 형식과 내용의 갱신을 꾀할지언정 지루한 산문적 진술도 없다. 시는 간접적으로 말하는 언어의 무늬라는 점을 시인이 잘 알고 있으므로 과감한 생략을 통한 시상의 돌연한 울림이 시의 내구력처럼 빛날 수 있다.
이봉명의 시가 그려낸 서정과 서사의 화폭!
이봉명 시인과 삼십 년간 시를 주고받는 인연을 이어온 이면우 시인은 “이번에 받은 시편을 읽다가 정말 빙긋이 떠오르는 웃음을 만났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를 바꿔나가는 일은 참으로 지난하다. 그러나 시는 태생적으로 천변만화千變萬化를 꿈꾼다. 모든 시적 새로움은 그것이 형태와 관련될 때 진짜가 된다. 이번에 시인은 그걸 해냈다.”고 말한다.
기억 속의 풍경을 재현해내는 언어의 결, 시의 동적 상황에 집중하여 촉수를 빛내는 어법은 한국 시 정신의 일면이자 시의 새로운 출발점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민족의 숨결을 닮은 토속적 단어들을 시에 끌어들여 새 의미를 얻는 순정한 세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자연과학의 인과적 질서나 이분법적 판가름에서 벗어난 그의 언어미학은 자연과 인간은 동격이며 누구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봉명의 시편들이 확보해낸 시원의 공간에는 사람과 짐승, 식물이며 사물이 너나들이로 어울려 샘물처럼 맑디맑게 살고 있다. 시는 별개의 생명체가 아니라 부박한 현실 논리에 훼손당하지 않은 언어의 영토라는 점을 전하고 있으리라.
이병초 시인은 해설에서 “이봉명의 시편들이 확보해낸 시원의 공간에는 사람과 짐승, 식물이며 사물이 너나들이로 어울려 샘물처럼 맑디맑게 살고 있다. 시는 별개의 생명체가 아니라 부박한 현실 논리에 훼손당하지 않은 언어의 영토라는 점을 전하고 있으리라”고 평한다.
수십 년 동안 적상산 그늘의 품에서 꿀벌을 치고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는 시인. 그러나 그는 시골 또는 촌구석에 외따로 존재하는 시인이 아니다. 문명사회의 흐름을 놓침이 없고 자연과 사람의 만남을 시의 눈금으로 걸러낸 그의 시편들은 인류의 보편적 정서로 품을 넓힌다. 이제 이봉명의 시가 그려낸 서정과 서사의 화폭은 더 넓은 시의 바다로 항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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