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이병천 시집)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이병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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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시는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 같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존재하는 한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등단 사십 년 만에 펴낸 이병천의 생애 첫 시집에는 과도한 상징과 은유, 비약을 철저하게 배격한 시편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인간의 감정, 특히 사랑의 여러 형상을 단순한 일차적 묘사만으로 뽑아낸 직관과 순수성이 돋보인다.
이번 시집은 지난해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 후 한 해 동안 썼던 사백여 편 시 가운데 이른바 사랑과 연애 관련 시, 백 편을 따로 추려서 엮었다. 시경詩經의 시 삼백이 일언이폐지하고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던 표현에 견주어 자신에게 다가온 이번 시편詩片들은 〈무사무無思無〉라고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소재만으로 이번 시집을 화사하게 채웠다.

돌아보았더라면 / 서 있는 내가 보였을 것이다 / 너는 끝내 돌아보지 않고 / 나는 얼어붙은 섬이 되었다 // 볼 수 있어서 봄이었던 봄이 가고/ 서서 선 채로 서 있는 섬 (「섬」 전문)

스스로 밝혔듯이 이병천의 시는 쉽고 짧은 시 조각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간결한 시가 담고 있는 세계는 깊고도 넓다. 결코 가볍게 넘겨버릴 시들이 아니다.

수컷 펭귄이 맨도롬한 조약돌 하나 구하려고 / 작은 부리로 극지 언 땅을 파듯 / 내가 언어의 사금 광산을 평생 떠돈 이유는 / 단 한순간이라도 당신께서 나를/ 수긍하는 눈빛 좀 얻자 했음을, 짐작하시는지요? (「가갸거겨 서시」 전문)

시인 안도현은 이병천과 지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제 사랑의 일에 대해서라면 형에게 물어야겠다”고 썼다. 소설가 김양호는 “이병천은 지난 사십 년간 여일하게 시인으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를 읽고 난 뒤 확인했다면서 “어쩌면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시에 대한 숨결이 한결같을 수 있을까? 다른 시인들과 비교하기 쉽지 않은 독특한 자신만의 시풍詩風을 이리 만들 수 있다니… 그저 놀라웠다”라고 발문에서 밝혔다.
저자

이병천

1956년전북완주군의시천詩川이라는별스런이름의마을에서태어났다.
1981년조선일보신춘문예에시가당선되고,
1982년경향신문신춘문예에소설이당선되었다.
등단40년만인2021년,비로소생애첫시집을세상에펴낸다.

목차

1부
가갸거겨서시-12
시짓는일-13
섬-14
안부를묻다-15
첫눈-16
당신말고초승달-17
녹슨화로의말-18
얼굴속얼굴-19
스스로원했으면서-20
고목이누워-21
그섬돌-22
우도에서-24
내가사랑한순간들-25
두루미사랑법-26
조개무지설화-28
월동무이삭줍기-29
수마포일기-30
노을-31
자귀나무꽃-32
도통할지도모르는-34

2부
첫사랑-36
세화리귤꽃-37
오늘내낚시조황-38
파도-39
바나나껍질고考-40
해당화-41
네이름사막-42
그날처녀귀신에게고함-44
낡은단소이야기-46
거룩한신앙-47
아들눈은캄캄하네-48
걷다보면땅끝-49
우는제비-50
반어법훈련-51
그래도봄날은가네-52
흰나비엽서-53
낮술한잔-54
그래,시를쓰자-55
모든사랑은첫사랑이다1-56
모든사랑은첫사랑이다2-58

3부
너에게가는길-60
술시줄다리기-61
공무도하-62
우주어딘가-64
수자리나살자-65
홀로바둑을두면서-66
손가락이아니면-67
꿈보다해몽-68
이또한흘러가리라-70
저승은커녕-71
서산에절하고-72
파도를울리지마요-73
로또판매점앞을지나며-74
낚시매듭의원리-75
성산포바람-76
즐거운걱정거리-77
내몸단방약-78
전에볼수없던꽃들-79
거리두기-80
하얀꽃천지-82

4부
대야지나는길에-84
단짠신쓴-85
무지개가뜨는이유-86
바다만큼-87
계기일식있던날-88
중산간돌담무덤에앉아-89
찌르레기넌누구냐-90
나는물고기자리-91
별똥별에빌고싶거든-92
칠석인데-93
바다와눈씨름한판-94
안개꽃꽃말-95
저두견새울음운다-96
겨울꽃을보다가-98
나도보았다-99
너는시가되었구나-100
새프러포즈-101
직립보행에대하여-102
그럭저럭-103
하현달을보았다-104

5부
이승에는이쯤하고-108
해금에게-109
월식-110
용눈이오름에올라-111
바람-112
빈술병-113
태풍주의보-114
모슬포대방어-115
소년과그대와나-116
다음역은봄날역-117
민망한고백-118
꽃이라면어느계절에-119
너는없는집-120
두고보아라-122
창난젓을맛보다-123
혼자콩나물을삶다말고-124
마두금을배워야겠다-126
내벗을위한자서전대필메모-128
반딧불이-131
하여튼봄이오면-132

발문작은거인의휘파람소리ㆍ김양호-137
시인의말-156

출판사 서평

-만지자마자손이타버리는사랑시에건배하고싶은마음에목이탔다

1981년조선일보,1982년경향신문신춘문예에서시와소설이각각당선된이후소설만을발표해왔던작가의첫번째시집이다.이병천은그동안『북쪽녀자』『90000리』『모래내모래톱』『사냥』『저기저까마귀떼』『홀리데이』『마지막조선검은명기』등의소설을발표해왔던중견작가다.소설만을발표해왔던그가외도아닌외도를감행한것이다.문단사로보든한개인사로보든이건분명하나의사건이다.

초승달처럼눈짓을흘리는그녀를붙잡으려고몸을날릴지도모른다는시구가떠오르면서,마치하얀섬돌하나가슴에들어앉은것처럼(「그섬돌」)먹먹해지고말았다.

서른날마다어김없이나타나
내방창문을기웃거리는그대
이제더는날찾지말아요
그날처럼눈짓을흘리지말든지
솔개인양그대붙잡으려고
몸을날릴지도모르는초사흘저녁
-「당신말고초승달」,전문

이시집을통해서우리는일견잃어버린사랑을찾아세상을주유하는방랑시인의면모를느낄수도있을것같다.동서남북이라는지리뿐아니라그는사만년전의사랑을(「시짓는일」)소환하기도하고,까마득한시절저편에서두루미로살던날들을(「두루미사랑법」)반추하기도한다.시구의면면에는시인자신의자아저깊은곳에서욕망하는구애의몸짓들이흘러넘친다.하지만천하에명약이라는사랑하나구하고싶은(「내몸의단방약」)시인의욕망은사랑에만국한되지않는다.멈출수없는구애의대상은아름다운여인일수도있지만인생그자체일수도,또는시어몇줄일수도있고,내일의역사일수도있다.어느방향이건시인이갈구하는욕망은언제나첫사랑을대하듯지극하다.

그의사랑시를읽으면“당신이내게봄바람처럼불어오면나는여름폭풍우가되어당신에게달려가겠습니다”라는중국속담이나“당신이바람부는강변을보여주면나는얼마든지그곳에서쓰러지는갈대의자세를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황동규시인의시구가떠오른다.부드럽되경박하지않고뜨겁되지나치지않는,평사낙안平沙落雁에줄줄이알관주를쳐야할시구들을읽고나면,만지자마자손이타버리는사랑시에건배하고싶은마음에목이탔다.

새로피어나는유채꽃대궁에
꾀꼬리가막내려앉으려는데

순간에놀란꽃이나서툰새나
아직은둘다싹수노랗게어려서

그저꺽꺽거리는변성기구애에도
키득키득웃으며자지러지는꽃
-「첫사랑」,전문

노란유채꽃에막내려앉으려는노란꾀꼬리를첫사랑으로비유한이시는읽을수록명징한영상으로눈앞에떠오른다.이처럼선명한동영상이그려지는시는과문한필자로서는다른곳에서읽어본기억이없다.읽을수록감칠맛이나는절창이다.

때로는호사스런남쪽열차가도착하면서우웅웅,기적을울려대겠지
그러면나도역까지구경나가서낯선이들을하나하나마중할것이다
너는내가살수있는구실이라고,맘속비밀을열차에태워보내고
하여튼봄이오면그곳역사한구석
진달래를나무지게에꽂고앉았을폭삭늙은노인네가바로나다
-?「하여튼봄이오면」,부분

시집맨끝에수록된이시의마지막행에서는그의또다른첫사랑에대한소망과삶의깊이를함께읽을수있다.오늘은아직아니지만내일은반드시오기를바라는통일은,아니반드시기필코와야할통일의그날은시인이오매불망기다리는연인의모습으로투영된다.통일은작가가아무리폭삭늙어도결코포기할수없는첫사랑,이땅에태어난작가가숙명으로만나는또하나의첫사랑이다.그리하여오지않는너는다름아닌통일이며,감감무소식인통일은당신의상징이된다.때로는호사스런남쪽기차가도착하는낡은역사에쭈그려앉아나무지게에진달래를꽂고앉은늙은노인네가자기라는구절에서는마침내만나야할우리,죽어서도만나야할우리라는민족의화두가숙연하게드러난다.숙연하면서도간절하고,간절하면서도아픈시다.

지금도내머릿속에는
어린시절을밝혀주던반딧불이가산다
불씨를지폈으나끝내타오르지못한불꽃도
어쩌면있을것이다
내가거의그럴뻔했다
평생반딧불만큼불씨를지핀사내였다,나는
쏘시개가몹시추졌으나
다행히불을일구어그대사랑한일하나만,
오로지하나만
내생애가더는피울수없는최고불꽃이었다
-「반딧불이」,전문

직장에서물러난다음날바로섬으로떠나겠다는시인의발목을잡은건바로필자였다.갈때가더라도기나긴직장생활에서받은스트레스도풀겸여행을가서며칠쉬고,머릿속도정리한다음가라고소매를붙잡았다.내친구별장이있는곳이어서그냥왕복비행기삯만준비하면된다는거짓말로유혹하기도했다.또완강하게손을내젓는사람을반우격다짐으로몰아세워택한여행지가베트남의최남단푸쿠옥이란섬이었다.
함께일주일동안다녀온푸쿠옥은이병천이담긴선명한수채화를필자에게고스란히그려주었다.잔잔한남태평양의파도가밀려오는수평선과치마를휘날리며플라멩코를추는무희처럼늘어선야자수들,에메랄드빛으로빛나는바다,부드러운바람,강렬한햇살,수평선아래로쑥가라앉는낙조,태양이침몰하는바닷물속으로황혼이지면밤하늘에서반짝반짝모스부호를쏟아내는별들,그에화답하듯명멸하기시작하는작은어선의불빛들까지….그런풍취에빠져들었는지아담한야외수영장이있는식당에서식사를하던시인이풀로뛰어들었다.개구리헤엄을치는모습은어릴적시천에서멱을감던어린소년,그대로였다.물묻은머리를손빗으로몇번쓸어넘기고자리에앉은시인이갑자기어깨를모으고턱을당기더니‘푸쿠오옥’하고닭우는소리를흉내냈다.새벽에들으니푸쿠옥의닭은그렇게울더라는거였다.박장대소하고나자눈물이났다.왜웃고나면눈물이나는가싶으면서문득시인이특이한능력이있다는생각이들었다.소리를문자로바꾸는능력이다.해금켜는소리가“애이불비애이불비哀而不悲…”슬퍼도비통해하지는말라는소리로들린다는시구를읽자(「해금에게」),‘과연’이라는말이서슴없이터져나왔다.

돌아보았더라면
서있는내가보였을것이다
끝내너는돌아보지않고
나는얼어붙은섬이되었다

볼수있어서봄이었던봄이가고
서서선채로서있는섬
-「섬」,전문

마지막으로시집원고를처음읽었을때받은느낌을다시덧붙이고싶다.어느시편이든허투루읽어낼수는없었다.더러옷깃을여미고책상에다시앉기도했다.종이위에박힌활자몇개가눈앞에서번쩍였다.그건등따습고배부른선에서성장하길멈췄던,나태했던내정신에박히는얼음송곳이었다.
시를읽다가때로는술잔에다시술을가득채워마시곤눈을감고몸을뒤로젖힌채,필자에겐사라져버리고없는청춘에분노하기도했다.사람을가장생생하게불타오르게만들면서도결코멈추는법없이지나가버리고마는청춘이미웠다.“내가신이라면청춘을인생의마지막에두겠다”는말은언제나가슴을시리게했다.그런청춘이아직이병천의손아귀에있다.

그가담고있을무거운고적孤寂이,그가품었던녹슨사랑조차도그리워지는아찔한봄밤이다.그렇다.모든사랑은첫사랑이다.

-김양호·소설가(발문중에서)

성산일출봉그림자아래를거처로정하고내스스로유배의길을떠나왔다.주변에가시울타리부터두른다음한해사백여편의시를썼다.성산의거친바람이그렇지않아도스산했을내가슴을휑하게채찍질한덕분이다.
이참에사람을만나사랑하고그리워하고절망한일만따로백편을추려내생애첫시집으로엮는다.
시집제목으로유난을떨게된이유가그때문이다.공자가시경詩經의시삼백이사무사思無邪라고했다던데,나에게다가온시편詩片일백은무사무無思無인셈이다.당신생각이없이쓴시는아예하나도없다는뜻이다.
그렇더라도,그대그리워하는마음까지도이제는떠나보내야겠다.이시집은그런의미에서어쩌면떠나가는배의끄트머리고물쯤될것이다.오랜날들을그대와함께했으나여기시의한구절처럼다시사만년을기약할도리밖에….
-〈시인의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