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저녁 - 달아실시선 65

환한 저녁 - 달아실시선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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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안개 도시의 안개 언어
- 유기택 시집 『환한 저녁』

춘천의 가장 깊숙한 곳, 소양댐 아래 샘밭이라는 작은 마을에 자칭 ‘춘천이 기른 시 노동자’ 유기택 시인이 산다. 쉰세 살에 첫 시집 『둥근 집』(2012)을 낸 이래 십 년 동안 농사를 짓듯 주경야독 시를 지었고 일곱 권의 시집을 수확했다. 그리고 이번에 여덟 번째 시집 『환한 저녁』을 수확했다며 세상에 내어놓았다. 달아실시선 65번째 시집이다.

시인 유기택은 처음 시농사를 지으면서부터 지금까지 자기만의 시농법을 고집한다. 그 결과 그의 시 저변에는 유기택만의 서정이 흐르는데, 그것은 바로 “유순(柔順)”이다. 유기택의 시적 정서는 유(柔)함과 순(順)함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이번 시집도 크게 벗어나진 않으면서 춘천이라는 안개 도시의 안개 언어를 풀어내고 있다.

시인 박제영은 유기택 시인을 이렇게 얘기한다.

“그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산다. 그는 너스레와 고수레 사이, 몽니와 몽리蒙利 사이, 맷돌과 어처구니 사이, 창과 방패 사이, 칡나무와 등나무 사이, 삵과 고양이 사이, 낭狼과 패狽 사이, 유와 류 사이, 엠마누엘과 칸트 사이, 는개와 안개 사이, 삭朔과 망望 사이, 밀물과 썰물 사이, 비굴과 굴비 사이, 침과 시치미 사이, 블랙홀과 화이트홀 사이, 망원경과 현미경 사이, 돌과 달 사이, 허무와 맹랑 사이, 23쪽과 24쪽 사이, 샘과 밭 사이에 산다. 물론 정황증거일 뿐 물증은 없다. 공개수배를 해도 그를 찾기란 바늘구멍에 낙타 들어가기다. 그가 세상을 어지럽힐 위조 시집을 여러 권 냈다는 소문만 파다하다.”(「존 말코비치 되기 혹은 노바디 - 시인 유기택」)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오민석 단국대 교수는 이번 시집을 “안개 도시의 안개 언어”라 함축하며 이렇게 평한다.

“누가 뭐래도 유기택은 춘천의 시인이다. 그의 시선은 물에서 안개로, 안개 속으로 흐려지거나 사라지는 것들의 뒷모습을 향해 있다. 호반의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 사물과 사람, 물과 산, 산과 하늘의 경계가 흐려지듯, 그는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범주들이 지워지는 것을 응시한다. 사물들은 한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고 자신의 일부 혹은 전부를 지우면서 사라지거나 다른 것이 된다. 안개는 사물들의 그런 자기-이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치이다. 세계는 이미, 항상 안개로 뒤덮여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호반의 안개는 실물로 세계의 그런 속성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유기택에게 안개는 세계의 알레고리이다.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춘천의 자연을 경험하고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알 수 없다. 경계가 흐려질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 하나는 속성의 사라짐이고, 다른 하나는 속성의 확장이다. 사라짐과 확장은 동시에 일어난다. (죽은 은유이지만) 비둘기가 사라지면서 비둘기는 평화의 알레고리가 된다. 그때 사라짐은 정확히 말해 사라짐이 아니라 변용이자 확장이다. 세계는 사물들의 이런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사라짐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은 형태변용metamorphosis의 다른 이름이고, 모든 존재는 변용을 통해 다른 것으로 확장된다.”

꽃이 피는 동안

네가 웃는 동안

눈물 한 방울 굴러떨어지는 동안
하늘 환해지는 그동안

빗물 걷히는 동안

아무 일 없이
네가 웃는 동안
- 「금어기禁語期」 전문

“‘동안’은 ‘즈음’처럼 과정의 시간이고 비결정의 시간이다. ‘동안’은 여기에서 저기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가거나 오거나 하는 시간이고, 무엇-되기의 시간이며,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으므로, 변용, 생성의 시간이다. 시인은 명쾌한 것, 환하게 밝은 것, 규정되고 결정된 것, 딱딱해서 바뀌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시인의 취향이라기보다는 세계관이다. 시인이 볼 때, 세계는 규정할 수 없으며, 규정한다고 해서 규정되지 않는다. 세계는 한순간도 멈춰 있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으로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세계는 항상 어떤 ‘동안’의 계기 속에 있다. 안개는 그런 ‘동안’과 ‘즈음’과 ‘과정’의 크로노토프chronotope이다. 이 시집은 ‘이미 앎’의 허위를 까발리고 ‘아직 모름’의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거기에 호기심과 기대와 설렘과 생명의 언어가 있다.”

이번 시집에 대해 시인 자신은 “환했다. 너무 환했다. 세상의 저녁은, 다 알겠다는 말보다 조금 더 환했다. 딱, 살고 싶은 만큼 어두웠다. 손이 조금 떨렸다. 용서하시라. 환했다.”(「시인의 말」)고 얘기한다.

안개 속에서 시인은 “환하다는 말이 왜 희망적이지 않은가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다가 “비었다는 말과 환하다는 말이” 같은 말인 것을 깨닫고는 “더는 그런 것을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환한 저녁」)고 한다.

춘천은 안개 도시다. 적어도 시집 『환한 저녁』에 등장하는 춘천은 그런 도시다. 그리고 그 안개 도시를 살아내야 하는 일은 마침내 텅 빈 쓸쓸함, 환한 저녁을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시인은 쓸쓸하게 그러나 덤덤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은 온통 안개 도시 춘천이겠다. 세상을 살아내는 일이 결국 환한 저녁을 견디는 일이겠다.
저자

유기택

시인유기택은강원도인제에서태어나춘천에서자랐다.일용직시노동자생활을전전하며묶은시집으로『둥근집』,『긴시』,『참먼말』,『짱돌』,『호주머니속명랑』,『사는게다시지』,『검은봉다리』,전자시집『제제봄이야』등이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치명致命|청둥오리들|부우?右|눈소식|가시고기|겨울안개속에서|통증|고양이|어떤,봄날의노동|잘|굴뚝새|“동백”이라는시|타이가검은숲에뜬달|놀람교향곡,봄눈|어느절집,버들붕어이야기

2부
기억의풍경|신문지가문젤세|웃기는짬뽕사발들|수청골한담閑談|슬픔의독법|포착捕捉|눈감으러가는길|어떤L의봄에대한생각|메시지|사이렌|봄날|세월이가면|달과목련과고양이|벽화|사자자리여자,양자리남자

3부
오른손의오래된풍경|마당편지|목숨|마이미스트|마리오네트K|나무사원의일요일|슬픔의본색|뭐|소풍|찌르레기|가릉빈가迦陵頻伽|유월|금어기禁語期|이놈의사랑|환한저녁

4부
바로|지나가는비|용감한사람들|외벽등|해뜨는집|울음의기하幾何|그리운것들은어디서죽나|먼지버섯|해바라기여행자|조용히,너무조용히|똥똥한물까마귀씨네,동네이야기|여름이막간다,얘!|시그널|Oh,SummerWine|그래

해설_안개도시의안개언어.오민석

출판사 서평

시인박제영은유기택시인을이렇게얘기한다.“그는개와늑대의시간에산다.그는너스레와고수레사이,몽니와몽리蒙利사이,맷돌과어처구니사이,창과방패사이,칡나무와등나무사이,삵과고양이사이,낭狼과패狽사이,유와류사이,엠마누엘과칸트사이,는개와안개사이,삭朔과망望사이,밀물과썰물사이,비굴과굴비사이,침과시치미사이,블랙홀과화이트홀사이,망원경과현미경사이,돌과달사이,허무와맹랑사이,23쪽과24쪽사이,샘과밭사이에산다.물론정황증거일뿐물증은없다.공개수배를해도그를찾기란바늘구멍에낙타들어가기다.그가세상을어지럽힐위조시집을여러권냈다는소문만파다하다.”(「존말코비치되기혹은노바디―시인유기택」)

시인이자문학평론가인오민석단국대교수는이번시집을“안개도시의안개언어”라함축하며이렇게평한다.“누가뭐래도유기택은춘천의시인이다.그의시선은물에서안개로,안개속으로흐려지거나사라지는것들의뒷모습을향해있다.호반의물안개가피어오를때사물과사람,물과산,산과하늘의경계가흐려지듯,그는세계를구성하는다양한범주들이지워지는것을응시한다.사물들은한순간도멈추어있지않고자신의일부혹은전부를지우면서사라지거나다른것이된다.안개는사물들의그런자기-이별을가장잘보여주는장치이다.세계는이미,항상안개로뒤덮여있으나사람들이그것을보지못할뿐이다.호반의안개는실물로세계의그런속성을설명한다.그러므로유기택에게안개는세계의알레고리이다.그가오랜시간에걸쳐춘천의자연을경험하고그런생각을갖게되었는지,아니면그반대인지는알수없다.경계가흐려질때두가지일이일어난다.그하나는속성의사라짐이고,다른하나는속성의확장이다.사라짐과확장은동시에일어난다.(죽은은유이지만)비둘기가사라지면서비둘기는평화의알레고리가된다.그때사라짐은정확히말해사라짐이아니라변용이자확장이다.세계는사물들의이런운동으로가득차있다.심지어죽음조차도사라짐으로끝나지않는다.죽음은형태변용metamorphosis의다른이름이고,모든존재는변용을통해다른것으로확장된다.”

꽃이피는동안

네가웃는동안

눈물한방울굴러떨어지는동안
하늘환해지는그동안

빗물걷히는동안

아무일없이
네가웃는동안
―「금어기禁語期」전문

“‘동안’은‘즈음’처럼과정의시간이고비결정의시간이다.‘동안’은여기에서저기로,이것에서저것으로,가거나오거나하는시간이고,무엇-되기의시간이며,아직아무것도결정된것이없으므로,변용,생성의시간이다.시인은명쾌한것,환하게밝은것,규정되고결정된것,딱딱해서바뀌지않는것을좋아하지않는다.‘좋아하지않는다’고말했지만,사실이것은시인의취향이라기보다는세계관이다.시인이볼때,세계는규정할수없으며,규정한다고해서규정되지않는다.세계는한순간도멈춰있지않으며다른어떤것으로끊임없이변하고있다.세계는항상어떤‘동안’의계기속에있다.안개는그런‘동안’과‘즈음’과‘과정’의크로노토프chronotope이다.이시집은‘이미앎’의허위를까발리고‘아직모름’의안개속으로걸어들어간다.거기에호기심과기대와설렘과생명의언어가있다.”

이번시집에대해시인자신은“환했다.너무환했다.세상의저녁은,다알겠다는말보다조금더환했다.딱,살고싶은만큼어두웠다.손이조금떨렸다.용서하시라.환했다.”(「시인의말」)고얘기한다.안개속에서시인은“환하다는말이왜희망적이지않은가에대하여골똘”히생각하다가“비었다는말과환하다는말이”같은말인것을깨닫고는“더는그런것을궁금해하지않기로했다”(「환한저녁」)고한다.

춘천은안개도시다.적어도시집『환한저녁』에등장하는춘천은그런도시다.그리고그안개도시를살아내야하는일은마침내텅빈쓸쓸함,환한저녁을견디는일이라는것을시인은쓸쓸하게그러나덤덤하게그려내고있다.그렇다면,세상은온통안개도시춘천이겠다.세상을살아내는일이결국환한저녁을견디는일이겠다.

■시인의말

환했다.
너무환했다.
세상의저녁은,다알겠다는말보다조금더환했다.
딱,살고싶은만큼어두웠다.

손이조금떨렸다.
용서하시라.
환했다.

2023년
유기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