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기관 - 달아실 기획시집 26

흔적 기관 - 달아실 기획시집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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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혼자 태어나고 혼자 자라나는 스무 살들에게 바치는 헌사
- 김진솔 시집 『흔적 기관』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인 스물세 살의 젊은 시인 김진솔이 두 번째 시집 『흔적 기관』을 펴냈다. 달아실기획시집 26번으로 나왔다.

김진솔 시인에게 이번 시집의 집필 동기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그리고 향후 계획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저만의 언어로 쓰려고 최선을 다했고, 그 뒤로는 모르는 이의 시선을 빌려 그것들을 오래 읽었습니다. 스스로의 첫 독자가 되는 일은 아주 많이 부끄러웠고 가끔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어요. 쓰고 읽고 다듬기를 반복하며 완성된 마흔 편 가까이 되는 시들을 ‘흔적 기관’이라는 이름 아래 묶어 세상에 보이면서 가장 먼저, 이게 제 세계입니다, 하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시를 어떻게 사랑해 왔는지, 제 세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소하고 또 거대한 충돌들이 일어나왔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시의 몸을 입고 태어나는지 같은 것들을 담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충돌과 갈등의 언어를 도구로 삼아 시를 쓰지만 그럼에도 저의 세계가 사랑을 연료 삼아 굴러간다고 믿어요. 제가 아직 부족한 것을 알기에 그 마음이 읽는 이에게 온전히 전해질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저 나름대로는 사랑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아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정말 기쁘고 반가울 것 같아요.”

“저는 고작 스물 몇 해를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먼 훗날 『흔적 기관』을 읽거나, 이맘때 썼던 혹은 말했던 제 시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시 듣게 된다면 분명히 아주 많이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쓸 겁니다. 한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늘 담벼락 너머를 흘끔거리고 싶습니다. 스스로를 끝없이 부끄러워할 수 있단 건 끝없이 커지고 넓어지는 사람의 특권 아닐까 하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거창한 계획은 없습니다. 『흔적 기관』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로 열심히 살면서 치열하게 쓰겠습니다.”

인터뷰에서 김진솔 시인은 자신을 끝없이 낮추었지만, 해설을 쓴 오민석 교수는 이번 시집을 높게 평가했다. 오 교수는 이번 시집을 “타나토스, 죽음 혹은 세계의 끝에 대한 사유”라고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김진솔은 왜 그리 멀리 갈까. 그녀는 왜 에로스 너머 혹은 에로스 내부의 타나토스에 주목할까. 그녀는 왜 절단되고 끊어지고 잘라내는 것들의 실존을 응시할까. 이 시집엔 왜 그렇게 많은 죽음이 출몰할까. 존재의 시초, 탄생, 기원을 빈번히 사유하면서도 왜 그녀의 시선은 항상 세계의 끝에 가 있을까. 이 시집을 읽으며 나는 내내 이런 질문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모리스 블랑쇼에게서 찾았다.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결여이다.’ 블랑쇼가 말하는 ‘존재의 결여’는 ‘삶을 쇠퇴시키고 포착하기 힘든 무참한 금단으로부터 나오는 절규로밖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 살아 있는 결여’이다. 블랑쇼의 말마따나 존재는 존재에 이르기 전에 이미 존재를 결여한다. 존재는 단 한 번도 존재가 된 적이 없다. 존재는 오로지 존재의 결여로 살아 있다.”


붉은 원

그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긴 울음이 있다
주제를 모르는 피조물들을 전부 없애고 새로 지으라는 계시
거대한 몸체는 천천히 뒤집힌다 흰 배가 열리고
꿀럭이며 퍼져 나가는 저주

이제 잡혀 죽는 것은 너희일 거야,
그 목소리를 따라

물로 된 장벽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검게 반들거리는 비늘과 아가미의 군대가
파도를 앞질러 터지듯 쏟아지니 비로소 전복의 순간

손쉽게 사냥당하던 목숨들이
붕괴되는 수평선을 뒤로하고 전진하는 광경
이제야 공평하다

뒤집히는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
성문을 열어젖히듯 두 팔을 벌린다 이제 전부 쓸려가고

나도 왔던 곳으로 돌아가리라
물로 뒤덮인 세계에서 작살은 속도를 잃을 것이다
- 「고래 사냥」 부분


“시집의 맨 처음에 배치한 이 시는 이번 시집 전체의 큰 그림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세계의 가장 먼 외곽에서 세계로 밀고 들어오는 신의 존재 혹은 신의 강력한 힘을 항상 의식하고 있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 신-의식이라 한다면, 김진솔은 항상 신-의식의 상태에 있다고 해도 된다. 이런 신-의식의 모티프들은 그러나 시인에게 존경과 숭배의 대상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삶과 세계의 가장 큰 외곽에서 당위와 정언명령의 형태로 다가오는 거대한 힘들이다. 이 힘은 항상 피조물들, 즉 결여로서의 존재들을 향하고 있다. 이 거대한 힘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결여-존재들은 항상 죽음의 문턱에 있다. 죽음이야말로 결여-존재들의 삶에 항구적인 배경이 된다. 그러므로 시인의 존재-물음은 죽음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고, 죽음충동(타나토스)에 대한 자의식일 수밖에 없다. 위 작품의 ‘고래’는 그런 운명의 ‘사냥’에 저항(역행)하는 결여-존재의 거대한 몸이다. 결여가 현전을 향해 거는 이 싸움이야말로 신화를 거꾸로 돌리려는 전복의 상상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김진솔의 시집은 분명하게도 절대적인 진리, 통합된 주체, 투명한 매체로서의 언어 개념 모두를 의심하는 반(反)형이상학의 자리에 서 있다. 시인은 그 프레임의 먼 외곽에 신을, 그리고 신으로부터 잘려 나간 주체를 그 반대편에 배치한다.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전쟁은 치열하고, 끔찍하고, 아프다. 그러나 시인은 그 사유의 어떤 파편들도 함부로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 시집을 편집한 박제영 시인은 이렇게 얘기한다.

“밀레니엄 버그로 인류가 멸망할 듯 야단법석이었던 이십세기 마지막 해에 태어난 그의 문장은 계율을 깬 사제의 번민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파계한 비구니이거나 수녀일지도 모른다는 선입견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문장을 수선하려면 먼저 문장에 깊게 배인 파계의 얼룩을 지워야 한다고 하자 자기도 그것 때문에 수선을 맡긴 것이라 했다. 얼룩을 지우고 나자 조금씩 드러나는 스무 살의 문장들. 스무 살이 목도하고 있는 물과 불과 모래바람으로 뒤덮인 황야, 혼돈과 아수라의 세계. 정수리부터 붕괴된, 파편으로 흩어진 산산 조각난 세계. 부모를 버리고 새로 조합된 새빨간 참말로 무장한 아이들의 세계. 헛소리와 헛소리와 헛소리가 뭉친 네버랜드. 세기말적인 풍경들. 그리고 마침내 살려달라는 단말마의 비명. 그랬다. 스무 살이 묵도하고 있는 지금의 세상은 그런 풍경이었다.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혼자 태어나고 혼자 자라나는 스무 살들에게 바치는 헌사일 텐데 귀먹고 눈먼 어른들은 결코 볼 수 없겠다.”

김진솔 시인은 이제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를 넘겼다. 그런 그가 보여주고 있는 시세계는 사뭇 깊고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적나라하기 그지없다. 그가 자신의 시세계를 어디까지 넓히고 얼마나 깊이 내려갈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또 얼마나 더 정치해지고 정교해질지 벌써부터 설레고 궁금하다. 어느 분야든 뛰어난 신인의 등장은 언제나 반갑고 즐거운 일이다.
저자

김진솔

시인김진솔은2000년경기도광명에서태어났다.현재경북대학교국어국문학과에재학중이고경북대학교국어국문학과시창작학회〈한비〉회원으로활동하고있다.2020년주머니시프로젝트〈이러다살겠어요〉에참여하였고,시집으로『꿈을필사하다』와공동시집으로『내시선에는한꺼풀의우울이있다』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나는허공의황야와저바다가입맞추어낳은숨
고래사냥|위령제|무덤꽃|둔갑의정원|입석|흔적기관|잘린혀의미식가들을위한송가|전지구적호흡법

2부.세계의파편을주워모은다도로붙일수있는것처럼
접목|우리친구유리컵이잠들었도다그러나내가깨우러가노라|추수감사주일|이십일세기천지창조|탕아의밤|다비드

3부.자주깨물어피가나는곳이나의급소입니다
이제나에게남은것은껍데기뿐이다|미각상실|고드름이열리는호숫가에서|시한탄|어떤양육|소등|네버랜드|부두에서|거짓말운동회|내가물위를걸어야|기형생존|짝꿍|해바라기

4부.사랑을발음하면넌나모르는곳으로사라질것같아
심장의모양을사랑의증표로처음쓴사람에대하여|금단|방주|십일조|요단|탯줄|철길위의사랑|숨바꼭질|동트는수수밭|깜빡깜빡

해설_타나토스,죽음혹은세계의끝에대한사유|오민석

출판사 서평

혼자태어나고혼자자라나는스무살들에게바치는헌사
―김진솔시집『흔적기관』

경북대학교국어국문학과에재학중인스물세살의젊은시인김진솔이두번째시집『흔적기관』을펴냈다.달아실기획시집26번으로나왔다.

김진솔시인에게이번시집의집필동기와독자들에게전하고싶은메시지그리고향후계획을묻자이렇게답했다.

“저만의언어로쓰려고최선을다했고,그뒤로는모르는이의시선을빌려그것들을오래읽었습니다.스스로의첫독자가되는일은아주많이부끄러웠고가끔괴로웠지만그럼에도불구하고행복했어요.쓰고읽고다듬기를반복하며완성된마흔편가까이되는시들을‘흔적기관’이라는이름아래묶어세상에보이면서가장먼저,이게제세계입니다,하고말하고싶었습니다.제가시를어떻게사랑해왔는지,제세계안에서얼마나많은사소하고또거대한충돌들이일어나왔는지,또그것이어떻게시의몸을입고태어나는지같은것들을담고싶었다고말입니다.”

“처음부터끝까지사랑하는마음으로썼습니다.충돌과갈등의언어를도구로삼아시를쓰지만그럼에도저의세계가사랑을연료삼아굴러간다고믿어요.제가아직부족한것을알기에그마음이읽는이에게온전히전해질지가늠하기어렵지만,저나름대로는사랑의세계로통하는문을열어두기위해최선을다했습니다.조심스럽게발을들여놓아주시는분이계신다면정말기쁘고반가울것같아요.”

“저는고작스물몇해를살아왔습니다.그러므로아주먼훗날『흔적기관』을읽거나,이맘때썼던혹은말했던제시에관한이야기들을다시듣게된다면분명히아주많이부끄러워질것입니다.그러나계속쓸겁니다.한세계에머무르지않고그너머로나아가기위해늘담벼락너머를흘끔거리고싶습니다.스스로를끝없이부끄러워할수있단건끝없이커지고넓어지는사람의특권아닐까하고생각하거든요.그러니거창한계획은없습니다.『흔적기관』을소중하게품에안은채로열심히살면서치열하게쓰겠습니다.”

인터뷰에서김진솔시인은자신을끝없이낮추었지만,해설을쓴오민석교수는이번시집을높게평가했다.오교수는이번시집을“타나토스,죽음혹은세계의끝에대한사유”라고정의하면서다음과같이평했다.

“김진솔은왜그리멀리갈까.그녀는왜에로스너머혹은에로스내부의타나토스에주목할까.그녀는왜절단되고끊어지고잘라내는것들의실존을응시할까.이시집엔왜그렇게많은죽음이출몰할까.존재의시초,탄생,기원을빈번히사유하면서도왜그녀의시선은항상세계의끝에가있을까.이시집을읽으며나는내내이런질문에휩싸였다.그리고이질문에대한대답을나는모리스블랑쇼에게서찾았다.‘존재는존재가아니라존재의결여이다.’블랑쇼가말하는‘존재의결여’는‘삶을쇠퇴시키고포착하기힘든무참한금단으로부터나오는절규로밖에는표현하기어려운것으로만드는살아있는결여’이다.블랑쇼의말마따나존재는존재에이르기전에이미존재를결여한다.존재는단한번도존재가된적이없다.존재는오로지존재의결여로살아있다.”

붉은원

그밑에서부터끓어오르는긴울음이있다
주제를모르는피조물들을전부없애고새로지으라는계시
거대한몸체는천천히뒤집힌다흰배가열리고
꿀럭이며퍼져나가는저주

이제잡혀죽는것은너희일거야,
그목소리를따라

물로된장벽이천천히걸어나오고
검게반들거리는비늘과아가미의군대가
파도를앞질러터지듯쏟아지니비로소전복의순간

손쉽게사냥당하던목숨들이
붕괴되는수평선을뒤로하고전진하는광경
이제야공평하다

뒤집히는세계를맞이하기위해
성문을열어젖히듯두팔을벌린다이제전부쓸려가고

나도왔던곳으로돌아가리라
물로뒤덮인세계에서작살은속도를잃을것이다
―「고래사냥」부분


“시집의맨처음에배치한이시는이번시집전체의큰그림을잘보여준다.시인은세계의가장먼외곽에서세계로밀고들어오는신의존재혹은신의강력한힘을항상의식하고있다.이것을신학용어로신-의식이라한다면,김진솔은항상신-의식의상태에있다고해도된다.이런신-의식의모티프들은그러나시인에게존경과숭배의대상들이아니다.그것들은삶과세계의가장큰외곽에서당위와정언명령의형태로다가오는거대한힘들이다.이힘은항상피조물들,즉결여로서의존재들을향하고있다.이거대한힘에도저히저항할수없는결여-존재들은항상죽음의문턱에있다.죽음이야말로결여-존재들의삶에항구적인배경이된다.그러므로시인의존재-물음은죽음에관한것일수밖에없고,죽음충동(타나토스)에대한자의식일수밖에없다.위작품의‘고래’는그런운명의‘사냥’에저항(역행)하는결여-존재의거대한몸이다.결여가현전을향해거는이싸움이야말로신화를거꾸로돌리려는전복의상상력이아니고무엇인가.”

“김진솔의시집은분명하게도절대적인진리,통합된주체,투명한매체로서의언어개념모두를의심하는반(反)형이상학의자리에서있다.시인은그프레임의먼외곽에신을,그리고신으로부터잘려나간주체를그반대편에배치한다.그사이에서일어나는영혼의전쟁은치열하고,끔찍하고,아프다.그러나시인은그사유의어떤파편들도함부로버리거나포기하지않는다.”

이번시집을편집한박제영시인은이렇게얘기한다.

“밀레니엄버그로인류가멸망할듯야단법석이었던이십세기마지막해에태어난그의문장은계율을깬사제의번민으로얼룩져있었다.그의문장을따라가다보면파계한비구니이거나수녀일지도모른다는선입견은어쩌면당연한수순일지도모른다.문장을수선하려면먼저문장에깊게배인파계의얼룩을지워야한다고하자자기도그것때문에수선을맡긴것이라했다.얼룩을지우고나자조금씩드러나는스무살의문장들.스무살이목도하고있는물과불과모래바람으로뒤덮인황야,혼돈과아수라의세계.정수리부터붕괴된,파편으로흩어진산산조각난세계.부모를버리고새로조합된새빨간참말로무장한아이들의세계.헛소리와헛소리와헛소리가뭉친네버랜드.세기말적인풍경들.그리고마침내살려달라는단말마의비명.그랬다.스무살이묵도하고있는지금의세상은그런풍경이었다.아니면지금이순간에도혼자태어나고혼자자라나는스무살들에게바치는헌사일텐데귀먹고눈먼어른들은결코볼수없겠다.”

김진솔시인은이제겨우약관(弱冠)의나이를넘겼다.그런그가보여주고있는시세계는사뭇깊고세계를바라보는그의시선은적나라하기그지없다.그가자신의시세계를어디까지넓히고얼마나깊이내려갈지,세계를바라보는시선은또얼마나더정치해지고정교해질지벌써부터설레고궁금하다.어느분야든뛰어난신인의등장은언제나반갑고즐거운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