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씨 - 고래뱃속 창작그림책 44 (양장)

순례 씨 - 고래뱃속 창작그림책 44 (양장)

$15.00
Description
살아왔고 살아 냈으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오늘의 삶을 받아 든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순례 씨의 따뜻한 응원
나의 할머니,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긴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자리에 몸을 누이고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이렇게 삶이 무거운 날에는 세상에 기댈 곳이 내가 베고 누운 작은 베개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날에 할머니,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그러면 이제는 작고 구부러진 당신이 걸어 나와 나에게 등을 내밀어 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단단하고 포근한 당신의 등. 나는 이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솔솔 잠이 옵니다. 생각해 보면 당신의 인생은 나의 것보다 몇 배는 무거웠습니다. 가난하고 서러운 시절, 노동과 살림, 의무와 도리를 고스란히 등에 업고 당신은 매일을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계셨어요. 한시도 쉬지 않고 소리 없이 움직이며 자식이며 곡식이며 모든 생명을 어루만지셨지요. 당신의 손길이 닿은 곳은 늘 반질반질 윤기가 났고, 반듯하고 싱싱하고 건강해졌습니다. 힘겨움이 없지 않았고 슬픔이 없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은 날이 없었을 텐데, 당신은 그 세월들을 어떻게 살아 내셨나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저는 당신의 그 오래고 주름진 인생에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순례 씨에게 배운 것은
행복해지는 능력

다시 하루가 밝았습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오늘의 채비를 합니다. 이건 사실 할머니 당신의 뒷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배운 습관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해가 뜨면 몸을 일으키고 자리를 정돈하고 매무새를 돌보고 할 일을 하러 나서는 법. 그렇게 묵묵히 시간을 건너 다시 살 힘을 얻는 법 말이지요. 어푸어푸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듭니다. 밥 한술을 크게 떠서 억지로라도 먹고 나니 허리가 펴집니다. 발끝에 힘을 모으고 헛둘헛둘 걸으면 볼이 발그레 몸에 온기가 돕니다. 답이 없는 문제도 길이 없는 길도 하나씩 건너 볼 기운이 생깁니다. 부모님과 학교와 사회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살아가는 기술이라면 할머니 당신이 나에게 물려준 것은 행복해지는 능력인 것 같습니다. 달달한 믹스 커피 한잔, 어여쁜 꽃 바지, 진한 트로트 한 자락에도 근심을 잊고 웃을 수 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당신은 왜 사냐고, 무엇을 이루겠냐고 묻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살아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당신의 생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은
오늘 딸 고추가 열리듯이

누군가의 딸이었던 꿈 많던 시절도, 누군가의 아내였던 행복의 시절도, 누군가의 엄마였던 사랑의 시절도 이제 모두 지나가고 이제 당신은 정말 순례 씨, 자신의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지붕 같던 부모도, 곁을 지키던 남편도, 치맛자락을 붙들던 자식들도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았지요. 어떤 이들은 노년을 ‘쓰고 남은’ 여생이라고 말하고 죽음을 향해 외롭게 걸어가는 시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당신에게서 죽음을 본 적이 없었어요. 몸은 아프고 무거워졌을지언정 오히려 당신은 삶을 향해 누구보다 성큼성큼 걸어 나갔으니까요. 봄이 되면 꽃놀이를 나서고 가을이 되면 단풍놀이를 나서지요. 여름에는 술을 담고 겨울에는 김치를 담가요. 인생이라는 순례길의 베테랑 가이드처럼 때때철철 해야 할 일과 맛봐야 할 재미를 서슴없이 챙겨 나갑니다. 오늘도 호미를 들고 집을 나서는 당신에게서 나는 발견합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또한 그 누구도 죽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요. 피어나는 풀꽃도 저무는 풀꽃도 모두 해를 향해 고개를 내밀 듯 모든 생은 살아 있음을 향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은 오늘 딸 고추가 열리듯 순례 씨 당신의 삶도 지금 가장 빨갛게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오늘도 조촐한 호미질로 오늘만큼의 기쁨을 캐어 돌아올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버리고 버리고 남은 고갱이

나는 늘 궁금했어요. 그토록 무거운 인생이 지나갔는데도 당신의 걸음이 늘 사뿐히 가벼운 이유를요. 웬만한 일에는 무릎이 꺾이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 다시 길을 찾는 비결을요. 구멍이 숭숭 뚫린 돌멩이처럼 깨지지 않으면서 무겁지도 않은 영혼에 어떻게 다다르게 되었는지도요. 숱한 곡절과 고비 앞에서 당신은 알았다고 했습니다. 삶이란 절대 내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다는 것을요. 그리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고 지고 끌고 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이라는 것도요. 세월이라는 마른 바람 앞에서 당신은 멈추는 법, 돌아서 가 보는 법, 내려놓는 법, 버리는 법을 익히셨겠지요. 그러는 사이에 철없는 욕심은 부서지고 불필요한 욕망은 사라지고 쓸데없는 허울이 벗겨지며 가짜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것은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골라내고 골라낸 진짜이자 고갱이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충분한 것들,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둘러싸여 당신의 발걸음이 그렇게나 가벼워 보이나 봅니다. 저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봅니다. 살아온 당신의 지혜를, 살아 낸 당신의 단단함을, 살아가는 당신의 힘을 따라서 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꿈은
좋은 할머니가 되는 것

색연필을 들어 당신을 그려 봅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곁에서 들려주시던 주옥같은 당신의 이야기들을 떠올려 봅니다. 늘 입에 넣어 주시던 맛난 음식들을 기억해 봅니다. 할머니 당신의 오래되고 고운 살림살이들, 눈을 감고 걸어도 문제가 없는 동네 어귀들, 당신 생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은 논밭과 들판, 그리고 늘 그리운 당신의 하루를 따라가 봅니다. 이런 그림들이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을 얼마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존경과 사랑을 이 책에 담고 싶었습니다. 나의 두 할머니 순향 씨와 상례 씨, 저의 오랜 꿈은 아름다운 당신들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딴 ‘순례 씨’라는 그림책을 펴내는 것이었지만 저의 마지막 꿈은 당신들처럼 좋은 할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지치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때에도, 도무지 스스로의 힘으로 버티기 어려운 때에도 당신들의 손녀임을 잊지 않는다면 저는 다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의 할머니이자 우리 모두의 할머니인 순례 씨, 곁에 있는 순간에도, 곁에 있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들을 늘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북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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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채소

웃는게매력적입니다.순박하고꽤나성실해요.감자를즐겨먹고푸르른곳들을찾아다닙니다.오래도록곁에머무르는것들이마음에담깁니다.그리고,그림그리는순간을사랑합니다.

출판사 서평

나의할머니,
당신의이름을부르는순간

긴하루를보내고돌아왔습니다.자리에몸을누이고천장을올려다봅니다.이렇게삶이무거운날에는세상에기댈곳이내가베고누운작은베개밖에없는것처럼느껴집니다.그런날에할머니,당신의이름을불러봅니다.그러면이제는작고구부러진당신이걸어나와나에게등을내밀어줍니다.세상에서가장따뜻하고단단하고포근한당신의등.나는이내마음이푸근해집니다.솔솔잠이옵니다.생각해보면당신의인생은나의것보다몇배는무거웠습니다.가난하고서러운시절,노동과살림,의무와도리를고스란히등에업고당신은매일을같은모습으로그자리에계셨어요.한시도쉬지않고소리없이움직이며자식이며곡식이며모든생명을어루만지셨지요.당신의손길이닿은곳은늘반질반질윤기가났고,반듯하고싱싱하고건강해졌습니다.힘겨움이없지않았고슬픔이없지않았고흔들리지않은날이없었을텐데,당신은그세월들을어떻게살아내셨나요.살아가면살아갈수록저는당신의그오래고주름진인생에묻고싶은말들이많아지는것같습니다.

순례씨에게배운것은
행복해지는능력

다시하루가밝았습니다.무거운몸을일으켜오늘의채비를합니다.이건사실할머니당신의뒷모습에서나도모르게배운습관인지도모릅니다.아무리힘들어도해가뜨면몸을일으키고자리를정돈하고매무새를돌보고할일을하러나서는법.그렇게묵묵히시간을건너다시살힘을얻는법말이지요.어푸어푸세수를하고나니정신이듭니다.밥한술을크게떠서억지로라도먹고나니허리가펴집니다.발끝에힘을모으고헛둘헛둘걸으면볼이발그레몸에온기가돕니다.답이없는문제도길이없는길도하나씩건너볼기운이생깁니다.부모님과학교와사회가나에게가르쳐준것이살아가는기술이라면할머니당신이나에게물려준것은행복해지는능력인것같습니다.달달한믹스커피한잔,어여쁜꽃바지,진한트로트한자락에도근심을잊고웃을수있다고알려주셨습니다.당신은왜사냐고,무엇을이루겠냐고묻는법이없습니다.그저살아있기에살아가는것이라고,그냥그렇게살면된다고,그래도괜찮다고당신의생으로보여주었습니다.

오늘은
오늘딸고추가열리듯이

누군가의딸이었던꿈많던시절도,누군가의아내였던행복의시절도,누군가의엄마였던사랑의시절도이제모두지나가고이제당신은정말순례씨,자신의이름으로남았습니다.지붕같던부모도,곁을지키던남편도,치맛자락을붙들던자식들도모두떠나고혼자남았지요.어떤이들은노년을‘쓰고남은’여생이라고말하고죽음을향해외롭게걸어가는시절이라고도합니다.그렇지만나는한번도당신에게서죽음을본적이없었어요.몸은아프고무거워졌을지언정오히려당신은삶을향해누구보다성큼성큼걸어나갔으니까요.봄이되면꽃놀이를나서고가을이되면단풍놀이를나서지요.여름에는술을담고겨울에는김치를담가요.인생이라는순례길의베테랑가이드처럼때때철철해야할일과맛봐야할재미를서슴없이챙겨나갑니다.오늘도호미를들고집을나서는당신에게서나는발견합니다.세상의그누구도죽음을피할수는없지만또한그누구도죽기위해살지는않는다는것을요.피어나는풀꽃도저무는풀꽃도모두해를향해고개를내밀듯모든생은살아있음을향한다는사실을말입니다.오늘은오늘딸고추가열리듯순례씨당신의삶도지금가장빨갛게살아있습니다.그리고당신은오늘도조촐한호미질로오늘만큼의기쁨을캐어돌아올것입니다.

받아들이고받아들이고
버리고버리고남은고갱이

나는늘궁금했어요.그토록무거운인생이지나갔는데도당신의걸음이늘사뿐히가벼운이유를요.웬만한일에는무릎이꺾이지않고모퉁이를돌아다시길을찾는비결을요.구멍이숭숭뚫린돌멩이처럼깨지지않으면서무겁지도않은영혼에어떻게다다르게되었는지도요.숱한곡절과고비앞에서당신은알았다고했습니다.삶이란절대내마음대로되는법이없다는것을요.그리고나이가든다는것은모든것을이고지고끌고갈수없음을받아들이는연습이라는것도요.세월이라는마른바람앞에서당신은멈추는법,돌아서가보는법,내려놓는법,버리는법을익히셨겠지요.그러는사이에철없는욕심은부서지고불필요한욕망은사라지고쓸데없는허울이벗겨지며가짜들은모두떨어져나갔을것입니다.이제당신에게남은것은가장중요한것들입니다.골라내고골라낸진짜이자고갱이입니다.그것만있으면충분한것들,더는필요하지않은것들에둘러싸여당신의발걸음이그렇게나가벼워보이나봅니다.저는그뒷모습을오래바라봅니다.살아온당신의지혜를,살아낸당신의단단함을,살아가는당신의힘을따라서가고싶습니다.

우리의마지막꿈은
좋은할머니가되는것

색연필을들어당신을그려봅니다.어릴적부터지금까지곁에서들려주시던주옥같은당신의이야기들을떠올려봅니다.늘입에넣어주시던맛난음식들을기억해봅니다.할머니당신의오래되고고운살림살이들,눈을감고걸어도문제가없는동네어귀들,당신생의역사가고스란히묻은논밭과들판,그리고늘그리운당신의하루를따라가봅니다.이런그림들이당신을향한제마음을얼마나표현할수있을지모르겠어요.하지만말로다할수없는존경과사랑을이책에담고싶었습니다.나의두할머니순향씨와상례씨,저의오랜꿈은아름다운당신들의이름을한글자씩딴‘순례씨’라는그림책을펴내는것이었지만저의마지막꿈은당신들처럼좋은할머니가되는것입니다.지치고나락으로떨어질것같은때에도,도무지스스로의힘으로버티기어려운때에도당신들의손녀임을잊지않는다면저는다시걸어나갈수있을것같아요.나의할머니이자우리모두의할머니인순례씨,곁에있는순간에도,곁에있지못하는순간에도우리들을늘지켜주셔서고맙습니다.

*인증유형:공급자적합성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