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나’를 유령처럼 살게 하는 사회
체험적 사유 돋보이는 송태웅 시집
『배고픔이 고양이를 울고 갔다』
체험적 사유 돋보이는 송태웅 시집
『배고픔이 고양이를 울고 갔다』
바람 소리가 대숲을/쓸고 갔고/배고픔이 고양이를 울고 갔다/추위가 보일러를 건드리다 갔고/나는 한사코 당신을 울지 않았다//내가 당신을 울면/당신은 전깃줄에 매달려 감전당한/전기공처럼/위태로워질 것이기에
- 「배고픔이 고양이를 울고 갔다」 전문
대숲에 바람이 불고 고양이 울음이 들리다 만다. 한겨울 추위에 보일러가 그르렁거리다 만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한사코 울음을 참고 있다. 내가 울면 당신이 “전깃줄에 매달려 감전당한/전기공처럼” 위태로워질 것이기에.
표면의 상황은 이렇다. 하지만 그 사고현장에 시인도 있었을까 하는 상상에 이르면 이 짧은 시의 공명에 돌연 몸서리치게 된다. 어떤 장례도 흔한 장례는 없다. 화재 진압에 나선 소방관이 죽거나 다치고, 어느 날 멀쩡하던 육교가 내려앉아 행인이 사망한다. 이때의 파국은 동행자를, 독자를 그냥 통과하지 않는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경계가 실존의 명분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무릇 좋은 시는 그 시인의 삶에서 탄생한다. “나는 한사코 당신을 울지 않았다”라고 썼지만, 이것은 억지다짐, 시인의 역설일 것이다. 그 이유를 시인은 당신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썼다. 내가 울면 당신은 물론 나도, 또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어떤 당위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당신이 한순간 뜨거운 불에 감전사한 어느 날, 홀로 돌아와 맞는 한겨울밤 생의 위태로운 파장. 그 파장이 부조리한 들판의 칼바람이 되어 독자를 실존의 영역으로 급격히 몰아세운다. 이 시는 시인의 체험에서 나왔다고 한다. ‘나-당신-전기공’, 시인은 그 주체를 치환함으로써 서로 다른 ‘나’, 우리들의 경계를 아프게 되묻고 있다.
최근 나온 송태웅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배고픔이 고양이를 울고 갔다』(문학들)를 읽으며 떠올린 생각이다. 한때 중등학교 국어 교사였던 시인은 지금 전라도 구례의 지리산 자락에서 홀로 살고 있다. 이번 시집에 화엄사, 천은사, 노고단은 물론이고 구례 문척을 소재로 한 연작시가 등장하는 배경이다. 시인은 얼마 전까지 완도 땅 보길도에서 기간제 교사로도 활동했다. 주말마다 구례와 보길도를 오가며 쓴 시편들도 이 시집의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보길도 바닷가 마을 폐가 안방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이미 떠나고 없는 자들과 임시거주자인 자신의 삶을 파도에 씻기는 몽돌에 비유한 시 「몽돌해변에서」는 수묵화처럼 농담이 깊고 시적 성취감이 높다. (“바닷물에 몸 씻는 돌들은 바닷가 마을 빈집들의 안방에 걸린 가족사진 속의 얼굴들이었다 몽돌들도 한때는 가족사진 속의 얼굴들처럼 이목구비가 선연했을 텐데”).
이 시집에서 또 도드라지는 것은 ‘새’다. 피아골을 비추는 산불 감시용 시시티브이의 화면을 매개로 실상과 허상,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를 노래한 「새와 나」가 대표적이다.(“정지된 화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새 두 마리가 쓱 지나갔다//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나는가 새는 실체인가 그림자인가”)
「몽돌해변에서」와 「새와 나」 그리고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경계를 노래한 표제작의 공통점은, 그의 시들이 존재하나 존재하지 못하는 현실의 부조리를 아프게 들여다보고 숙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을 유령들의 노래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겠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비치는 시시티브이 속의 새와 나의 세계. 진짜와 가짜, 진실과 허구의 세계.
시인은 그 경계를 서성이며 질문하는 자다. 나와 당신을 유령처럼 살게 만드는 이 거대한 세상의 거울을 향해 말이다. 체험에서 비롯된 시적 사유가 돋보이는 이번 시집의 저자 송태웅은 1961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계간 『함께 가는 문학』 신인상을 수상한 이후 시집 『바람이 그린 벽화』, 『파랑 또는 파란』, 『새로운 인생』 등을 펴냈다.
- 「배고픔이 고양이를 울고 갔다」 전문
대숲에 바람이 불고 고양이 울음이 들리다 만다. 한겨울 추위에 보일러가 그르렁거리다 만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한사코 울음을 참고 있다. 내가 울면 당신이 “전깃줄에 매달려 감전당한/전기공처럼” 위태로워질 것이기에.
표면의 상황은 이렇다. 하지만 그 사고현장에 시인도 있었을까 하는 상상에 이르면 이 짧은 시의 공명에 돌연 몸서리치게 된다. 어떤 장례도 흔한 장례는 없다. 화재 진압에 나선 소방관이 죽거나 다치고, 어느 날 멀쩡하던 육교가 내려앉아 행인이 사망한다. 이때의 파국은 동행자를, 독자를 그냥 통과하지 않는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경계가 실존의 명분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무릇 좋은 시는 그 시인의 삶에서 탄생한다. “나는 한사코 당신을 울지 않았다”라고 썼지만, 이것은 억지다짐, 시인의 역설일 것이다. 그 이유를 시인은 당신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썼다. 내가 울면 당신은 물론 나도, 또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어떤 당위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당신이 한순간 뜨거운 불에 감전사한 어느 날, 홀로 돌아와 맞는 한겨울밤 생의 위태로운 파장. 그 파장이 부조리한 들판의 칼바람이 되어 독자를 실존의 영역으로 급격히 몰아세운다. 이 시는 시인의 체험에서 나왔다고 한다. ‘나-당신-전기공’, 시인은 그 주체를 치환함으로써 서로 다른 ‘나’, 우리들의 경계를 아프게 되묻고 있다.
최근 나온 송태웅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배고픔이 고양이를 울고 갔다』(문학들)를 읽으며 떠올린 생각이다. 한때 중등학교 국어 교사였던 시인은 지금 전라도 구례의 지리산 자락에서 홀로 살고 있다. 이번 시집에 화엄사, 천은사, 노고단은 물론이고 구례 문척을 소재로 한 연작시가 등장하는 배경이다. 시인은 얼마 전까지 완도 땅 보길도에서 기간제 교사로도 활동했다. 주말마다 구례와 보길도를 오가며 쓴 시편들도 이 시집의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보길도 바닷가 마을 폐가 안방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이미 떠나고 없는 자들과 임시거주자인 자신의 삶을 파도에 씻기는 몽돌에 비유한 시 「몽돌해변에서」는 수묵화처럼 농담이 깊고 시적 성취감이 높다. (“바닷물에 몸 씻는 돌들은 바닷가 마을 빈집들의 안방에 걸린 가족사진 속의 얼굴들이었다 몽돌들도 한때는 가족사진 속의 얼굴들처럼 이목구비가 선연했을 텐데”).
이 시집에서 또 도드라지는 것은 ‘새’다. 피아골을 비추는 산불 감시용 시시티브이의 화면을 매개로 실상과 허상,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를 노래한 「새와 나」가 대표적이다.(“정지된 화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새 두 마리가 쓱 지나갔다//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나는가 새는 실체인가 그림자인가”)
「몽돌해변에서」와 「새와 나」 그리고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경계를 노래한 표제작의 공통점은, 그의 시들이 존재하나 존재하지 못하는 현실의 부조리를 아프게 들여다보고 숙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을 유령들의 노래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겠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비치는 시시티브이 속의 새와 나의 세계. 진짜와 가짜, 진실과 허구의 세계.
시인은 그 경계를 서성이며 질문하는 자다. 나와 당신을 유령처럼 살게 만드는 이 거대한 세상의 거울을 향해 말이다. 체험에서 비롯된 시적 사유가 돋보이는 이번 시집의 저자 송태웅은 1961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계간 『함께 가는 문학』 신인상을 수상한 이후 시집 『바람이 그린 벽화』, 『파랑 또는 파란』, 『새로운 인생』 등을 펴냈다.
배고픔이 고양이를 울고 갔다 - 문학들 시인선 20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