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지탱해준것은거창한말이나돈이아니라,
언제든따스하게바라볼수있고만져볼수있는사소한사물들이었다는
사실을알게되었다.일상의사물들이내삶에녹아철학이되었고,
그림을그릴수있는바탕이되어주었다.”
알록달록이불과베개,찬장과자개장,반짇고리와골무,알루미늄밥상과양은냄비,봉제인형과오색구슬….1970~80년대를상징하던살림살이들은우리에게어떤의미가있을까?누군가에게는유년시절의추억이고,누군가에게는가족에대한그리움일것이다.또누군가에게는오히려신선한문화가되기도한다.
그시절어느가정에나있었을일상의사물을끈기있게그리고있는작가이강.한세대이전의살림살이들에온기를불어넣은그의작품들은7080어린시절을살아온사람들에게는잔잔한추억을,젊은세대에게는새로운문화적감성을불러일으키고,K-컬처에관심있는외국인들에게는우리문화의새로운단면을보여주는소중한콘텐츠이다.
『이강의호시절』은K-컬처와레트로라는,대중이열광하는두측면모두에서주목받는작가이강의첫번째에세이집이다.때론선머슴같은익살스러움으로때론한없이촉촉한감성으로풀어내는어린시절의이야기에서작가의그림이어디에서출발했는지,그림을통해하고싶은얘기는무엇인지쉽게공감하게된다.
누구나내면깊은곳에하나쯤간직하고있는추억.이강작가의그추억은어릴적마당넓은시골집과더시골인할머니댁이었다.동생들과함께장롱이며서랍장위를누비고다닐정도로씩씩했던이강도,오색찬란한이불,베개,반짇고리에온정신을빼앗겨정신없이몇시간씩바라보며화가의싹이자라나던이강도모두그시골집풍경어딘가에서살아난다.
고향집얘기,엄마밥상얘기,할머니이불얘기,날마다무언가를사들이는아버지얘기,마당곳곳의나무들얘기에이르기까지어린이강의눈으로바라본그시절생활들을읽어내려가다보면몽글몽글추억이피어나고토닥토닥위로가찾아온다.
“그림이란누구나공감할수있고,때론위안받을수있는도구가되어야합니다.”
별것아닌그예술의목표가동년배에게는따뜻한추억을,젊은세대와외국인들에게는우리문화의힙함을전달하는가장한국적인작가를만들어낸힘이다.
팍팍한현재를잠시잊고옅은웃음을머금게하는추억여행,그것이면족하다.『이강의호시절』은그추억여행으로가는길에따뜻하게손을잡아주는여행안내자와같은책이될것이다.
책속에서
19p.유난히스카프를좋아하는엄마때문에옷장은늘스카프로가득했다.스카프를드레스처럼온몸에칭칭감고춤을추면잠자리날개처럼가벼운스카프가뒤를따라온다.스카프여러장을방바닥에펼쳐놓고꽃밭가득한정원에라도온나비처럼이꽃저꽃에앉아본다.무지개이불인양덮어도본다.
30p.엄마는대청소를좋아한다.한겨울에도여지없이모든창문을열어젖힌다.텔레비전을보다가도,잠을자다가도,밥을먹다가도느닷없이양쪽창문을열어젖히면그것으로청소시작이다.긴시간환기하고나면콧구멍이뚫린듯상쾌한기분이든다.창문을닫자마자우리는이불을끌어다머리까지처박고들어가몸을녹인다.
70p.어둡고요란한학교앞구멍가게에들어간다.향기에끌려보니지우개다.마음먹고지우개를사러오는날이면눌러도보고냄새도맡아보고여간신중해지는것이아니다.반투명녹색지우개를골라집으로돌아와서는파인애플지우개가아른거려후회한다.학교앞구멍가게아저씨는얼마나좋을까?
126p.가을이깊어질때까지우리집마당은노란색으로물들고악을쓰던엄마도은행잎이가득한몇주간은“아,예쁘다.어쩜이렇게도노랗다냐!”하며한결부드러워지고,아침마다마당을쓸던아빠도마당쓸기를그만두고부드러운표정으로은행나무앞에서한참을머물다가곤한다.
128p.우리집살구는시장에서사오는그어떤과일보다몇배는예쁘고맛있다.단풍에물들듯한꺼번에오렌지핑크빛이되면살구는눈치없이욕심껏먹어도표시가안날만큼많이도열린다.살구가열리는시기를은근히기다리는동네사람들에게엄마가한바가지씩돌리면살구나무는우리남매보다더한칭찬을듣는다.
150p.붉은얼굴에비틀비틀,한눈에봐도과하게마신아빠.이런날은어김없이양손에커다란태극당빵봉지가들려있다.얼마나많이담았는지봉지가터지기직전이다.아빠는술만취하면우리마음을귀신처럼아는것같다.엄마는찌그러진빵처럼얼굴을구겨가며핀잔을주고아빠는우리얼굴을보며눈을찡긋찡긋한다.
157p.뭔지모를살기가느껴지는눈빛에머리통이훤히드러나는빡빡머리.가슴까지올라오는배바지.오빠의스타일이갑자기바뀌었다.깡패처럼보이길원했다면성공이지만...엄마는오빠를몰고방문을닫고들어갔다.나와여동생,남동생은누가먼저라할것도없이옥상으로도망을쳤다.운이나쁘면단체로맞는수가있는데이런상황이딱그렇다.
214p.화려한꽃무늬이불더미는할머니가안계신날최고의놀이터다.산처럼높이쌓인이불꼭대기에앉아있으니성취감비슷한전율이온다.꽤높은곳에올라온듯현기증이나서숨고르기를해야했다.들키면할머니한테혼난다해도올라오길잘했지,하마터면이좋은것을못하고살뻔했다.
223p.방학이면두번씩손톱에물들여주는할머니는참하게자는사람은봉숭아물이진하게든다며언제나잠자리들기전손톱에봉숭아를묶어준다.첫눈이올때까지봉숭아물이남으면첫사랑이이루어진다고하던데,첫사랑이이루어졌으면난정말망했을것이다.
227p.반딧불을잡아서형광등을켜고보니천사나요정의모습이아닌그냥작은딱정벌레다.이런볼품없는벌레가아름답고강렬한빛을내다니묘한감동이느껴진다.반딧불은엄마가하는말중에“사람을겉모습만보고판단하지말라.”는말을이해하게해줬다.
254p.화로위에줄을맞춰올려놓은가래떡에서스멀스멀김이올라오면온방안에고스름한냄새가가득찬다.꿀보다맛있는조청이따스한가래떡에돌돌말려입속으로들어가다니이게꿈인가생시인가!쫀득거리는가래떡에돌돌말린조청은할머니댁에서만먹을수있는유일한겨울간식이다.
264p.술좋아하는할머니의술담그는재주는동네에서도알아준다.술이완성되는날이면아줌마들은칼국수를만들고,소심쟁이동네할아버지가이상한몸짓으로춤을추고,혓바닥이꼬인아저씨둘이맞붙는다.할머니의동동주는마당한가득모인사람들을웃고떠들고울고불고난리치게만드는요술물약이다.
269p.봄향기가득한진달래술은할머니의주특기다.“할머니,진달래술은무슨색이야?”“봄을닮은진달래색이지.”진달래가피는계절은하루종일핑크색이할머니손에서떠나질않는다.정말이지할머니는낭만을안다.
272p.할머니의열무김치찌개는젓가락이가다가되돌아올것같이맛대가리는없어보이지만냄새는사람의애간장을녹일만큼군침돌게한다.이리저리뒤적거려봐도돼지고기나멸치대가리한쪽이없는데도끝장나게맛있는열무김치찌개는저녁시간을알리는할머니목소리에귀기울이게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