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률이매우낮은타일작업장처럼좋은이야기들이구워져나온다.
광택이있고단단하고아직식지않은소설들이차곡차곡.”─정세랑,소설가
2022년부커상인터내셔널부문최종후보에오르며한국독자뿐아니라전세계독자의주목을받은정보라작가의초기걸작선.“호러,판타지,비현실등다양한요소를혼합하면서도일상에서의공포와압박에본능적으로뿌리를두고있다”는심사위원단평을받았던《저주토끼》의문학적뿌리라할만한환상문학계열의작품들을모았다.특히마술적인환상성이돋보이는9편의초기발표작과1편의미발표작을먼저엄선했다.
수십편의초기단편작품가운데,장르를혼합하고실험하면서환상세계속에절묘하게냉엄한현실인식을드리운작품들을선별했다.정보라는〈작가의말〉에서,어릴때부터동화나민담같은신비로운이야기를좋아했고그런형식을띤자신의작품이비유나알레고리라는평을많이듣지만,오히려자신은“극사실주의작가”라고단언한다.이는언젠가인터뷰에서“스탈린의폭압이시작되기전혁명직후10여년동안예술이정말자유로웠던시기,슬라브문학의자유와환상성에매혹되어”영향을받았다던고백과언뜻모순처럼들리기도한다.작가는“이야기의효용자체가‘비현실’에있다고생각”하면서“많은경우화가나서글을쓰기때문에본의아니게복수전문작가가된것도어쩔수없다고생각”한다.‘정보라환상문학단편선’시리즈는그내적들끓음과치열한실험의연대기다.
《저주토끼》로갑작스레수면위로부상한듯보이지만,정보라는장르소설독자에겐이미오랜애정의대상이었다.‘정도경’이라는필명으로활동하며20년넘게다양한장르를넘나들며쌓아온작품세계는한번에톺아보기엔그스펙트럼이폭넓고깊숙하다.
퍼플레인의‘정보라환상문학단편선’시리즈는‘정도경’이라는작가를미처만나지못한채‘정보라’를만난독자들을위한초대장이다.시리즈의첫책인《아무도모를것이다》는일명‘보라월드’의세계관을거슬러되짚어보는‘문학적프리퀄’이랄까.환상과현실,신화와역사를뒤섞어역동적으로뻗어나가는기묘한이야기들이매혹적이고때론섬뜩하게독특한감흥을선사하며,독자들눈앞에펼쳐질것이라믿어의심치않는다.
세계가주목한‘보라월드’의문학적프리퀄,정보라의숨은걸작을찾아서
“주목받지못하던때,내마음대로써보자는생각으로”환상문학웹진〈거울〉에‘정도경’이라는필명으로글을쓰던시절이있었다.그글을꼬박꼬박챙겨읽었던소설가정세랑은“얼마나많은새벽,정보라의단편을보며위로받았는지모른다”며일찍부터“그이야기의이상한에너지”에이끌렸음을고백하기도했다.
사실SF,추리소설,호러,스릴러등장르적특징이뚜렷한대중장르소설이순수문학에비해국내에서홀대받던시절에비하면,《저주토끼》가사변소설(speculativefiction)로일컬어지며국제적주목을받은건일대사건이었다.하지만우리가정보라에주목하는건세계문학상이그의작품을호출했기때문만은아닐것이다.누구든은밀히좋아할법한괴담과로맨스와누아르의경계를넘나들며,어디에도없을것같은공간이지만어디선가마주친것같은순간으로우리를데려다놓는그의이야기솜씨가,인간이라면태곳적부터벗어날수없던질문들을낯설고새로운형태로던져주기때문이아닐까?
정보라의작품을주로번역해온(《아무도모를것이다》가운데〈가면〉도그중하나로미국ValancourtBookofWorldHorrorVol.2에수록되었다)안톤허는“역설적인감정들이공존하는정보라작가의문장은제인오스틴이나조지손더스와같은영미권작가들의문장과비슷한분위기가있다.징그러우면서도풍자적인,경악스러우면서해학적인,슬프면서아름다운.”이라고말한적이있다.어쩌면이런양가적문체가‘마술적사실주의’혹은‘환상적리얼리즘’계열로읽히는정보라의작품세계와일맥상통하는것인지도모르겠다.
부커상최종후보선정으로세간의큰주목을받았고,작가의여러면모를다각도로조명하는수많은인터뷰와기사가공개되었지만,역시소설가를가장잘설명해줄수있는것은그가쓴소설일터.이숨은걸작들이정보라를궁금해하는독자들에게신작못지않은기쁨을선사하리라믿는이유다.《아무도모를것이다》가정보라의팬들에게,그리고팬이될미래의독자들에게‘나만아는정보라소설’을찾을수있는선물상자가되길바란다.
갇혀있던오래된이야기가풀려날때되살아나는환상이건네는이상한위로
작가는이단편집을향해“오래되고단단히갇힌이야기”라고썼다.집필시기가오래되었고그로인해당시여러고정관념에작가자신이갇혀있었다는점을스스로성찰하며쓴말이지만,동시에이소설집의인물들은실제로말그대로어딘가에갇혀있(었)기도하다.
오래전에썼던이야기들을다시읽으며가장처음느낀것은내가참으로단단하게성별이분법과정상성의고정관념에갇혀있었다는사실이었다.(…)그래서등장인물들이어딘가에갇혀서빠져나오려고애쓰는이야기들을그렇게나많이썼는지도모르겠다.─420쪽,작가의말
〈나무〉의주인공은땅에심겨나무가되어버린친구에대한죄책감으로마을을벗어나지못한다.〈머리카락〉의인물들은갑자기하늘에서내린씨앗비가틔운머리카락때문에방안에갇힌채생활한다.〈가면〉의주인공은환영이주는쾌락에중독되어스스로방안에만머문다.〈Nessunsapra〉의인물들또한정신병원에갇힌사람들이다.
그렇게높은가지에나란히앉아서두소년은세상을내려다보며끝이없을것만같은숲너머지평선을겹겹이둘러싼산과그바깥의세상,더넓고흥미로운세상에대해이야기하곤했다.─14쪽,〈나무〉
〈나무〉는“숲너머지평선을겹겹이둘러싼산”에갇혀살던‘그’가그모든일을겪고“바깥의세상”으로나아가는이야기다.일어나는일들은비극적이지만,악몽같은기억을품고책임을느끼며바깥으로나가살아가고자하는‘그’의태도는우리에게먹먹한여운과함께기이한위안을준다.이처럼정보라의이야기들은읽는이에게(정세랑작가의표현을빌리자면)“세상에서가장이상한위로”를선사한다.
바깥세상으로나아간〈나무〉의‘그’처럼,이단편집에실린“오래되고단단히갇힌이야기”들또한다시금바깥으로나와독자를만난다.작품이시간의한계에갇히지않는방법은독자와만나끊임없이해석되는길뿐이다.오래되고단단히갇힌이야기가풀려나읽힐때,그이야기는마법같이다시새로운생명력을얻을것이다.
아름답고무자비한세상에단호하고비정하게세운정의
《아무도모를것이다》의비현실적이고초자연적인세계는시종일관‘정보라’스러운기이하고오싹하면서도씁쓸한분위기를자아낸다.설화가연상되는고전적시공간에서펼쳐지는〈나무〉와〈산〉부터,현대나미래어디쯤일듯한〈머리카락〉〈가면〉〈비오는날〉그리고SF에가까운〈물〉〈금〉〈휘파람〉과다른한편으로는현실의역사적배경을빌려온〈Nessunsapra〉와〈완전한행복〉까지.다양한색깔의작품들이교차하는구성을따라작가가쌓아온풍요로운작품세계를돌아보면,“정보라의장점중하나는고전적인고딕장르뿐만아니라펄프,포르노,패러디와같은하위장르들을접합시키며,경계를넘는도전을멈추지않는다는것에있다”는문학평론가전청림의말또한실감할수있다.
잘못이있음에도자각하지못하여용서를바라지않는사람은용서할방법이없었다.그러므로지금그에게필요한것은선이나자비가아니었다.그가원하는것은정의였다.─416쪽,〈완전한행복〉
정보라가들려주는환상적인이야기들에는사뭇엄격하고비정한태도가서려있다.《아무도모를것이다》는처음을여는〈나무〉부터끝머리를장식하는〈완전한행복〉까지,《저주토끼》에서강렬한인상을남겼던‘복수’라는테마를작가가오래전부터변주해왔음을보여준다.용서받을자격이없는자를함부로용서하지않는것.정세랑작가의말처럼,이러한단호한태도가읽는이에게“아주보기드문종류의만족감”을선사한다.“현실이더호러이고,그로테스크하며,부조리하다”고작가가늘강조해왔듯이,“전쟁이빨리끝나고나쁜놈들이얼른몽땅죽어서전부늑대에게뜯어먹히기를소망한다”는‘작가의말’까지도참그이답다.
-기이하고불온한이야기의마력퍼플레인PURPLERAIN
‘퍼플레인’은갈매나무출판사의장르문학브랜드입니다.
기이하고불가해한이야기,전복적이고도발적인상상력으로퍼플레인만의장르소설을펴내고자합니다.
Line-up
①《양꼬치의기쁨》,남유하
②《붉은실끝의아이들》,전삼혜
③《그겨울,손탁호텔에서》,듀나
④《아무도모를것이다》,정보라
한국문학에새로운비를내릴퍼플레인의행보는계속됩니다.
작가의말
(…)나는비현실적인이야기들을좋아한다.이야기의효용자체가거기에있다고생각한다.현실에서는만나볼수없는세계를상상속에서경험하는것.내가직접겪은일을있는그대로이야기한다고하더라도,듣는사람이나읽는사람의입장에서는자신이경험하지못한다른삶의이야기일뿐이다.그러니까현실에서일어난일이든일어날수있는일이든일어날수없는일이든,결국독자의입장에서봤을때가상과허구와상상이라는점에서는근본적으로같다.어차피허구의이야기인데그러면현실에서더멀리날아갈수록더재미있지않을까?물론현실에서더멀리떨어질수록이야기는(그리고이야기를읽거나듣는독자님들은)더혼란스러워질것이다.그러나그혼란도재미의일부라고생각한다.독자님들도그렇게생각해주시면좋겠다.(…)독자님들께재미있는이야기를들려드리고싶었다.부디재미있게읽어주셨으면좋겠다.
추천사
정세랑(소설가)
얼마나많은새벽,정보라의단편을보며위로받았는지모른다.그의이야기에는이상한에너지가있어서밤에는도무지읽기싫은,몸서리쳐지는이야기를통해서도그에너지를전달받고만다.…
무엇보다나는정보라가원형을아주멋지게휘두르는작가라서좋아한다.오래된틀에갇히지않고놀라운생명력을얻어꿈틀거리는그의소설에서,이야기는다리가많은절지동물처럼복잡하게매력적인리듬으로나아간다.…
원형을다루는솜씨말고도애정을느끼는부분은그의비정함이다.용서와화합이라는뜨뜻미지근한결말로내몰려는압박에,정보라는타협하지않는다.웃음기없이비정하게,추악하고끔찍한세계를눈한번깜빡이지않고마주본다음본대로만쓴다.정보라의소설에서는구원받을자격이없는자가구원받지않고,그리하여우리의마음속에서아주보기드문종류의만족감이솟아오르는것이다.
책속에서
그순간검은나무는그의눈앞에서활짝꽃을피웠다.자주색,노란색,붉은색,푸른색,진보라색,그리고그가이름도알지못하고존재한다고상상도하지못했던색깔들로불타오르며형형색색의빛으로주위의대기를채웠다
──30쪽(나무)
태풍이지나간여름의어느날하늘에서씨앗의비가내렸다.씨앗은바람을타고아래로아래로내려왔지만도시의땅은모두콘크리트와시멘트와보도블록으로덮여뿌리를내릴곳이없었다.그래서씨앗은열린창문사이로,건물벽속으로,도로의아스팔트속으로,보도블록사이로파고들어그곳에서싹을틔웠다.씨앗이터져싹이난자리에서는머리카락이자라나왔다.
──55쪽(머리카락)
시작은소리였다.그것은밤중에천장에서들려왔다.마치누군가위층에서빗자루질을하는것같았다.슥슥슥.가끔은긁기도했다.끽끽끽.드물게는발걸음비슷한소리도들렸다.삐걱삐걱.쿵쿵쿵.
──83쪽(가면)
흉터는짙은갈색으로가늘고뚜렷했다.하얀피부위에길게이어진자국을본순간남자는흉터라고생각한것이아니라어쩐지여자의피부에금이갔다고생각했다.그때여자가,여전히화면을내려다보며,손목에금이간오른손을무심하게움직이며말했다.
“언젠가는집으로돌아가게될거예요.”
──138쪽(금)
그가느낀것은일종의황홀경이었다.여자의손가락에서배어나온물기는그의혀를통과하여그의뇌에직접침투했다.그는3차원의공간에고체로존재하는인간의존재방식이아닌전혀다른차원에서전혀다른형태로존재하는생명체들의세계를보았다.그러한생명체의존재를느꼈다.아주잠깐,찰나의순간이었지만,그는인간이상상도할수없는전혀다른방식으로존재하는생명체가된다는것이어떤의미인지를온몸으로감각하고이해했다…….
……그리고그는전화기가진동하는소리에잠이깼다.
──194쪽(물)
백년에한번산은거대한안개속에잠겼다.그안개속에서두거인이춤추듯이칼을휘둘렀다.산아래마을에사는사람들은한때모두들그이야기를알고있었다.
……이제는잊혀버린이야기다
──219쪽(산)
나는그녀의왼쪽신발속에산다.
하늘에서물방울이떨어진다.물방울이땅을때리는소리는말발굽소리와비슷하다.오래전의말발굽소리.
나는그녀를기다린다.
──261쪽(비오는날)
그리고지금은하늘을가로질러어딘지모를땅에내던져졌지만그는여전히살아있는것이다.휘파람으로대화하고나뭇잎으로치료하는사람들의세계에서.
──312쪽(휘파람)
Nessunsapra.물론이다.아무도알지못해야만했다.자신이사랑한간호사도자신과똑같은혐의를쓰고체포되어,자신과똑같은고통을겪고어쩌면자신과같은병원에환자로수감되게하지않으려면,아무도몰라야만했다.사랑만이,오직그의사랑만이그녀를그의것으로만들었다.
──383쪽(Nessunsapra)
혼돈의시기가끝나가던어느겨울에그의집에초대받지않은손님이찾아왔다.눈덮인벌판을가로질러찾아온손님은온몸이꽁꽁얼어붙은채로생존을위한하룻밤의온기를청했다.그는문을열어손님을맞아들였다.식탁에앉히고빵과소금을대접했으며날이저물자난로의불빛이미치는따뜻한자리를양보했다.남자가잠든후에그는오랫동안그앞에서서잠든남자의얼굴을내려다보며숨소리에귀를기울였다.그는남자를알아보았으나남자는그를알아보지못했다.
──387쪽(완전한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