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마음가짐

저녁의 마음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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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무한을 향해 유한을 끌고 가는 삶-말/말-삶의 기록
지난해 10년 만에 여섯 번째 개인 신작 시집 『이 격렬한 유한 속에서』를 펴낸 박용하 시인이 이번에는 불과 1년 만에 신작 시집 『저녁의 마음가짐』을 냈다. 달아실시선 62번째 시집으로 나왔다.

박용하 시인이 불과 1년 만에 다시 신작 시집을 내놓은/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시인의 말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사람처럼 이 삶의 여름은 지나갔다. 무한정 살 수 없는 삶을 이 시간에 세워 놓고 지나가는 가을 오후의 내 그림자를 재본다. 여전히 삶은 코앞에 있고 비애와 분노는 발바닥 밑에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세계의 아름다움도 피부에 낭자하다. 다 사랑할 수는 없으리. 다 노래할 수는 없으리. 나는 시를 멈춘 적이 없었다. 시는 나의 언어였고 언어는 나의 일이었다.”
저자

박용하

시인박용하는1989년『문예중앙』을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으로『나무들은폭포처럼타오른다』(『26세를위한여섯개의묵시』로증보하여재출간),『바다로가는서른세번째길』,『영혼의북쪽』,『견자』,『한남자』,『이격렬한유한속에서』,『저녁의마음가짐』이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삶의방식
사랑의순간
남아있는날들
걸을수있을때까지
해안
거짓말에게
거짓말앞에서
여름과가을
시간의계절
생활의방식
자유
글에관한추억
조용히

2부.둔도鈍刀의미학
티타임
지금에게
전언


나는그때

그곳은그런곳이다
나는
5월23일
저녁
검명劍名

3부.나뭇잎하나지는시간
영嶺의동쪽
바다
달의뒤편
추우야정秋雨夜情
울프생각
평범한날들
인간에게
적설
삼월야三月夜
회한
결별
남아있는세계
사람에게
춘우야정春雨夜情

시인의산문_파도

출판사 서평

박용하의이번시집은평론가의해설대신시인자신의산문을실었고,특히시집에실린편수가38편밖에되지않는다.〈1부.삶의방식〉에12편,〈2부.둔도(鈍刀)의미학〉에12편,〈3부.나뭇잎하나지는시간〉에14편을싣고있다.일반시집이대개60편에서70편을싣는것과비교하면무척적은양이라할수있다.이런형식적인면에서도이번박용하의시집은일반적인시집과결을달리하고있다.이에대해서박용하는이렇게얘기하고있다.

“내시에빛을더하고피를돌게할수있는해설을쓸평론가가없는건아니나그들이쓴다는보장이없고섭외하는것도일이고해서오래전부터내산문이들어간시집을내야겠다맘먹고있었다.이렇게말하는게어떨지모르겠으나내시의원석은내산문속에들어있다고봐도된다.시집편수는60여편으로묶을수도있었다.편수가중요한게아니고개별작품의힘이중요하다고판단해언어의힘(삶의힘)이떨어진다고느낀작품들을과감하게빼다보니38편이되었다.시집의질에연연해도편수에는연연해하지않게되었다.”


이제돌아오지않으리라
그아름답고좋았던시간의계절은
그짧고도길었던여름밤의환희는
그때그숨소리와입김,목소리와피부의다정함은

그좋았고아름다웠던시간을두고
우리는각자의미래로떠나갔다

세상사를잊게했던밀회의순간을두고
일상으로파묻혔다
일상에항복했다
-「시간의계절」부분


속이는자들이날로커간다
속는자들도날로커간다
그만속아야지하는중에도
갑이을을불러내듯
큰거짓말이작은거짓말을불러낸다

거짓말은마스크처럼가까이있고
마스크없이도극성이고

거짓말앞에서
내가싫었던날은
무기로해결해야할일을말로해결하려했던날

아직도거짓말을대하는기술이부족하다
거짓말을대하는응징의방법이저렴하다
-「거짓말앞에서」부분


나는
오랫동안
나의다른이름이
폭력이라는걸몰랐던사람

어느날의나는
비겁한마리
분노한폭탄
슬픔소굴

어느날의나는한없이부끄러운마음으로
의자위에바위얼굴로놓여있었지

어느날의나는나말고는아무도쳐다보지않던
내눈물을개처럼핥고있었지

나는
나를구한역무원들의노래

나는
하늘말고는아무도덮어주지않던죽음
-「나는」부분


자유는늘가까이있어.구강과성기근처,변기만큼이나신발장만큼이나건빵바지에들어있는휴대폰이나개집만큼가까이있지.

내뇌와입과행동이어디서왔는지,우리의언어가어디서왔는지,자유는묻고또묻는다.화폐만큼무기만큼밥한끼만큼가까이있는자유.

그대가자유하다면부자유하리.나는부자유를먹고또먹는다.나는부자유를활강한다.
-「자유」부분


말이우리를갖고논다
우리는갖고놀지도못하던그말을
그들은아무렇지도않게갖고논다
갖고놀기의선수들
말돌리기의명수들
무죄책의달인과무자책의9단들
그런그들이우리를갖고논다
우리가몸저리며마음아꼈던그말을
그들은아무렇지도않게굴린다
그들이잘갖고논다는국민들과
국민이라는이름의신민들과
어불과성설과함께
지극히민주적이지않은민주시민들과
부패주민들과함께
나였던적이없었던우리를부리듯이국가를갖고논다
갖고놀기의기계들앞에서
갖고놀말이없어서
우리는겨우글로만난다
몇년에한번글로만난다
그들이아무렇지도않게우리를갖고놀때
우리는팔았다
우리의양심을
우리가지켜야할고통과노래까지팔았다

말이우리를갖고논다
심지어그들의말이그들의얼굴을갖고논다
우리는맘껏갖고놀지도못하던그간사한얼굴을
그들은가볍게갖고논다
갖고놀다싫증나면금방버린다
갖고놀다버리기의선수들
단물빨고빠지기의명수들
그런그들이우리를갖고버젓이농락할때
우리는인간이아니었다
우리는피부를뒤집어쓴부품이었다
그들이말을갖고파티를열때
얼굴을갖고놀지못하도록
그들의심장을파냈어야했다
우리가지은죄는
그들을끝까지의심하지않은죄
나자신을의심하지않은죄
그들이말을갖고한사회를유린하려들때
우리는그들이인간인줄알았던것처럼
우리도인간인줄알았다

말이죽음을갖고논다
우리는돌울음
우리는자라나는질문
-「글에관한추억」전문


일상이무너지면많은게무너진다
거의다무너진다
일상같은거그러며우습게지내던날들도엊그젠데
그걸아는지모르는지우리는오가고
생활이라는아름답고도처절한말과함께또하루를살아간다
내가없어도세상은잘돌아갈것이다
그러나나없는세상이무슨소용인가
그대가없어도세상은잘돌아갈것이다
그러나그대없는세상이또무슨소용인가
서있는울부짖음과뛰어가는환희와함께
돌아올수없는몸냄새와함께시간이날아간다
평범이무너질때비범도함께무너진다

어진사람이사는곳이명당이라는데
많은사람들이지나가고없다
-「평범한날들」전문


시인심재상은이번시집에대해이렇게얘기하고있다.

인간박용하,시인박용하가절대로양보하지않아온것,절대로포기하려하지않는것은무엇보다도정직함이다.절제를용납하지않는날것의언어로용서할수없는세계전체와총체적으로맞서온막무가내의젊은시절에도그랬고,이미저녁을예감하는중년의나이에‘일상’이라는‘이격렬한유한’과처절하게몸싸움하는요즘에도그렇다.치열함도여전하다.달라진것은언어의강도가아니라시선의깊이,성찰의깊이다.“우리는돌울음/우리는자라나는질문.”
점프컷으로잘라낼수도없고2배속으로건너뛸수도없는일상,리얼타임으로,몸으로,온몸으로살아낼수있을뿐인일상,안팎이없으니(폭력도거짓말도이미그의일부다)출구도없고,과거도미래도없으니(말이삶을희롱하고죽음을갖고노는세상)끝없이현재진행형으로되돌아오는일상의매순간,바로‘지금’그리고바로‘여기’---이시집은‘절대군주’로군림하며우리에게한없는슬픔과회한과치욕감과비애를안겨주는바로그일상,‘생활이라는아름답고도처절한’시공간을지옥처럼뜨겁고죽음처럼강렬한삶의용광로로,그의시학의궁극이라고해도좋을‘유한속의무한’이온전히구현되는우주적자궁으로바꾸어나가는실천적인삶-말/말-삶의기록이다.뜨거운의지적상승의힘보다나직하고고요한하강적역동성이그의시들을주도적으로이끌어가는것도그때문일것이고,“나무가불을물펌프질한다”고소리높이외치던그가이제뛰어내림과굴러떨어짐을온몸으로끌어안고“나는부자유를활강한다”고담백하게말할수있는것도그때문일것이다.그렇게“시간을떨구며/공중을적시는밤빗소리희다”같은열렬하면서도그윽한아름다운시행들이이세상에태어났을것이다.

시인으로이세상에처음자신의시를들이밀때부터지금까지시인박용하는끝끝내세상과불화하였고끝끝내그럴것이다.시인이라는아트만(Atman)으로서박용하가짊어진숙명이고업(業,카르마)인까닭이다.

누누이말하지만유한의세계를독보적인언어로들이박으면서무한의세계로나아가려는박용하의시집을읽는다는것은쉬운일이아니다.박용하의시집을읽는다는것은끝끝내숨기고싶은부끄럽고추악한자신의내면을들여다보는일이기때문이다.하지만그것이야말로우리가그의시를끝끝내읽어야하는까닭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