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순신 휘하 대솔군관으로 참전,
고향 보성에서 의병장으로 순절한 장수
고향 보성에서 의병장으로 순절한 장수
《대장부의 꿈》은 임진왜란 명장 시리즈 6번째 장편소설이다. 최대성은 무과 급제를 하고 한양의 훈련원 참군을 지냈으나 왜구들의 노략질이 빈발하자 고향 보성을 지키고자 귀향하는 결단을 내린다.
임진왜란의 전운이 돌자 최대성은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가 전라좌수군의 한후장과 최측근 대솔군관으로 전공을 세운다. 조선 수군이 첫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을 필두로 다섯 차례의 해전에 출전해 이순신의 승리에 기여한 최대성은 다시 고향에 돌아와 의병장으로 항전하다가 순절한 보성 의병사에 빛나는 장수다.
효(孝)와 충(忠)을 다한 의병장 최대성
모의장군 최대성의 행적을 되살리는 일은 효(孝)에서 충(忠)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 고향을 지킨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그의 일대기를 영웅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가능한 한 ‘인간 최대성’으로 그려내려 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 스승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 병사한 아내를 향한 절절한 슬픔, 전투에서 겪는 인간적인 고뇌와 전우애, 그리고 반상의 경계를 뛰어넘어 집안의 가노와 형제처럼 지내는 인간미 등을 그려내고 있다.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해전을 필두로 다섯 차례 전투서 승리
최대성(崔大晟)은 보성 사곡마을의 경주 최씨 최한손(崔漢孫)과 광주(廣州) 이씨 슬하의 외아들이다. 죽천 박광전 문하에서 수학한 뒤 보성으로 귀향한 선거이가 손응호 등과 신의계(信義契)를 만들자 이에 참여했다. 서른두 살에 전주감영에서 치른 무과 초시에 합격, 이듬해 한양 훈련원 복시에 나가 활쏘기와 검술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려 무과에 급제했다. 훈련원의 정7품 참군으로 있던 최대성은 선조 18년 2월 왜구들의 침탈이 극심하자 고향을 지키고자 입신양명의 길을 뒤로한 채 귀향을 결심한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 열선루 회동에 참여하고, 뒤이어 선조 25년(1592) 3월 초 전라좌수영에 들어가 전쟁이 발발하자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 참전하는 등 다섯 차례의 해전에 나가 승리를 거둔다.
이순신의 명을 받아 귀향해 보성향보의병군 궐기
최대성은 고향 일대에 출몰하는 흉적을 물리치고 종사를 보전하겠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사직을 청한다. 하지만 선조는 정3품 훈련원정에 제수하며 그 공을 치하한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 2월, 이순신이 참소당해 한양으로 압송되자 최대성은 고향으로 돌아와 보성향보의병군을 조직하고 왜적에 대항한다. 이순신이 28일 만에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게 되자 최대성은 이순신의 명을 받아 전라좌수군의 배후인 고향을 지키는 임무를 받는다.
1597년 보성향보의병군을 일으킨 최대성은 순천만 거차포전투와 안치전투 등 2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왜적들을 물리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치전투에서 적탄에 장렬하게 순절한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보성향보 의병장으로 순절한 뒤 154년 만에 통정대부 추증 받다
7년 전쟁이 끝난 뒤 최대성의 장남 언립과 삼남 후립은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정작 최대성은 아무런 예우를 받지 못했다. 최대성의 전공 회복운동은 안방준 이후 최대성의 5대손 최정기가 영조 27년(1751) 예조에 올린 소지(所志, 진정서)에 이르기까지 1백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영조는 최대성의 향리에 충신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명과 함께 증(贈) 통정대부 형조참의 증직교지를 내렸다. 통정대부란 정3품 상계(上階)로서 당상관의 품계였다. 안치전투에서 순절한 지 154년 만에 내린 왕명이었다.
이후 영조 44년(1768) 유림의 발의로 정유재란시 안골포, 가덕도해전에서 전사한 보성군수 안흥국의 정충사에 배향되었다가, 현재는 모의장군의 전적지 죽전들판과 안치들이 가까운 충절사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바,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장부 최대성 장군의 혼이 불현듯 충절과 효심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임진왜란의 전운이 돌자 최대성은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가 전라좌수군의 한후장과 최측근 대솔군관으로 전공을 세운다. 조선 수군이 첫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을 필두로 다섯 차례의 해전에 출전해 이순신의 승리에 기여한 최대성은 다시 고향에 돌아와 의병장으로 항전하다가 순절한 보성 의병사에 빛나는 장수다.
효(孝)와 충(忠)을 다한 의병장 최대성
모의장군 최대성의 행적을 되살리는 일은 효(孝)에서 충(忠)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 고향을 지킨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그의 일대기를 영웅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가능한 한 ‘인간 최대성’으로 그려내려 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 스승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 병사한 아내를 향한 절절한 슬픔, 전투에서 겪는 인간적인 고뇌와 전우애, 그리고 반상의 경계를 뛰어넘어 집안의 가노와 형제처럼 지내는 인간미 등을 그려내고 있다.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해전을 필두로 다섯 차례 전투서 승리
최대성(崔大晟)은 보성 사곡마을의 경주 최씨 최한손(崔漢孫)과 광주(廣州) 이씨 슬하의 외아들이다. 죽천 박광전 문하에서 수학한 뒤 보성으로 귀향한 선거이가 손응호 등과 신의계(信義契)를 만들자 이에 참여했다. 서른두 살에 전주감영에서 치른 무과 초시에 합격, 이듬해 한양 훈련원 복시에 나가 활쏘기와 검술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려 무과에 급제했다. 훈련원의 정7품 참군으로 있던 최대성은 선조 18년 2월 왜구들의 침탈이 극심하자 고향을 지키고자 입신양명의 길을 뒤로한 채 귀향을 결심한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 열선루 회동에 참여하고, 뒤이어 선조 25년(1592) 3월 초 전라좌수영에 들어가 전쟁이 발발하자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 참전하는 등 다섯 차례의 해전에 나가 승리를 거둔다.
이순신의 명을 받아 귀향해 보성향보의병군 궐기
최대성은 고향 일대에 출몰하는 흉적을 물리치고 종사를 보전하겠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사직을 청한다. 하지만 선조는 정3품 훈련원정에 제수하며 그 공을 치하한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 2월, 이순신이 참소당해 한양으로 압송되자 최대성은 고향으로 돌아와 보성향보의병군을 조직하고 왜적에 대항한다. 이순신이 28일 만에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게 되자 최대성은 이순신의 명을 받아 전라좌수군의 배후인 고향을 지키는 임무를 받는다.
1597년 보성향보의병군을 일으킨 최대성은 순천만 거차포전투와 안치전투 등 2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왜적들을 물리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치전투에서 적탄에 장렬하게 순절한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보성향보 의병장으로 순절한 뒤 154년 만에 통정대부 추증 받다
7년 전쟁이 끝난 뒤 최대성의 장남 언립과 삼남 후립은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정작 최대성은 아무런 예우를 받지 못했다. 최대성의 전공 회복운동은 안방준 이후 최대성의 5대손 최정기가 영조 27년(1751) 예조에 올린 소지(所志, 진정서)에 이르기까지 1백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영조는 최대성의 향리에 충신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명과 함께 증(贈) 통정대부 형조참의 증직교지를 내렸다. 통정대부란 정3품 상계(上階)로서 당상관의 품계였다. 안치전투에서 순절한 지 154년 만에 내린 왕명이었다.
이후 영조 44년(1768) 유림의 발의로 정유재란시 안골포, 가덕도해전에서 전사한 보성군수 안흥국의 정충사에 배향되었다가, 현재는 모의장군의 전적지 죽전들판과 안치들이 가까운 충절사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바,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장부 최대성 장군의 혼이 불현듯 충절과 효심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대장부의 꿈 (임란 때 충(忠)과 효(孝)를 다한 최대성 모의장군 이야기 | 정찬주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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