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이야기를전해온다큐멘터리피디가탐색하는경청의힘
감염병위기가부추긴변화가운데타자,소수자에대한만연한혐오와배제를빼놓을수없다.한편디지털경제는모두에게직접말하고쓰고방송하는콘텐츠창작자가되기를권장한다.이런사회에서듣고읽고바라보는행위의의미와가치는빠르게퇴색한다.말하는법을다루는이야기가넘쳐나는데비해,듣는방법과태도를논하는이야기는턱없이부족한셈이다.
이렇듯공존,포용,다양성같은가치가퇴행하는때,‘어떻게들을지’에관한밀도있는성찰을담고있는『타인을듣는시간』은시의적절하게도착한이야기가된다.이책은다큐멘터리프로듀서인저자가공장노동자,트랜스젠더,장애인,학교폭력가해자등다양한타인들을마주하고이야기를듣고,나아가그것을다큐멘터리로전하는과정을담은에세이인동시에,13편의논픽션이어떻게사람들의삶과맥락을기록하는지를들여다보는서평기다.현대의고전이된오웰의르포부터현지인의삶으로파고드는여행기,참사피해자및유족의삶과투쟁의기록,구술생애사작업,픽션과논픽션의경계에있는글까지,다채롭고독특한작품들을다루고있다.또이책은‘잘듣기위해’타인들의현장을찾아가온몸으로부딪치고경험하며자신의지평을넓혀가는특별한여행기이기도하다.이렇게여러갈래의글감을긴밀하게엮어내는글쓰기는,타인의이야기를듣고전하는태도나재현방식을집요하게고민하고탐색하면서차이를발견하고존중하는감각을예리하게일깨운다.
저자김현우는또한존버거,리베카솔닛,레이철커스크,스티븐킹등의글을옮겨온번역가이기도하다.이런이력에서도알수있는언어에대한그의섬세한감각은이책에서다큐멘터리제작자로서익혀온다른세상에대한“몸의감각,몸의경험”과만난다.글과영상으로담아내는과정에서의성실함,섣부른공감과연대에대한날선문제의식,예의와진심을다하는자세는그만남의결과다.책전체를관통하는경청의힘과듣는이의윤리에관한저자의사유가묵직한울림을주는이유다.
내‘안’이아니라‘바깥’을향하는언어,논픽션의재발견
『타인을듣는시간』에서얻을수있는즐거움과쓸모는다양한논픽션(또는논픽션의속성을지닌책)의매력과의의를새롭게발견해내는데있다.저자는논픽션과다큐멘터리를“그들의목소리로그들의삶을”이라는간명한문구로정의한다.그리고“내내면을설명하는언어”와“내바깥의세계를묘사하는언어”의차이를짚으며,바깥을향하는언어로구성된논픽션에서깊이있는성찰을건져낸다.
이책에등장하는논픽션들은공통적으로‘차이’에섬세한언어를부여한다.이를통해저자김현우는차이나는경험,‘정상’에서소외되어온정체성이비로소가시화되고,그렇게이해와인정을위한초석이마련될수있음을밝힌다.예컨대숫자,‘통계단위’가아닌각자의이름과‘느낌’을가진광부개개인에주목하는『위건부두로가는길』은‘집’이나‘자유’같은개념의구체적인내용과감각이달라진다는것을예민하게포착한다.그럴때하층민을위한주거정책의한계역시보이게된다.또앤드루솔로몬의『부모와다른아이들』을다루면서는,차이를외면하거나무화하지않고타인에대한‘나의이해’여부와상관없이타인을인정할때연대가가능해진다는사실을상기한다.나아가이런사례를통해차이에대한섬세한인식없이설익게‘우리’를명명하고‘연대’를꺼낼때,외려서로의다름을지워버리는결과가벌어진다는것을짚어낸다.
또저자는논픽션들에서타인의일상을충분히내몸과감각으로함께한후의소통,타인에게몸으로다가가는방식의중요성을읽어낸다.한대의카메라만을들고현지인들이사는곳으로곧장들어가는후지와라신야의『동양기행』과나란히,미처인터뷰이의삶의환경을충분히겪어“몸을준비”하기전에진행한인터뷰의실패를고백한다.이어서,미나마타병을둘러싼사회적사건을자신의“사적인일”이라표현할만큼오래공동체에머물며사건의실상을세상에알린텍스트『신들의마을』과함께,성소수자당사자들과가족들을긴시간만나며“마음만으로는다준비할수없는”타자와의마주침에준비되어갔던과정을소개한다.혐오범죄가일어난도시를직접찾아가구성원들을1년간인터뷰해그들의말만으로희곡을만든『래러미프로젝트』,그리고타인의삶을듣기전에추측하지않았기때문에지금은국회의원이된‘생각많은둘째언니’장혜영씨와의다큐멘터리작업이성사될수있었던일화도빼놓을수없다.이책은이처럼타인과나의다름을인지해나가고,타인의삶을몸으로겪어가는작업들이집단의서사에매몰되지않는개인들의이야기를포착해낸다는점에서도논픽션에주목할것을요청한다.
나와당신의성장을위한청자의윤리
이책은다큐멘터리를만들어온저자의다양한경험으로부터타인에게질문하고타인의이야기를듣는청자의윤리를길어올린다.다큐멘터리를만들고논픽션을읽으며축적한그내용들은매우구체적이고실천적으로제시되어타인의말을듣고자하는사람들에게실질적인도움을준다.내가잘모르는세계의사람들을만날때는‘무엇을하겠다.’보다‘무엇을하지않겠다.’를정해놓고시작하면도움이된다.무엇을하면안될지를알기위해사전에공부가필요함은물론이다.예를들어,저자는장애인-비장애인커플을장시간인터뷰한내용을정리하면서‘극복’이라는말을쓰지않겠다는원칙을세웠다.다른이의삶을재단하지않기위해상대의디테일을최대한많이모으기위한노력도필요하다.또한쉬운이해와공감,감정이입을경계해야한다.이를테면출연을망설이는상대앞에서‘나는당신을이해할수있다,당신의삶에공감할수있다.’라고말하지않아야하는것이다.상대가이야기를풀어놓을수있도록신뢰를얻으려면기다림과자제의시간이필수적인데,그시간은타인의기준과입장에맞게나를조정하는과정이기도하다.나에게이로운것이타인에게도이로운것은아니라는지극히당연한사실을늘유념하는것도중요하다.
그렇게타인을듣는시간이늘어날수록내이해의영역과지평이넓어지고결국개개인이성장하게된다고저자는말한다.타인과접촉하지않아도되는‘편안한삶’의테두리를깨고나올때타인과내가서로의세계에서새로‘탄생’하는선물같은순간이만들어진다고말한다.타인에게말걺으로써생겨나는청자의책임을받아들이고듣기의윤리학을배우고자할때,타자에대한존중과‘우리’의공존이라는과제가달성될수있고,개인들의이야기를통해사회적논의를성숙시킬수있다고.이책처럼당신의이야기는무엇이냐고끊임없이묻는작업이더많이필요한이유다.
<책속으로>
말레이시아의고무나무농장과1차가공공장을갔고,슬로바키아의운동화공장을갔으며,부산신항을촬영했다.그리고홍콩에서출발하는컨테이너선을촬영했다.네곳에서몸으로일하고있는열명남짓한사람들을만나서그들의이야기를들었다.부산사투리와,통역자가힘들어한키나발루산일대원주민의말레이어사투리,통역자를찾기도힘들었던슬로바키아어,미얀마인들이쓰는영어로전해지는노동자들의‘생활’을온전히담고싶었다.‘그들의목소리로그들의삶을’.그것이내가생각하는다큐멘터리다.이정의는그대로글쓰기의한장르로서논픽션에도해당할것이라고생각한다.그리고조지오웰의『위건부두로가는길』은이러한정의가적용된논픽션의고전이다.(11)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말에서格에는‘대적하다,부딪치다’라실패할수밖에없었던인터뷰는의미가있다.같은格자가격투(格鬪)에도쓰이는것을보면,그것은몸의부딪침을전제로하는동사라고도할수있다.그렇게격물치지를‘사물에부딪쳐그이치를아는것’으로해석한다면,후지와라신야의글은그러한격물치지를가장잘보여주는본보기다.부딪는행위,부딪침을통해상대를알아가는것은글이아니라몸이다.글은그몸의경험을옮겨낼뿐이다.(48~49)
깊이있는성찰과불필요한번민은어디서나뉘는가?그질문앞에서나는내밖을묘사하는언어와내안을설명하는언어의차이를떠올린다.그리고점점,나의내면을설명하는언어보다는내바깥의세계를묘사하는언어쪽으로기울고있는나를발견한다.그래서,논픽션이다.(59)
그는“저는트랜스젠더입니다.첫커밍아웃을아내에게했습니다.”라고입을열었다.순간70여명이모인공간에정적이흘렀다.보통은커밍아웃한자녀들에게다가가는방법을조언해주었던경험많은부모들도그사람에겐해줄말이없는모양이었다.다들듣고있을수밖에없었다.당사자는아내와길게이야기했고,“계속함께살기로”결정했다고했다.두사람은해외에나가서살준비를하고있었다.나는아무도섣불리조언하지않고,모두가그사람의이야기에귀를기울이던그시간의집중된분위기가좋았다.그이는흥분하지도않고,유창하지도않게,하지만멈추지않고작은목소리로자신의이야기를해주었다.그조용한시간에는자신의이야기를자신의말로전하는목소리와,그목소리를귀기울여듣는‘집중’밖에없었다.신기하게도그런시간동안에는이야기를하는이나듣는이모두위안을얻는다.(74~75)
S씨의슬픔은어떤형태를이루어가고있는걸까?나는자식을먼저떠나보낸부모,그것도부모의이해를받지못해자살한자식을둔부모당사자의후회같은것을이해한다고말할수없다.거의육체적인감각에가까울정도의감정이라면타인이머리로‘안다’고할수있는성질의것이아닐것이다.그리고그런감정을전하는입장이라면어떻게해야하는지에대해서도아직정답을찾지못했다.다만,어떤감정은온전히당사자만이느낄수있게남겨두어야한다고생각한다.그래서S씨가아들의무덤에서울음을터뜨렸을때카메라를멀리물려뒤에서찍었고,인터뷰중간중간에울음이터져나오면촬영을끊고당사자가진정이될때까지기다렸다가다시카메라를돌렸다.정답을전하려고노력한것이아니라,정답이아닌것을전하지않으려고노력했다고할까.(108~109)
내가모르는세계를살고있는사람들을만날때‘무엇을하겠다.’가아니라‘무엇을하지않겠다.’만정해놓고시작해도크게도움이된다.또한상대에따라구체적으로무엇을하면안되는지정도는사전에공부하면알수있다.그렇게우리가정한그날의원칙이극복이라는단어를쓰지않겠다는것이었고도합열시간가까이네커플과진행한인터뷰촬영은그해에했던촬영중에서가장유쾌했다.(116)
2019년,다큐멘터리에출연했던네쌍의커플같은이들의이야기나『언더그라운드』에등장하는일본시민들의이야기,특정집단으로수렴되지않는개인들의이야기가충분히많이나온다면그들이속한집단(다큐멘터리의경우에는‘2019년의한국장애인’이고,하루키의책에서는‘1990년대중반의일본시민’이다.)과관련한사회적논의들이훨씬성숙해질거라고확신한다.아마도그속도는느리겠지만,그아쉬움은다른문제다.그러니우선은,‘당신의이야기는무엇입니까?’라고끊임없이개인들에게물어야한다.(127)
아무리해도늘지않는것이인터뷰기술이기도하다.물론여러가지‘스킬’을배울수는있고,나역시오랜기간인터뷰를하며그런스킬몇은익혔을것이다.하지만사람의마음은,진심은스킬따위로얻을수있는것이아니라고생각한다.그렇기때문에새로운인터뷰대상을만날때마다,처음부터다시새로운벽을마주하는것같은기분은어쩔수없다.그럼에도나는여전히인터뷰촬영을가장기대하기도한다.날것으로서사람의목소리가그어떤해석보다힘이세다는것을알고있다.(128~129)
“피디님은이번다큐멘터리에서무슨이야기를하고싶으세요?”나의맥락을묻는질문이었다.[……]“저도잘모르겠습니다.다만저는동생분이매력적인인물이라고생각합니다.그매력을보여주고싶고,언니분이애쓰시는모습도많은사람들이봤으면좋겠습니다.”그대답이언니가바라던대답이었다는건나중에야알았다.방송을마친언니가“그게정답이잖아요.”라고이야기해주었다.아직누군가의삶의세세한면을알지못한상태에서‘당신의삶은이러이러한이야기아니겠습니까?’라고추측하는것만큼위험한것은없다.단편적으로노출된누군가의삶에서어떤부분을알아보았다면,그리하여그의삶을좀더알아보고싶은마음이들었다면우선은그삶속으로들어가보아야한다.그때까지의나의이야기,그의삶에관심을가졌던나의맥락은잠시잊어버리는것이좋다.(136~137)
이해의대상‘안으로’들어가서대상의위치에서보는것이이해다.그것은위치의이동을전제하는행위이고기존의위치,즉나의맥락을벗어날것을요구한다.이해란머리나마음이아니라행동으로,몸으로하는것이다.때로그렇게자리를이동하고나면원래내가있던자리로돌아오지못할수도있다.이해한다는것은그만큼어떤의미에서는위험한행동이기도하다.그런위험을감수하지않은채,자기가앉은자리에서조금도움직이지않은채남발하는이해가,그런이해를바탕으로전하는이야기나행동이공허한이유다.(139)
나에게자연스러운것이당연한것이아님을알고나면조금더타인의기준,혹은그의입장에맞게나를조정하는과정이따른다.말을할때“좀크게얘기”해야하는상대가있고,어떤단어는쓰지말아야할상대가있고,때론아예그가마음을열때까지,나를신뢰할때까지인내심을가지고기다려야하는상대도있다.그시간을기다릴만큼상대에대한관심이있다면,혹은그럴필요가내쪽에있다면기다리는동안할수있는일은‘나는당신을해칠이유가없습니다.’라는마음을지속적으로보여주는것뿐이다.(211)
『할매의탄생』에서할머니들이사투리로풀어놓은구술을표준어로바꾸지않은점은그래서중요하다.그들의언어를우리의언어로바꾸지않았다는사실은그들의이야기를들으려면그들의언어를우리가배워야한다는것,사투리가낯설고이해되지않는만큼서로의세계가다르다는것을보여주는결정이었다.(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