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는이순신,육지에는의병군이있었다
선조25년(1592),왜군이부산진성과동래성을함락하고빠른속도로북진하자안방준은노스승박광전을따라전라좌의병임계영의병장산하의종사관으로전쟁에뛰어든다.상주전투에서이일순변사가패하고충주의신립장수마저무너지고말았다.왜군이기세를몰아한양으로북진하자4월30일선조는궁궐을버리고파천을단행했다.
다행히이순신좌수사는5월7일옥포해전에서왜선26척을격침함으로써남해의제해권을거머쥐었다.하지만조선군은육지에서의전투에서연신패전하자선조는급기야대동강을건너의주를향했다.
나주출신김천일의병장은임금을호위하겠다는목적으로조선최초의근왕의병을일으켜한양으로출병했다.하지만근왕의병은용인광교산전투에서패배하고뿔뿔이흩어지고말았다.8월15일,임계영의전라좌의병은최경회의전라우의병과합세하여금산과무주에있는왜적에게타격을가하여영동으로도주하게만들었다.전라좌우의병군의첫승리였다.호남을장악하려던왜적들을물리치고반격의교두보를지키게되는값진승리였던것이다.
병자호란에안방준의병장으로호남선비들규합
정묘호란이발발한지9년만인인조14년(1636)12월8일,10만이넘는군사를앞세운청군이다시침입했다.12월14일,강화도로몽진하려던인조는닷새만에한양까지다다른청군에막혀남한산성으로피신할수밖에없었다.12월19일,근왕병을모집해청군을물리치라는인조의교서를받아본안방준은눈물을흘렸다.
64세의노쇠한처지가된그였으나능주매화정에의병청을꾸리고호남의선비와유생,농부와노비들을모집하는동시에군량미와창칼등을마련해출정을서둘렀다.보성과화순,나주,장흥,강진,함평등지에서의병들이모여들었다.
이듬해정월,안방준의병군이매화정에서출병해금구(김제)를거쳐여산에막도착했을때남한산성의비보가전해졌다.1월21일강화도를먼저공격한청군은1월22일강화산성을함락하고세자빈과봉림대군을인질로붙잡았다.이소식을들은인조는1월25일남한산성에서내려와무릎을꿇었던것이다.
예가아닌것은말하지말며행동하지말라!
왕자(광해군)사부를지낸박광전문하로들어간안방준은첫가르침으로‘사물잠(四勿箴)’을받는다.선비로서수신과처세에흠이없도록경계해야할네가지잠언이다.즉“예가아닌것은보지말며,예가아닌것은듣지말며,예가아닌것은말하지말며,예가아닌것은행동하지말라.”(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라는가르침이다.
이것이바로선비의길이고군자의길이며사람의길인것으로서안방준의인생을관통하는선비정신의핵심이다.
정약용못지않은많은역사서책저술,편찬
그는젊은날임금이내리는관직을모두사양한채학문과저술에심혈을기울였다.불행하게도그의생애에임진왜란과정유재란,정묘호란과병자호란등등변란이계속되어붓을놓았던시기가많았으나역사인물과역사적사건을재평가하는서책의권수가정약용에뒤지지않을정도로많다.정해왜변당시녹도만호이대원의분투를그린《이대원전》,제2차진주성전투를기록한《진주서사》,조헌의상소문을모은《항의신편》,절의를위해죽은16인의호남선비를다룬《호남의록》,동래부사송상현등8명의기록인《임정충절사적》,김덕령과김응회,김대인의병장을추모해기린《삼원기사》,조헌의《동환봉사》와당쟁자료를모은《혼정편록》,기묘사화의전말을기록한《기묘유적》,조헌의고결한뜻을문답형식으로지은《사우감계록》등등많은서책을편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