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들과 함께하는 저녁

그리운 이들과 함께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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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 시조집은 몸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축적되는 자리이며 반복된 노동과 감각, 그리고 삶의 경험이 물리적으로 새겨지는 하나의 표면이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삶이 기억이나 관념으로 남는 게 아니라 몸이라는 구체적인 형식 속에 남는다는 사실을 점점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시인은 삶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몸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변화는 곧 시간의 형태로 읽힌다. 몸은 시간을 지나면서 닳고, 굽고, 무뎌지고, 때로는 버티며 그 형태를 바꿔 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가 반복 속에서 축적된 결과라는 점이다.

이 시집의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남겨진 자리이며 사라진 것과 남아 있는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이다. 사람은 떠났지만 사물은 남아 있고, 그 사물들은 여전히 시간을 품고 있다. 이때 부재는 공백이 아니라 또 하나의 존재 방식으로 전환된다.
마지막에 이르면 지금까지의 모든 흐름은 하나의 정서로 수렴된다. 그것이 바로 그리움이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그리움은 과거를 향한 감정이 아니라, 현재를 붙들고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연어의 노래」에서 “몸 전체로 기억한다”는 구절이 보여주듯 기억은 지워지지 않으며 존재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 시집에서 삶은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지나온 것들을 끌어안은 채 이어지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남겨진 것들이 현재를 지탱한다. 결국 이 시집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상태이다. 사라진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꾸어 계속해서 존재하는 방식. 그것은 크지 않다. 그러나 오래 남는다.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고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시집은 그 상태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저자

임세한

경상북도울진군금강송면에서태어나춘천에서성장했다.1992년경인일보신춘문예에시조「나의노래」당선,같은해문화일보신춘문예에시조「대장간에서」당선,『월간문학』신인문학상시조「지리산고로쇠나무」외1편당선으로등단했다.수주문학상대상,김만중문학상,녹색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제1부몸으로벼리는시간
나의노래__13/대장간에서__14/기공技工__16/그노인의길__17/아침,구둣방__18/계단아래수선집__20/빨랫줄동네__22/구유를보다__23/가마앞에서__24/황태__26/두더지__27/낙타__28/발꿈치에걸리다__29/옥탑방소묘__30/그때그랬던것처럼__32/

제2부유년의불씨
진달래꽃__35/질화로__36/박꽃에대하여__37/풀꽃속으로__38/싱아__39/쌍전분교__40/옛집에서__42/산문에들다__43/너에게로가는길__44/부엉이울음__45/밴댕이젓갈__46/고라니__47/

제3부자연이가르쳐준것들
홍시__51/지리산고로쇠나무__52/그여름의흔적__54/입동立冬근처__55/가을엽서__56/은행나무의말__57/늙은나무__58겨울억새밭에서__60/벼랑에서배우다__61/쌍전리의겨울__62/왕벚나무를엿보다__64/우수절雨水節__66/서울대공원왕벚나무__67/겨울산수유__68/무궁화학교__69/

제4부삶의풍경,시대의그림자
겨울판화__73/겨울죽변항__74/지내리에서__76/행복동삽화__78/흔들리는둥지__79/정선가는길__80/슬픈구도·1__81/슬픈구도·2__82/호스피스병동__83/폐광앞에서__84/팽나무·1__86/팽나무·2__87/연어의노래__88/

작품해설:박지현
몸의시간,사물의증언__93/

출판사 서평

이시조집은몸에서시작된다.그러나여기서말하는몸은단순한육체가아니다.그것은시간이축적되는자리이며반복된노동과감각,그리고삶의경험이물리적으로새겨지는하나의표면이다.이시집을읽다보면삶이기억이나관념으로남는게아니라몸이라는구체적인형식속에남는다는사실을점점분명하게인식하게된다.
시인은삶을설명하지않는다.대신몸이어떻게변해왔는지를보여준다.그리고그변화는곧시간의형태로읽힌다.몸은시간을지나면서닳고,굽고,무뎌지고,때로는버티며그형태를바꿔간다.이때중요한것은변화자체가아니라그변화가반복속에서축적된결과라는점이다.이러한인식은「대장간에서」에서가장선명하게드러난다.

곧은허리구부리고순한몸두들겨도
칼이어서는절대안돼서슬퍼런날이어선
담금질검푸른물에눈멀어도절대안돼

우리가무쇠인채흙집에누웠을때
차라리잠자려고눈,코,귀도막았지만
곪아서터진사랑니는빼지않고는못빼겼다

그대다시칼만들려고무쇠조각달구는데
뼈는뼈살은살끼리벌써녹고삭아서
풀무질그푸른바람도신명나질않았다

나는차라리호미곡괭이길바랐는데
어쩌다잘못버려무딘칼들만만들고
휘감아도는풀무질활활타는저화덕

잘못벼린연장들이성한나무베어내고
싹뚝싹뚝잘리는그밑동언저리로
불안한우리생애가가라앉고있었다
-「대장간에서」전문

“곧은허리구부리고순한몸두들겨도/칼이어서는절대안돼서슬퍼런날이어선”의이구절에서‘곧은허리’가‘구부러진다’는변화는단순한자세의문제가아니다.그것은반복된노동이몸의구조를바꾸는과정이며그과정이곧시간의축적을의미한다.몸은스스로변화하는것이아니라반복된행위속에서점진적으로변형된다.그리고그변형은되돌릴수없는방식으로남는다.
여기서주목할것은‘두들겨도’라는표현이다.쇠를두드리는행위는대상에만영향을미치는것이아니다.그행위를반복하는몸역시그충격을함께축적한다.즉,노동은외부의사물만을변화시키는것이아니라,동시에주체의몸에도흔적을남긴다.
이어지는구절은이관계를더욱확장한다.“잘못벼린연장들이성한나무베어내고/불안한우리생애가가라앉고있었다”라는구절에서‘연장’은단순한도구가아니라인간의삶을비추는장치로읽힌다.잘못벼려진연장은잘못된결과를낳고그결과는삶전체에영향을미친다.이장면은노동과삶이분리되지않는다는사실을보여준다.무엇을어떻게다루느냐가곧어떻게살아가느냐로이어진다.

타오르는산천에는피울음이떠돕니다
꽃잎과꽃잎사이허기져몸져눕던
할머닌바람이되어온동네를휩씁니다
(중략)
지금은모두떠나빈집엔이끼만끼고
정한수달빛어리듯굳게지킨이터전
주름진우리아버지홀로텃밭일굽니다

-「진달래꽃」부분

“타오르는산천에는피울음이떠돕니다(중략)/할머닌바람이되어온동네를휩씁니다”에서과거의인물은사라지지않는다.‘할머니’는더이상존재하지않지만,바람이되어여전히현재를휩쓴다.이장면은기억의방식이단순한회상이아니라는점을보여준다.존재는형태를바꾸어남는다.
또한이작품에서중요한것은풍경과기억이분리되지않는다는점이다.산천,들녘,강물은단순한배경이아니라,그시절의삶을그대로품고있는공간이다.이어지는구절역시이점을강화한다.“지금은모두떠나빈집엔이끼만끼고(중략)/“주름진우리아버지홀로텃밭일굽니다”의이장면에서시간은단절되지않는다.떠난것과남은것이동시에존재하며,그사이에서현재가형성된다.
이와같은구조는「질화로」에서도반복된다.

할아버지부젓가락질그릇에정을묻어
불씨다독여인절미굽던눈내리는그겨울
세상은춥고허해도마음하나덥혔었네
(중략)
등잔에기름붓듯질그릇에피운목숨
사금파리깨진조각눈물얼룩진그자리에
애틋한그리움모아날름대는불씨여

-「질화로」부분

“불씨다독여인절미굽던눈내리는그겨울/세상은춥고허해도마음하나덥혔었네”라는구절에서‘불씨’는단순한사물이아니다.그것은삶을유지하는중심이며,공동체의온기를상징한다.특히중요한것은‘다독여’라는동사이다.불씨는저절로유지되지않는다.그것은계속해서돌보고지켜야한다.이점에서유년의기억역시단순히남아있는것이아니라,현재속에서계속해서유지되는것이다.
또한“등잔에기름붓듯질그릇에피운목숨”이라는구절은삶자체를불씨의연장선으로본다.생은꺼지지않기위해끊임없이보충되어야하는것이다.
이러한감각은「박꽃에대하여」에서더욱정서적으로확장된다.“평생을고생하신우리할매와같습니다”에서자연은곧인간이다.박꽃은단순한식물이아니라,할머니의삶을상징하는존재로전환된다.
“달빛풀어싸매듯이”라는표현은상처와치유의방식을동시에보여준다.이시집에서유년의기억은단순히따뜻한것이아니다.그것은고통을포함하고있으며,그고통까지도감싸안는방식으로남아있다.
「풀꽃속으로」에서는어머니의존재가더욱직접적으로드러난다.

중천에해들어서면꽃잎닫는방가지똥
봄날이면산자락움켜쥐던벌깨덩굴이
울엄마그악스러운손아귀를좋아했지
(중략)
울엄마땀냄새가자줏빛으로피고져도
아지랑이핀오월을단숨에딛고서서는
그때의잰걸음날들한번도진적없는것을

-「풀꽃속으로」부분

“울엄마그악스러운손아귀를좋아했지”의이구절은매우중요하다.‘그악스럽다’는표현은단순한애정의언어가아니다.그것은생존의방식이며,삶을버텨낸힘이다.이시집에서어머니는단순한보호자가아니다.그녀는삶을유지하는근원이며,동시에고통을견디는존재이다.
또한이작품전체에서반복되는동작-넘어지고다시일어서는과정-은유년이단순한과거가아니라현재의삶을지탱하는구조임을보여준다.

모두이주한자리나뒹구는꽃과화분들
심한발길질에잔뜩찌그러져있거나
자해의시퍼런날이되어가슴베고있었다

종일머물곳찾다가멀미하듯돌아온저녁
재개발반대현수막은바닥까지떨어지고
빈하늘우듬지끝으로바람만노닐다간다

-「지내리에서」부분

“모두이주한자리나뒹구는꽃과화분들(중략)/재개발반대현수막은바닥까지떨어지고”의이장면에서중요한것은‘이주’그자체가아니라이주이후의상태이다.사람이떠난자리에남아있는것은사물들이다.꽃과화분은여전히그자리에있지만더이상돌보는손이없다.현수막은한때의의지를담고있었지만이제는바닥에떨어진채힘을잃었다.이처럼이시집은어떤사건을직접적으로서술하지않는다.대신사건이지나간뒤남겨진풍경을보여준다.그리고그풍경속에서독자는무엇이일어났는지를스스로읽어내게된다.
이와같은방식은공간을통해더욱선명해진다.비어있는마을,닫힌집,무너진구조물들은단순한배경이아니라시간의잔여이다.그것들은더이상기능하지않지만그렇다고완전히사라지지도않는다.오히려그중간상태,즉남아있으면서도이미끝난상태가이시집이포착하고있는핵심이다.

이시집의공간은단순한배경이아니다.그것은시간이남겨진자리이며사라진것과남아있는것이동시에존재하는상태이다.사람은떠났지만사물은남아있고,그사물들은여전히시간을품고있다.이때부재는공백이아니라또하나의존재방식으로전환된다.
마지막에이르면지금까지의모든흐름은하나의정서로수렴된다.그것이바로그리움이다.그러나이시집에서그리움은과거를향한감정이아니라,현재를붙들고있는힘으로작용한다.「연어의노래」에서“몸전체로기억한다”는구절이보여주듯기억은지워지지않으며존재의방향을결정한다.
이시집에서삶은앞으로만나아가는것이아니다.지나온것들을끌어안은채이어지는과정이며그과정에서남겨진것들이현재를지탱한다.결국이시집이보여주는것은하나의상태이다.사라진것들이완전히사라지지않고,형태를바꾸어계속해서존재하는방식.그것은크지않다.그러나오래남는다.설명되지않지만분명히느껴지고보이지않지만사라지지않는다.이시집은그상태를끝까지밀고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