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진실,그리고영화에본질에대해묻는영화들
마지막‘3부뫼비우스의띠’에서는영화를상상하고만들고관람하고사유하고이야기하는인간,다시말해영화와인간의관계에대해질문을던지는영화들을다루었다.이정향의〈미술관옆동물원〉(영화의존재론),압바스키아로스타미의〈올리브나무사이로〉(재현의윤리와한계),우디앨런의〈카이로의붉은장미〉(영화와관객),아자나비시우스의〈아티스트〉(이미지와소리),알폰소쿠아론의〈그래비티〉(우주공간의영화적재현)가3부에서다루어지는영화들이다.
각편의영화이미지와이야기를다루는저자의솜씨와적재적소에서제시되는감독인터뷰는이미영화를본관객들에게는새로운사유의창을열어주는한편,아직영화를보지않은관객들로하여금당장에라도스크린앞에앉고싶을만큼재미있고설득력이있다.텍스트와컨텍스트,스크린의안과밖(외화면)을넘나드는지적여정을즐기는독자라면읽는즐거움과상상하는즐거움을함께얻을수있을것이다.
책속에서
사랑과이별을,우리의삶을미리연습할수있을까?대신살아볼수있을까?…배우자들의불륜을알게된리첸과차우는서로를위로한다.이들이서로를위로하는방식은특이하다.각자의배우자인것처럼대화를나누며,배신의상처를달래준다.…연기를하며두사람은그들과똑같은욕망을확인하고그들의배신을복수하며또위로받는다.이들의연기는자신들의욕망을사회적금기와금기의위반사이에교묘하게두는방법이다.(‘잃어버린시간’과‘되찾은시간’―왕가위의〈화양연화〉중에서)
만조로빠르게차오르는바닷물이서래가들어간웅덩이에소용돌이를만들다웅덩이의흔적을지운다.서래의존재를지운다.서래가들어간웅덩이의소용돌이는시간의소용돌이와같다.서래는무의존재가되었다.시간이무화되는것,영원성을얻는것이다.…관객은서래의죽음을목격한유일한증인이지만,해준에게서래가있는곳을알려주고싶지만그렇게할수없다.장두셰는이렇게말한다.“인물은움직일수있지만서스펜스영화의관객은도망칠수없다.그는의자에묶여있다.그는바라보고있는인물의고뇌를공유할뿐아니라자신의고뇌도받아들여야한다.관객은자신이매혹된것의희생자이다.”…훌륭한영화란깊은바다에빠진폰과같은것,진실을아무도못찾도록하는것.〈헤어질결심〉에는장르가뒤섞이고,플롯과서브플롯이엉켜있다.여러상징과은유가숨은그림찾기처럼배치되어있다.모호함은이영화를이해하는열쇠이다.훌륭한영화는하나의설명으로혹은하나의진실로해석될수없다는것이박찬욱의생각이다.관객수만큼의울림이,관람횟수만큼의감동이있는영화,그런영화는바다깊은곳에빠진진실과같은것이다.(사랑의모호한진실―박찬욱의〈헤어질결심〉중에서)
존재론적질문은항상무겁다.인간은어떤존재이고우리삶은무엇인가,우리의사랑은어떤것인가?그러기에많은이들은삶을묻는대신삶을살아가고,사랑이무엇인지물어보기보다는사랑을한다.그리고많은영화는영화가무엇인지물어보기보다이것은그냥영화라고말한다.그런데이정향은영화에대해질문을던진다.그녀가묻는방식은너무나도부드럽고경쾌하다.존재에관한무거운문제는밑으로가라앉고영화의표면위에는춘희와철수의사랑이야기가흘러간다.(틀,세계,영화―이정향의〈미술관옆동물원〉중에서)
스크린위에서펼쳐지는허구의세계는관객의삶과뫼비우스의띠처럼연결되어있다.영화의세계는관객의삶속에들어온다.관객은새로운시간을경험하고감정의떨림이만든기억을쌓으며삶을확장한다.이책의제목이‘뫼비우스의영화관’인이유이다.영화라는허구는관객의정서를어떻게움직이는가,관객은영화의세계를어떻게지각하는가,감독은어떻게관객의상상적참여를끌어내는가,이러한질문이모든글의출발점이다.(서문중에서)
추천사
“유독눈밝은이들이있다.그밝고예리한눈으로영화속을유유히헤엄치며숨은의미를찾아내는사람.거기서발견한실마리들을차곡차곡쌓아올려감독을경탄하게만들고내머릿속의미로를나보다더환하게꿰뚫어보며오래전에기억에서사라진방을재주좋게활짝열어젖히고선잃어버린열쇠를건네주는두렵고도소중한존재.영화평론가심은진은감독들의영원한동반자다.”
?이정향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