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에 있다는 것 (반양장)

제자리에 있다는 것 (반양장)

$16.80
Description
‘발 없는 새’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의 대사에 등장하지만, 뿌리 뽑힌 청춘의 불안에 대한 은유이지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자리의 존재들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리를 찾아 기꺼이 이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람의 실존이 요구하는 자리는 생존의 욕구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시몬 베유가 “뿌리 내림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인간 영혼의 욕구”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실존의 깊이와 충일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에 닿고자 하는 포기할 수 없는 갈망과 고뇌를 환기시키는 말로 이해해도 되리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뿌리 내림을 위해서 뿌리 뽑힘을 감수하려 한다. 자신의 실존의 여러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일치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와 진심으로 화해하기 위해서.

그런데 우리는 이렇듯 준거점이자 출발점, 근원이 되어 줄 자리를 염원하지만, 그런 자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 세상은 당신을 위해 어떤 공간도 만들지 않았다”고 날마다 위협하는 세계를 통과하는 우리는 이 세계의 질서가 허용하는 자리를 찾아 분주하고, 퍼즐의 빠진 조각이 자신임을 주장하고, 주어진 자리를 통해 규정되고 식별되기를 바랄 뿐 아닌가? 그 사이 이동하는 법도 잊은 채 고정된 자리에 붙박인 존재가 되고 나아가 대체 가능한 노동 상품이 되었을 뿐 아닌가? 모든 순간을 예측할 수 있을 때, 삶의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될지 정해져 있을 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게임을 하고 싶을까? 프랑스 철학자 클레르 마랭의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오늘 세계의 현실과 거기에 놓인 우리의 실존이 겪는 첨예한 딜레마를 가로지르는 질문의 책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바라는 자신의 자리(제자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기에 자리는 질문이 된다. 결여된 것은 과잉으로 존재하며 주어진 자리에서 우리는 늘 흘러넘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와 잘 맞는 세계라는 환상에 머물 때보다 척박한 자리에서 한계 밖으로 흘러넘치는 자신을 자각할 때 실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다시, 우리는 자리의 존재이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존재인 것이다. 자리 옮김의 사유의 거의 모든 측면을 섬세히 다루면서, 위압적인 훈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듯 대화를 제안하는 그녀의 철학적·문학적 에세이가 존재의 자리를 찾는 여행에서 길 잃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독자들의 손에 가닿기를 바란다.
저자

클레르마랭

저자:클레르마랭ClaireMarin
프랑스의철학자,에세이스트,소설가다.그랑제꼴준비반의철학교사이며,파리고등사범학교의협력연구자로도활동중이다.스물다섯살에자가면역질환을진단받았고,그경험을바탕으로질병에대한에세이와소설을썼다.독자개개인에게말을걸어오는듯한그녀의글은평단과대중모두에게서성공을거두었고,특히다양한연령대의여성독자들에게지지를받으며스테디셀러로자리잡았다.마랭의작업은하나의단순한개념에서출발하여사적인영역부터정치적인사안까지삶의다양한문제들을다루는데그과정에서활용하는방대한철학·문학텍스트는사유에선명한구체성과깊이를부여해준다.저서로소설『나를벗어나』(2008),에세이『질병의폭력,삶의폭력』(2008),『질병,내밀한재앙』(2014),『계승』(2018),『우리는무엇이될것인가?』(2018),『단절(들)』(2019),『내몸은정말내것인가?』(2020),『시작:어디서다시시작할것인가?』(2023)등이있다.

역자:황은주
서울대학교철학과를졸업하고동대학원에서철학과불문학을공부했다.현재는영어와프랑스어책을우리말로옮기고있다.옮긴책으로『루소의식물학강의』,『다가올사랑의말들』,『화성과금성의신화』,『자살의연구』(공역),『리스펙토르의시간』등이있다.

목차


제자리라는문제
도마뱀놀이,볕드는자리에서빈둥대기
“모든것이제자리에있고”
탈주하기
한자리에머물지못하는사람들
뿌리내리기
줄어드는삶
공간의시련
왕국없는여왕
제목소리찾기
불손한사람들
침입의논리
자리의곤경
“진정한장소”라는것
욕망의불협화음
표류와흘러넘침
이중생활
내안에자리만들기
안의공간
내몸에깃들어살기
바로여기
일곱가족게임
가지를잘라내기
의자놀이
누락된자리
자리를발명하기
유령들
실향민들
잘못된장소에있다는것
어쩌다있게된곳
철새들
소리의원
자리옮김을사유하기
무엇을위한자리인가?
책의여백에

옮긴이의말

출판사 서평

모든살아있는것들은자리의존재들이다.그런데...

모든살아있는것들은자리의존재들이다.한자리에있으면서도더깊이뿌리내리기위해땅속을파고드는식물도마찬가지고,살아움직이는생명들은그래서위험을무릅쓰고더나은생존의자리를찾아기꺼이이동하기를멈추지않는다.인간도마찬가지다.인간역시유한한몸을지니고있기에공간과장소가필요하지만,인간실존의경우자리는단순한생존의차원그이상의의미를지닌다.사회내존재로서우리는어딘가에서무엇으로자리잡아야하고,더불어영혼을지니고있기에역할과정체성을차지해야한다.“뿌리내림은가장중요하면서도제대로이해되지못하는인간영혼의욕구”라는시몬베유의말처럼,인간은마음깊은곳에실존의깊이와충일을실감할수있는자리에닿고자하는포기할수없는갈망과고뇌를지니고있지만,진정한뿌리내림을위해서뿌리뽑힘을감수하는존재이기도하다.

그런데사회적존재로서우리가맞닥뜨려야할현실은결코녹록치않다.한마디로자리의문제는우리의의지를벗어난것으로느껴지고,선택이아니라운명이고,자산이아니라외부적조건에따라결정되는것으로생각된다.때문에대부분의우리는어릴적부터“제분수를알아야”하고“현재에만족할줄알아야”한다는말을듣고자란다.안그러면지금의자리에서도내침을당하고불행해질테니까.“당신이사는아파트가당신이누구인지를말해준다”는광고문구를삶의격언으로여기는사회에서그래서자리를둘러싼전쟁은현재진행형이고,오늘보다내일이더치열한전쟁터가될것이라는예감이우리의의식을지배하고있는것이현실이아닌가.

자리(장소)는중립적이지도평등하지도않다.인간에게자리는지리적·계층적·사회적·정치적자리이며,위치에따라의식의내면의색조가달라지고부침을거듭한다.그리하여자신이젠더·계급·인종·종교등을이유로배제된다고생각하는사람들은자신에게적대적인사회에서자신의자리를얻기위해맞서싸우기도한다.그러나사회적·정치적제도가바뀐다고해서자리의문제가해결된다고할수없다.정치적유토피아는평등한자리의분배를약속할뿐인간존재의다양한차원에대해이야기하는바는없다.자리가인간의실존과일치한다는생각은환상이고일종의이데올로기일뿐이다.“존재가의식을결정한다”는말은과거에는계급의식을일깨우는언명이었지만이제는자본주의의명제로더빈번히사용된다.앞서의아파트광고처럼.질서정연하고계획된세계에선자리가개개인의인격과가치를온전히반영할수있다는주장은인간존재에대한몰이해이고착각이다.우리는삶이유지되기를바랄뿐아니라삶이영위되기를바란다.어떤자리에있다고해서자신이제자리에있다고느끼지않는다.“제자리에있다”는감각은실존의여러요소가만들어내는일치의음악같은것이어서오로지자신만이알수있다.

우리는반복적이고습관적인자리에안도하면서도동시에그질서에갇힌다는생각으로불안해한다.사회적목록의일원이라는점에안도하면서도,하나의계열에기입된다는것은우리가대체가능하다는의미한다는사실앞에서경악한다.“이세상은당신을위해어떤공간도만들지않았다”고위협하며언제든인간은대체될수있는노동상품이라고대놓고이야기하는현실에서실존의충일함을희구하는제자리찾기는가능할까.

모든순간을예측할수있을때,삶의게임이어떻게플레이될지정해져있을때,그럼에도우리는여전히그게임을하고싶을까?

우리는안정적이고흔들리지않는곳,범할수없는곳,준거점이자출발점,근원이되어줄장소를염원하지만,이런장소들은이세계에처음부터존재하지않는다.우리를기다리는자리,우리에게맞춤한제자리,그런건애초에없다.고정된자리는실상없으며,안정적자리라는환상은끊임없이전치되고응축되기를반복한다.우리를기다리는건사회가설정한분류법에따라할당한자리들이다.모두가“제자리를지켜야”하는“정상적인”세계에는폭력성이내장되어있다.자신만의자리는존재하지않기에자리(공간)는질문이되고의심이된다.우리는이세계의질서에기입되기위해어떤왜곡이필요했을까?어떤부자연스러운연기와책략이필요했을까?우리는자신에게배정된자리에고정되어오그라들고줄어들기를강요받는자신을발견하기시작했을때,더듬거리는실존의굴욕을느끼기시작했을때,모든것이잘맞는세계라는환상에머물때보다냉담하고척박한자리에있을때우리의실존에대해더많은것을배우며그때비로소자리게임의대상이아닌타자들의삶에관심을갖기시작한다.왜어떤사람들은한자리에고정되지않고떠나려하는가?그런의문을가질때우리는스스로를퍼즐의작은조각으로생각했던자신에대한의문이싹튼다.자신의자리에서호흡이불편해지고자신이멜로디속잘못된음표하나,기계장치에끼어든모래알같은존재가아닐까생각하기시작한다.

떠나려는사람들은어렴풋하지만거의육체적인느낌으로더이상그곳에머물수없음을안다.이몸짓은일견잔인한것이지만,그것은존재의이기심을넘어선다.평온함과친숙함속에웅크린채그에안주했던자신으로부터몸을일으키려할때,축소된세계의제한된실존에만족하지않고다른삶의가능성을향해발을내딛으려할때,그는자리옮김이가져올공간의시련들을감수하려하기때문이다.그들은자리옮김이가져올위험을예감한다.그들은표류하고좌초하고,계급횡단자나이주자처럼이중삼중의고립에처하게될지도모른다.하지만누가그속에서길을잃는것을두려워할것인가?어쩌면우리는꿈속에있을때깨어있을때보다더살아있는지도모른다.이동하는법을잊고있었을뿐,우리가자리의존재라는것은이동하는존재라는것을의미한다.끊임없이자신을재전유하기위해서.제자리에있다는느낌을확보하기위해서는행운과끈기,용기가필요할지도모른다.삶의무질서와화해하고받아들일때새로운유쾌한조합과비옥한충돌들을만나게되니말이다.

현실의자리게임의체스판에는우리가놓치는움직임들이있고,말들을쓰러뜨리는돌풍이,말들을쓸어가버리는분노가있다.그러나앞으로,대각선으로,혹은뒤로이동하는자리옮김이없다면게임자체가성립하지않을것이다.마찬가지로우회나갈림길이없다면나도존재하지않는다.“누구나자기안에방을지닌다”고카프카가말했을때,그방(자리)은그자체로이러한내적운동들,일시적인충동,집착의동요와충격을모두담는곳이아닌가?

철학이시작되는자리―끊임없이움직이는과정에서제자리는어떻게발견되는가?

우리는어떤사회적공간에적응하지않고서는제자리를찾을수없지만,그러면서도할당된자리에서는제자리에있다고느끼지못하며,삶을살아가는동안계속자리를바꿔나간다.결국자리의문제는자리옮김의문제인것이다.프랑스철학자클레르마랭의철학에세이『제자리에있다는것』은오늘세계의현실과거기에놓인우리의실존이겪는첨예한딜레마를가로지르는질문의책이면서바로이자리옮김의사유를시작하기위한단서들을우리앞에펼쳐놓는다.첫테마에서부터그녀는정착민과유목민을나누는것은가짜양자택일이라고말한다.뿌리내림과자리옮김은기계적으로분리되거나따로떨어질수있는것이아니라긴장속에서연결되어있기때문이다.존재한다는것은언제나하나의여정이며,머묾도그여정을구성하는정서·사회·지리·정치적기착지일뿐이다.실제로우리는결코같은자리에있을수없다.우리는끊임없이움직이는모래위를걷는존재이며,사이의존재여서언제나두세계사이,두시간성사이,자기자신이되는두가지방식사이에있는지도모른다.철학이존재하고,존재해야하는까닭은바로이사이에있는것은아닐까?인간은표류와전복을겪으면서미지의땅에좌초하는순간에조차도자기자신에대해발견할수있는존재이다.

이세계에온전하게머물수있는나만의자리는존재하는가?끊임없이움직이는과정에서제자리는어떻게발견되는가?우리는영역의논리,소속의논리로구조화된공간안에서도제자리를찾아내야한다.분별있게처신하라고끊임없이요구받을때조차도우리는그러한요구에반하여자신의참된차원을찾기위해안간힘을다해야한다.진정한뿌리내림을위해서뿌리뽑힘을감수하면서.그것이누구의요구도아닌자기내면깊숙한곳에서들려오는존재의요구이기때문에.자신의실존이연주하는일치의음악을듣기위해서,자신의생애와자신이진심으로화해하기위해서,우리는“제자리에있다는것”의의미를사유하는여행부터시작해야한다.그렇다면어디에서부터시작할것인가?‘자리옮김의사유’가지니는거의모든차원―사랑과접촉,관계의문제까지를포함하여―을세심하게검토하고있는이빼어난철학적·문학적에세이가각박한세계에서도자신만의자리를찾기를희구하면서동시에그자리가타자를향해열려있는것이기를바라는독자들의손에닿기를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