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살아왔고 살아 냈으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오늘의 삶을 받아 든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순례 씨의 따뜻한 응원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오늘의 삶을 받아 든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순례 씨의 따뜻한 응원
나의 할머니,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긴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자리에 몸을 누이고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이렇게 삶이 무거운 날에는 세상에 기댈 곳이 내가 베고 누운 작은 베개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날에 할머니,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그러면 이제는 작고 구부러진 당신이 걸어 나와 나에게 등을 내밀어 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단단하고 포근한 당신의 등. 나는 이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솔솔 잠이 옵니다. 생각해 보면 당신의 인생은 나의 것보다 몇 배는 무거웠습니다. 가난하고 서러운 시절, 노동과 살림, 의무와 도리를 고스란히 등에 업고 당신은 매일을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계셨어요. 한시도 쉬지 않고 소리 없이 움직이며 자식이며 곡식이며 모든 생명을 어루만지셨지요. 당신의 손길이 닿은 곳은 늘 반질반질 윤기가 났고, 반듯하고 싱싱하고 건강해졌습니다. 힘겨움이 없지 않았고 슬픔이 없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은 날이 없었을 텐데, 당신은 그 세월들을 어떻게 살아 내셨나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저는 당신의 그 오래고 주름진 인생에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순례 씨에게 배운 것은
행복해지는 능력
다시 하루가 밝았습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오늘의 채비를 합니다. 이건 사실 할머니 당신의 뒷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배운 습관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해가 뜨면 몸을 일으키고 자리를 정돈하고 매무새를 돌보고 할 일을 하러 나서는 법. 그렇게 묵묵히 시간을 건너 다시 살 힘을 얻는 법 말이지요. 어푸어푸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듭니다. 밥 한술을 크게 떠서 억지로라도 먹고 나니 허리가 펴집니다. 발끝에 힘을 모으고 헛둘헛둘 걸으면 볼이 발그레 몸에 온기가 돕니다. 답이 없는 문제도 길이 없는 길도 하나씩 건너 볼 기운이 생깁니다. 부모님과 학교와 사회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살아가는 기술이라면 할머니 당신이 나에게 물려준 것은 행복해지는 능력인 것 같습니다. 달달한 믹스 커피 한잔, 어여쁜 꽃 바지, 진한 트로트 한 자락에도 근심을 잊고 웃을 수 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당신은 왜 사냐고, 무엇을 이루겠냐고 묻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살아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당신의 생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은
오늘 딸 고추가 열리듯이
누군가의 딸이었던 꿈 많던 시절도, 누군가의 아내였던 행복의 시절도, 누군가의 엄마였던 사랑의 시절도 이제 모두 지나가고 이제 당신은 정말 순례 씨, 자신의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지붕 같던 부모도, 곁을 지키던 남편도, 치맛자락을 붙들던 자식들도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았지요. 어떤 이들은 노년을 ‘쓰고 남은’ 여생이라고 말하고 죽음을 향해 외롭게 걸어가는 시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당신에게서 죽음을 본 적이 없었어요. 몸은 아프고 무거워졌을지언정 오히려 당신은 삶을 향해 누구보다 성큼성큼 걸어 나갔으니까요. 봄이 되면 꽃놀이를 나서고 가을이 되면 단풍놀이를 나서지요. 여름에는 술을 담고 겨울에는 김치를 담가요. 인생이라는 순례길의 베테랑 가이드처럼 때때철철 해야 할 일과 맛봐야 할 재미를 서슴없이 챙겨 나갑니다. 오늘도 호미를 들고 집을 나서는 당신에게서 나는 발견합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또한 그 누구도 죽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요. 피어나는 풀꽃도 저무는 풀꽃도 모두 해를 향해 고개를 내밀 듯 모든 생은 살아 있음을 향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은 오늘 딸 고추가 열리듯 순례 씨 당신의 삶도 지금 가장 빨갛게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오늘도 조촐한 호미질로 오늘만큼의 기쁨을 캐어 돌아올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버리고 버리고 남은 고갱이
나는 늘 궁금했어요. 그토록 무거운 인생이 지나갔는데도 당신의 걸음이 늘 사뿐히 가벼운 이유를요. 웬만한 일에는 무릎이 꺾이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 다시 길을 찾는 비결을요. 구멍이 숭숭 뚫린 돌멩이처럼 깨지지 않으면서 무겁지도 않은 영혼에 어떻게 다다르게 되었는지도요. 숱한 곡절과 고비 앞에서 당신은 알았다고 했습니다. 삶이란 절대 내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다는 것을요. 그리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고 지고 끌고 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이라는 것도요. 세월이라는 마른 바람 앞에서 당신은 멈추는 법, 돌아서 가 보는 법, 내려놓는 법, 버리는 법을 익히셨겠지요. 그러는 사이에 철없는 욕심은 부서지고 불필요한 욕망은 사라지고 쓸데없는 허울이 벗겨지며 가짜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것은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골라내고 골라낸 진짜이자 고갱이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충분한 것들,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둘러싸여 당신의 발걸음이 그렇게나 가벼워 보이나 봅니다. 저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봅니다. 살아온 당신의 지혜를, 살아 낸 당신의 단단함을, 살아가는 당신의 힘을 따라서 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꿈은
좋은 할머니가 되는 것
색연필을 들어 당신을 그려 봅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곁에서 들려주시던 주옥같은 당신의 이야기들을 떠올려 봅니다. 늘 입에 넣어 주시던 맛난 음식들을 기억해 봅니다. 할머니 당신의 오래되고 고운 살림살이들, 눈을 감고 걸어도 문제가 없는 동네 어귀들, 당신 생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은 논밭과 들판, 그리고 늘 그리운 당신의 하루를 따라가 봅니다. 이런 그림들이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을 얼마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존경과 사랑을 이 책에 담고 싶었습니다. 나의 두 할머니 순향 씨와 상례 씨, 저의 오랜 꿈은 아름다운 당신들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딴 ‘순례 씨’라는 그림책을 펴내는 것이었지만 저의 마지막 꿈은 당신들처럼 좋은 할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지치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때에도, 도무지 스스로의 힘으로 버티기 어려운 때에도 당신들의 손녀임을 잊지 않는다면 저는 다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의 할머니이자 우리 모두의 할머니인 순례 씨, 곁에 있는 순간에도, 곁에 있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들을 늘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긴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자리에 몸을 누이고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이렇게 삶이 무거운 날에는 세상에 기댈 곳이 내가 베고 누운 작은 베개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날에 할머니,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그러면 이제는 작고 구부러진 당신이 걸어 나와 나에게 등을 내밀어 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단단하고 포근한 당신의 등. 나는 이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솔솔 잠이 옵니다. 생각해 보면 당신의 인생은 나의 것보다 몇 배는 무거웠습니다. 가난하고 서러운 시절, 노동과 살림, 의무와 도리를 고스란히 등에 업고 당신은 매일을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계셨어요. 한시도 쉬지 않고 소리 없이 움직이며 자식이며 곡식이며 모든 생명을 어루만지셨지요. 당신의 손길이 닿은 곳은 늘 반질반질 윤기가 났고, 반듯하고 싱싱하고 건강해졌습니다. 힘겨움이 없지 않았고 슬픔이 없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은 날이 없었을 텐데, 당신은 그 세월들을 어떻게 살아 내셨나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저는 당신의 그 오래고 주름진 인생에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순례 씨에게 배운 것은
행복해지는 능력
다시 하루가 밝았습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오늘의 채비를 합니다. 이건 사실 할머니 당신의 뒷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배운 습관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해가 뜨면 몸을 일으키고 자리를 정돈하고 매무새를 돌보고 할 일을 하러 나서는 법. 그렇게 묵묵히 시간을 건너 다시 살 힘을 얻는 법 말이지요. 어푸어푸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듭니다. 밥 한술을 크게 떠서 억지로라도 먹고 나니 허리가 펴집니다. 발끝에 힘을 모으고 헛둘헛둘 걸으면 볼이 발그레 몸에 온기가 돕니다. 답이 없는 문제도 길이 없는 길도 하나씩 건너 볼 기운이 생깁니다. 부모님과 학교와 사회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살아가는 기술이라면 할머니 당신이 나에게 물려준 것은 행복해지는 능력인 것 같습니다. 달달한 믹스 커피 한잔, 어여쁜 꽃 바지, 진한 트로트 한 자락에도 근심을 잊고 웃을 수 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당신은 왜 사냐고, 무엇을 이루겠냐고 묻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살아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당신의 생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은
오늘 딸 고추가 열리듯이
누군가의 딸이었던 꿈 많던 시절도, 누군가의 아내였던 행복의 시절도, 누군가의 엄마였던 사랑의 시절도 이제 모두 지나가고 이제 당신은 정말 순례 씨, 자신의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지붕 같던 부모도, 곁을 지키던 남편도, 치맛자락을 붙들던 자식들도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았지요. 어떤 이들은 노년을 ‘쓰고 남은’ 여생이라고 말하고 죽음을 향해 외롭게 걸어가는 시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당신에게서 죽음을 본 적이 없었어요. 몸은 아프고 무거워졌을지언정 오히려 당신은 삶을 향해 누구보다 성큼성큼 걸어 나갔으니까요. 봄이 되면 꽃놀이를 나서고 가을이 되면 단풍놀이를 나서지요. 여름에는 술을 담고 겨울에는 김치를 담가요. 인생이라는 순례길의 베테랑 가이드처럼 때때철철 해야 할 일과 맛봐야 할 재미를 서슴없이 챙겨 나갑니다. 오늘도 호미를 들고 집을 나서는 당신에게서 나는 발견합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또한 그 누구도 죽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요. 피어나는 풀꽃도 저무는 풀꽃도 모두 해를 향해 고개를 내밀 듯 모든 생은 살아 있음을 향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은 오늘 딸 고추가 열리듯 순례 씨 당신의 삶도 지금 가장 빨갛게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오늘도 조촐한 호미질로 오늘만큼의 기쁨을 캐어 돌아올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버리고 버리고 남은 고갱이
나는 늘 궁금했어요. 그토록 무거운 인생이 지나갔는데도 당신의 걸음이 늘 사뿐히 가벼운 이유를요. 웬만한 일에는 무릎이 꺾이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 다시 길을 찾는 비결을요. 구멍이 숭숭 뚫린 돌멩이처럼 깨지지 않으면서 무겁지도 않은 영혼에 어떻게 다다르게 되었는지도요. 숱한 곡절과 고비 앞에서 당신은 알았다고 했습니다. 삶이란 절대 내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다는 것을요. 그리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고 지고 끌고 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이라는 것도요. 세월이라는 마른 바람 앞에서 당신은 멈추는 법, 돌아서 가 보는 법, 내려놓는 법, 버리는 법을 익히셨겠지요. 그러는 사이에 철없는 욕심은 부서지고 불필요한 욕망은 사라지고 쓸데없는 허울이 벗겨지며 가짜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것은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골라내고 골라낸 진짜이자 고갱이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충분한 것들,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둘러싸여 당신의 발걸음이 그렇게나 가벼워 보이나 봅니다. 저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봅니다. 살아온 당신의 지혜를, 살아 낸 당신의 단단함을, 살아가는 당신의 힘을 따라서 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꿈은
좋은 할머니가 되는 것
색연필을 들어 당신을 그려 봅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곁에서 들려주시던 주옥같은 당신의 이야기들을 떠올려 봅니다. 늘 입에 넣어 주시던 맛난 음식들을 기억해 봅니다. 할머니 당신의 오래되고 고운 살림살이들, 눈을 감고 걸어도 문제가 없는 동네 어귀들, 당신 생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은 논밭과 들판, 그리고 늘 그리운 당신의 하루를 따라가 봅니다. 이런 그림들이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을 얼마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존경과 사랑을 이 책에 담고 싶었습니다. 나의 두 할머니 순향 씨와 상례 씨, 저의 오랜 꿈은 아름다운 당신들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딴 ‘순례 씨’라는 그림책을 펴내는 것이었지만 저의 마지막 꿈은 당신들처럼 좋은 할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지치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때에도, 도무지 스스로의 힘으로 버티기 어려운 때에도 당신들의 손녀임을 잊지 않는다면 저는 다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의 할머니이자 우리 모두의 할머니인 순례 씨, 곁에 있는 순간에도, 곁에 있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들을 늘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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