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양장)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양장)

$13.00
Description
“그만 쓰자 끝.”
32년 만에 증보하여 펴내는
시인 최승자의 첫 산문!
난다에서 최승자 시인의 첫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다시 펴낸다. 1989년 처음 출간된 지 32년 만이다. 3부에 걸쳐 25편의 산문을 엮었던 기존 책에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쓰인 산문을 4부로 더해 증보한 개정판이다.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이래 ‘가위눌림’이라 할 시대의 억압에 맞서며 육체의 언어를, 여성의 목소리를, ‘끔찍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열어낸 시인. “경제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사용되는 시적 선회로, 우리 시대에 가장 투명한 말의 거울”(황현산)이 된 시인. 그러나 정작 투고할 시편들을 서랍에 넣어둔 채 몇 달이나 잊어버리고는 그게 다 자신의 지독한 ‘게으름’ 탓이었다 무심히 말하는, 시리도록 투명한 시인.

그가 시집 대신 산문집으로 다시, 32년 전의 첫 산문집으로 다시, 감감했던 날들에서 건져올린 새 산문을 덧대어 다시, 돌아왔다. 새 몸을 입은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등단 이전인 1976년에 쓴 산문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로 출발해 2013년의 글 「신비주의적 꿈들」에 이른다. 시인 최승자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그 세월과 그 흐름의 지표로 선 글들이다. 때로는 일기였다가, 때로는 고백이었다가, 시대의 단평이거나 문단의 논평이었다가, 기어이 시론이 되고 마침내 시가 되는 산문집이다.
저자

최승자

한국현대시사에서가장독보적인자기만의시언어를확립하며,기존의문학적형식과관념을보란듯이위반하고온몸으로시대의상처와고통을호소해온시인이다.1952년충청남도연기에서태어났다.수도여고와고려대학교독문과를졸업했으며,계간「문학과지성」에「이시대의사랑」외4편을발표하면서시인으로등단했다.최승자는현대시인으로는드문대중적인인기를얻어박노해,황지우,이성복등과함께시의...

목차

1부배고픔과꿈
다시젊음이라는열차를13
배고픔과꿈16
산다는이일20
시를뭐하러쓰냐고?24
도덕하는사람들28
성년成年으로가는여행35
맹희혹은다른눈眼39
죽음에대하여47
떠나면서되돌아오면서56
가수와시인61
머물렀던자리들66

2부헤매는꿈
나의유신론자시절75
호칭에관하여79
헤매는꿈83
둥글게무르익은생명88
짧은생각들92
한해의끝에서97
비어서빛나는자리100
유년기의고독연습103
없는숲109
양철북유감113

3부한게으른시인의이야기
폭력을넘어서119
한게으른시인의이야기124
1980년대의시에관하여130
‘가위눌림’에대한시적저항135

4부모든물은사막에닿아죽는다
여자가여자에게145
일중이아저씨생각150
새에대한환상154
H에게―모든물은사막에닿아죽는다159
최근의한10여년172
신비주의적꿈들176

시인의말183
개정판시인의말187

출판사 서평

비어서빛나는자리,
최승자의40여년

『한게으른시인의이야기』는‘오랜묵힘’을지난최승자시인의기별이다.출간소식으로는2016년시집『빈배처럼텅비어』이후5년만이다.지난시집과전작『물위에씌어진』사이에도5년의침묵이있었다.다섯번째와여섯번째시집의간격은11년으로더길었다.좀처럼자주기별하지않는시인.“내가살아있다는것,/그것은영원한루머에지나지않는다”(「일찍이나는」)말했던시인.
4부로추가된근작중에는아예「최근의한10여년」이라머리를달았다.어떠한욕심도없으므로꾸밈은더없는근황이다.1998년시집『연인들』을펴내던중발병한조현병으로정신과병동에입원과퇴원을반복하면서,서양점성술과신비체계,지나서는노자와장자사이“어떤비밀스러운다리를이리저리둘러보”면서,그러나해체는커녕구조를보는것조차허락해주지않는그다리위에서“어린아이같은짓을하고있었다”고,시인은무심히말한다.나를병에지치게한것들에서이제그만손을떼야겠다고,다만‘lettinggo’해버렸다고.
그리하여이제는무엇을해야할까물으면시인의대답은그저무심하다.“문학으로되돌아올수밖에없는나”,그러므로“시는그대로쓸것”이라고.이미예전의자신과는돌이킬수없이달라졌다고말하지만그돌아올곳이문학임에는의심이없다.“어떤시원성(始原性)에젖줄을대고있는푸근하고아름답고신비하고이상하고슬픈설화형식의아주짧은소설들을써보고싶다”는비전을슬며시내비치기도했다.다시금문학의자리로돌아와야한다는다짐으로,“그래서요즈음은문학책들도부지런히읽고있다”고,무심하여의심없는맑은언어로(「신비주의적꿈들」).
그렇게‘최근의한10여년’을돌아본때로부터다시10여년이흘렀다.그사이2014년에출판사가시인에게이산문집의재출간을요청했고2019년허락을받았다.2021년11월11일,재출간을앞두고병원으로거처를옮긴시인에게새‘시인의말’을받아적었다.수화기너머또박또박,섞박지용순무써는듯한큼지막한발음이었다.

오래묵혀두었던산문집을출판하게되었다.
오랜세월이지난것같다.
지나간시간을생각하자니
웃음이쿡난다.
웃을일인가.
그만쓰자
끝.

―「개정판시인의말」전문

잡균섞인절망보다는
언제나순도높은희망을

이책을말할때,아니최승자를이야기할때빠지지않는것은‘죽음’일것이다.시인이문득과거를돌아볼때죽음은태연히거기에있다.아예책속에「죽음에대하여」라는글도있다.외할머니댁머슴일중이아저씨의‘스스로나선’죽음,첫하숙집주인아저씨의‘농담같은’죽음,슬픔가운데‘위안이된’할머니의죽음.
그러나그리하여,최승자는죽음을넘어,죽음의다음으로,‘죽음의죽음’에까지나아간다.그저덤덤히“죽음은깊고짙고강렬하며무르익은관능과연결된것”이었다고백하며,그것이“내가나의삶에서충분한만족감을얻지못했기때문”이라곧이반성하는것이다.마침내어머니의죽음앞에서관능이라믿었던‘죽음’의실체마저죽임을당할때,시인은자신의네번째시집『내무덤,푸르고』의제목을다르게읽어본다.“하긴,그것은내죽음을담은무덤이었는지도모르겠다.”(「H에게」)
“불확실한희망보다는언제나확실한절망을택했다”던시인.그러나최승자는끝내절망으로,죽음으로들어가는대신번번이삶으로돌아나온다.홀연히삶이라는루머속으로되돌아온다.“어차피한판놀러나왔으니까,신명풀리는대로놀수밖에”없다고(「산다는이일」)선언하며,한판인생재미있게풀려주지않을바에야먼저“깽판”쳐버리겠다고,절대로고이죽어주지않겠노라고(「시를뭐하러쓰냐고?」)다짐하며.
시인은죽음쪽으로꺾인것이아니라죽음을직시하여너머를본다.거기서성큼더나아가우주와신비,정신의세계로훌쩍떠나버린듯도보인다.“세계를관념적으로이해하기보다는차라리근원적으로이해하려는”(황현산)시도라했다.그러나이세상에서듣고보고만질수있는모든것이그를절망하게하더라도,시인이끝까지붙잡고있는‘오직그것’이란결국만질수있고들을수있는이곳,다시삶의자리다.“눈가린절망과눈가린희망사이를시계추처럼왔다갔다하는습성”으로,삶과맞서면서도삶을아주벗지는않고,‘떠나면서되돌아오면서’단단해지는삶의기록을써내려갔다.

인간은강하되,그러나그삶을아주떠나지는못하고,아주떠나지는못한채,그러나수시로떠나수시로되돌아오는것일진대,그삶을위해우리가무슨노력을하였는가한번물으면어느새비가내리고,그삶을위해우리가무슨노력을하였는가두번물으면어느새눈이내리고,그사이로빠르게혹은느릿느릿캘린더가한장씩넘어가버리고,그지나간괴로움의혹은무기력의세월위에작은조각배하나띄워놓고보면,사랑인가,작은회한들인가,벌써잎다떨어진헐벗은나뭇가지들이유리창을두드리고,한해가이제그싸늘한마지막작별의손을내미는것이다.
그러나그헐벗음속에서,그싸늘한마지막작별속에서이제야비로소살아있다고,살아야한다고말할차례일지도모른다.
그리고어느시인이말했듯결국,‘산다는것은사랑한다는것이다.그말을발음해야만한다’.
―「떠나면서되돌아오면서」중에서

나는지금그순간을꿈꾸고있다.
내가첫발을떼어놓는그순간을.

시원에의그리움으로“시원병(始源病)”을앓고있다는시인(『물위에씌어진』시인의말).“여성으로다시태어나는여성으로서출생신고를한,우리시대의첫번째시인”(김소연).그는시원으로향하는문을열었고,문뒤의문을,문너머의문을거듭열어젖히며나아왔다.살아짐으로살아남았고,그리하여우리에게사라지지않을이름이되었다.그이름대로,“최승자가어디에있건그는이기는자이다.그는한번도항복한적이없다”(황현산).
25세에자신이썼던“다시나는젊음이라는열차를타려한다”라는문장을마주하고웃음이나올뿐이라던38세의시인.다시32년만에돌아보게된자신의말을앞에두고“지나간시간을생각하자니웃음이쿡난다”는70세의시인.“웃을일인가”스스로물으며“그만쓰자”스스로답하는시인.“끝”,그렇게말하고이렇게마침표를두는,한게으른시인.최승자라는,부단히도게으른한시인의이야기.

시에대한신앙도믿음도열정도없고,시를쓰고나면다시읽어보기도싫고,시를쓰고나서도마뜩지가않고,그러면서도결국은뭔가미진하고뭔가아쉬워서뭉기적뭉기적시의자리로되돌아오는시인,메마른불모의시인.(……)그런데내가아무것도믿지못하는것처럼보이는것은내게단한가지믿는것이있기때문일는지도모른다.그점에서보자면나는낭만주의자이다.그러나그단한가지가결코실현될수없는것임을나는안다.그래서나는내가믿지않는것들속으로천연덕스럽게,어기적거리며되돌아온다.
―「한게으른시인의이야기」중에서



<책속에서>
그러나나는이제이자리를뜨고싶다.눈길을돌리고서슬금슬금자리에서일어나고싶다.너무오랫동안주저앉아있어서뻣뻣하게굳은다리를펴고서다른곳을향해걸어가고싶다.움직이고싶다.다른많은것을보고싶다.내가아닌다른아름다운것들을.썩은웅덩이로부터눈을들어올리기만하면저들판과길에나도는수많은아름다운것이내눈의수정체속으로헤엄쳐들어오고어느순간나는엉덩이를탈탈털고일어나걷기시작할것이다.나는지금그순간을꿈꾸고있다.내가첫발을떼어놓는그순간을.
그러니까,언제나내꿈을짓밟아오기만한인생아,마지막으로한판만재미있게잘풀려줄래?그러면그다음에내가고이죽어줄게.꽃처럼피어나는모가지는아니지만,고이꺾어네발밑에바칠게.이번에도네가잘풀려주지않으면도중에내가먼저깽판쳐버릴거야.신발짝을벗어서네면상을딱때려줄거야.그리고절대로고이죽어주지않을거야.
_26~27쪽,「시를뭐하러쓰냐고?」

떠난다는것은결국자기자신에게로,자기자신의현실속으로되돌아오기위한것이다.끝과시작처럼떠난다는것과되돌아온다는것은하나이다.자기자신으로부터떠남으로써자기자신에게로되돌아오는것이다.
그렇게무수히떠나고무수히되돌아오면서많은시간을,그것도대부분괴로움과불행의시간을바침으로써우리가얻게되는것은어쩌면,행복이란별도로존재하는게아니라불행이없는것이행복이라는,조금은쓴,그러나넉넉한인식뿐일는지도모른다.(……)인간은강하되,그러나그삶을아주떠나지는못하고,아주떠나지는못한채,그러나수시로떠나수시로되돌아오는것일진대,그삶을위해우리가무슨노력을하였는가한번물으면어느새비가내리고,그삶을위해우리가무슨노력을하였는가두번물으면어느새눈이내리고,그사이로빠르게혹은느릿느릿캘린더가한장씩넘어가버리고,그지나간괴로움의혹은무기력의세월위에작은조각배하나띄워놓고보면,사랑인가,작은회한들인가,벌써잎다떨어진헐벗은나뭇가지들이유리창을두드리고,한해가이제그싸늘한마지막작별의손을내미는것이다.
그러나그헐벗음속에서,그싸늘한마지막작별속에서이제야비로소살아있다고,살아야한다고말할차례일지도모른다.
_59~60쪽,「떠나면서되돌아오면서」

시에대한,시를쓴다는것에대한믿음과환상은애초부터없었다하더라도,그러나최소한데뷔시기를전후하여시를쓰고싶다는열정만큼은누구못지않게갖고있었던한시인이어쩌다이렇게되어버린것일까.시에대한신앙도믿음도열정도없고,시를쓰고나면다시읽어보기도싫고,시를쓰고나서도마뜩지가않고,그러면서도결국은뭔가미진하고뭔가아쉬워서뭉기적뭉기적시의자리로되돌아오는시인,메마른불모의시인.그런시인은시인으로서존재할가치도,존재할자격도없다는비난의소리가어디서들려오는듯도하다.그런데도시를쓰는한나는시인인것일까?어쩌면내시를읽는독자들중에서,“무슨시가이래?맛있는살코기는하나도달려있지않고먹을수도없는뼈다귀만남았잖아?”라고말하는사람이있을것같은생각이든다.영양분이담뿍들어있는맛있는살코기를제공하지못하는시인.살점하나붙어있지않고먹을수도없는불모의딱딱한뼈다귀만을내놓는시인(혹시나그뼈다귀를푹푹고아맛있는국물이라도우러나온다면.제발그럴수라도있다면).
_127~128쪽,「한게으른시인의이야기」

한번생긴공포는무수한세포분열을하며뚱뚱하게살찌고,그렇게해서우리존재의바탕에자리잡은공포는우리의저깊은안쪽에서보이지않게우리를조종하면서우리삶을이끌어가고,그궁극적인목적지는죽음이며,거기까지가는동안많은죽음의형식을실험하고시연하지.어쩌면우리의삶이란공포가꽃수레에올라타고자신의목적지인죽음에이르는과정인지도몰라.공포가자신의파괴성을못이겨죽음으로써자신을파괴해버리기때문이지.한번생겨나확장하면서힘을얻은감정은그자신의힘과무게를주체못해바깥으로쏟아져나올수밖에없어.그렇게바깥으로쏟아져나옴으로써생기는갖가지사건과관계와상황으로이루어진감옥같은것이불교에서말하는‘condition’의정체일는지도모르지.그리고그마지막,최후의‘condition’이한사건으로서의죽음일수도있다.아마도나는공포와더불어그것의목적지인죽음에대해서얼마간본능적으로눈치채고있었는지도몰라.“그래서그공포가나를잡아먹기전에/지레질려먼저앙앙대고위협하는쥐였다./어쩌면그때문에세계가나를잡아먹지않을지도모른다는기대에서……”지레질려먼저앙앙대고위협하면서,끊임없이죽음과불행과절망을토해내던쥐,그쥐의울음,그것이내시들이었을까?
_162~163쪽,「H에게―모든물은사막에닿아죽는다」

나를병에지치게한것들에서손을뗀지금나는무엇을해야할까.시는그대로쓸것이고,그러나문학으로되돌아올수밖에없는나는이미옛날의내가아니어서다른꿈을슬쩍품고있기도하다.그것은어떤시원성始原性에젖줄을대고있는푸근하고아름답고신비하고이상하고슬픈설화형식의아주짧은소설들을써보고싶다는생각이다.
_175쪽,「최근의한10여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