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여 (이윤선 시집)

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여 (이윤선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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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한 깊은 시인의 숨결에 묻어나는
삶의 성찰과 인문학적 상상력
이윤선의 이번 시집에는 “고전과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에 깐 우주적 상상력과 초연한 삶의 태도”가 엿보이는 시 63편이 실려 있다. 시인이라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사의 기억에서 출발해 지금껏 살아온 삶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남도의 정서적 숨결과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한 성찰을 고스란히 담았다.

머슴살이 버신 돈으로
깽이 삼도추 돔배 사서 사래 긴 밭 일구실제
단지 송쿠죽 암만 떠 넣으셔도
그라고 배가 고프셨답니다
일자무식 우리 아부지
예순여섯 고부랑 나이에사
씨받이 내 어미 보셔 나를 낳으시곤
내 걸음걸이도 하기 전부터 성화셨답니다
달력이며 거름포대며 종이만 보면 주워 오셔

아무 글자든 쓰거라

_ 〈아무 글자든 쓰거라〉 중에서

출생 내력과 성장 환경이 기구하지만 그가 시 속에서 소환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 등 가족은 결핍이 아닌 애틋함과 그리움의 대상이다. 특히 〈아무 글자든 쓰거라〉를 비롯해 아버지를 대상으로 쓴 시가 8편이나 되는데, 가족사를 결코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자신의 근원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시집에서 가족사 다음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고전의 차용 혹은 인유이다. 고전 민속을 전공한 그답게 고전 시가의 율격과 말투를 충실하게 따르며 탄탄한 기본기를 드러낸다. 예스러운 한계를 지니지만, 전통적 정서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특히 ‘진도’라는 남도의 문화적 원형이 살아 있는 지역 환경에서 성장하며 그 문화적 자질을 습득한 이윤선은 진도의 소리, 설화, 사투리 등을 형상화한 시편도 다수 소개했다.
이윤선이 시로 풀어내고 있는 남도의 설화는 주로 ‘섬’에 집중돼 있다. 〈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 는 고향 진도의 부속 섬들의 탄생 설화를 자세히 들려주면서 자신도 마지막엔 그 근원으로 돌아가 섬이 되고 싶은 소망을 드러낸다.


세상의 모든 해 받아 안는 낙조의 땅
어느새 솟대새들 무리지어 음(陰)의 정점 태궁으로 오르는 시간이다
애통할 필요 있겠는가, 그저 붉은 노을 실려 그윽하게 스며들 수 있다면
언제였던가 아득한 꿈결 같은 구백아흔아홉째 날
오늘이 그날이다 매혹의 장엄 위에 몸 산산이 뿌릴
나는 비로소 북새의 유혹받아 섬이 된다

_ 〈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 중에서

‘낙조의 땅’ 진도 셋방에서 ‘세상의 모든 해’가 빠져 죽듯이, 천일기도를 완수하지 못해 천지신명으로부터 노여움을 받은 수도승의 몸이 벼락을 맞아 산산조각이 나서 섬이 되었듯이, 자신도 ‘북새의 유혹’을 받아 섬이 될 수 있다면 애통할 필요가 없다는 삶의 자세, 이른바 물아일체ㆍ자연합일의 서정적 세계관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천지개벽과 만물 생성의 이치를 노래한 〈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여〉, 〈마당밟이〉, 〈비로서〉, 〈윤슬〉, 〈가을 북새〉 등 창세 신화, 주역, 노장사상 등 인문학적 지식과 무속신앙 등 종교적 지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시편들에서도 광대무변하고 심원한 시의 넓이와 깊이를 알 수 있다.
우주의 순환과 조화의 원리를 노래하는 시 면면에서, 신의도 의리도 저버리고 제 이익을 위한 변신을 일삼는 자들이 판치는 작금의 세상에서 진실한 선비의 길이요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 예인의 길을 가는 시인의 삶이 오버랩 된다.
이 같은 내용의 시 비평은 목포대 교수이자 시인 김선태의 해설로 권말에 수록됐다.
저자

이윤선

민속학자이자판소리와무가등남도소리에도밝은예인이다.2020년단편소설「바람의집」으로목포문학상을수상,문단에데뷔했다.『그윽이내몸에이르신이여』는그의첫시집으로,남도문화의숨결을오롯이담고있으며고전의맛을계승한시편을구현했다는평을받고있다.
민속학자로서남도를비롯한우리나라문화와아시아도서해양문화권을비교하는연구로학계의주목을받고있다.『한국인은도깨비와함께산다』『산자와죽은자를위한축제』등의저서가있다.

목차

1부함께앉았던그때처럼

아무글자든쓰거라/불일암고목/고목에대한명상/그윽이내몸에이르신이여/벙어리바람/
늦감자를캐며/해와달이된어미/산누에나방/아버지/감자엿/돼지감자/가을북새/
눈아니내린겨울/눈길/띠루리리띠루리리/빨랫줄/뚜부/가을마당에서서

2부안단테,안단테

귄/계면조서설/겨울맹감/화전을부치며/안단테/영산강/마당밟이/콩대를태우며/달래무침/관채형집에들르다/안개비/춤을추자카나리아다마타/막걸리따르는법/비로서/옥잠화

3부어느숲의목청높던노래들

꼬까비/매미의사랑/동백/연리목사랑/땅속의봄/낙엽아래서/진도홍주따르는법/꼭두닭/봄날/명발당에서/증심사(證心寺)에올라/예찬(倪瓚)의족자를걸며/초록바위/차씨를심으며/
운주사불사바위/운흥의가을/거름포대기에쓴유서

4부바다끝에들다

섬/윤슬/적금도밥무덤/갯벌/자운토방에서/안개/내삶의마지막여행지/유달산목란마을/
비양도의여름/가거도/새벽그믐달/아침/동짓달에/

해설|고전의계승과남도문화의숨결_김선태

출판사 서평

남도문화의숨결과고전계승을담은
토속적시편들

민속학자이자,판소리와무가를구성지게풀어낼줄아는소리꾼이윤선의첫시집이다.
진도출신으로서성장과정에서남도의원형적삶을직접체험하고그문화를몸으로지니고있는그는,남도의인적문화적자산으로서도소중한가치가있다.이시집에서가장도드라지는특징역시전라남도방언의적극적인활용을통해남도정서와문화적숨결을잘드러낸것을들수있다.남도가락,설화와전설,시가등고전을차용또는인유한시편들을많이선보이는데,이는전통적정서를현대적으로계승하려는의도로읽힌다.
시인송기원은특히이윤선의근원적기억에해당하는가족사가드러난시편들에대해“일자무식으로평생을살아낸늙은아버지와일찍이홀로되어세남매를거느리고선창의주모노릇을하다가씨받이까지된어머니,그씨를받아금이야옥이야소중하게길러낸큰어머니,배다른누이들이며뼈다른형들까지,시에나오는이들모두가나에게는하늘에서쫓겨온적선(謫仙)들이며그이들이만든신화였다”며‘들판에숨은야생화같다’고언급,시인의진솔성을높이평가하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