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의 작은 여행 (양장)

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의 작은 여행 (양장)

$16.00
Description
살아 있는 사람에게 행운처럼 주어지는 여행
나는 살아 있어서 여행할 수 있다
나는 하노이에 와서 처음에는 몸을 녹이고 그다음에는 마음을 풀고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 _33쪽

죽으면 다 끝나니까 면허를 따서 운전은 해보고 죽자. 이것이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죽으면 다 끝나니까 이 책은 쓰고 죽자. 매번 그런 식이었다. 죽으면 다 끝나니까 하노이에 가서 반 꾸온 꼬년과 분짜를 한번 더 먹어보고 죽자. 이것이 내가 하노이에 가게 된 이유였다. _138쪽

시인이자 영화인 유진목이 2년 만에 신작 산문집『슬픔을 아는 사람』을 출판사 난다에서 펴낸다. 2022년 여름, 베트남 하노이에 다녀온 세 번의 여행을 글과 56컷의 필름 사진으로 기록했다. ‘유진목의 작은 여행’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기대와 설렘에 잠겨 낯선 곳을 체험하고 기록한 일반 여행 에세이의 온도와는 사뭇 다른 문장으로 독자를 맞이한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작가 유진목이 긴 싸움 끝에 남아 있는 나 자신을 확인하고 회복하려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이자 시인으로서의 ‘쓰기’에 대한 시론이라 할 수 있다. 총 여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다섯 파트는 1부터 52까지 번호를 단 시 같은 산문을 실었다. 이는 여행중 노트에 기록한 메모를 초고로 하여 살을 붙이고 한 글자씩 짚어나가며 다시-쓰기한 글들이다. 유진목에게 다시-쓰기는 계속해서 살아보기, 다시-살기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일까. 글 한 편 한 편은 유진목 시인 특유의 비워둔 공간이 말하는 듯한 여백이 매력으로, 날숨보다는 들이쉬는 숨에 가까운 호흡이 하나하나 살아 곱씹는 여운이 길다.
“슬픔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슬픔은 충만한 사랑을 알아본다. 사랑을 먹고 자란 슬픔은 이내 충만해진다.” 때로는 시로, 한편으로는 아포리즘으로도 읽히는 이 글들은 시인이 겪어야 했던 어떤 ‘불행’을 그늘에 깔고 있다. “가로등도 없고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어둠뿐인 밤길과 같”은 시간.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의 보복성 고소에 조사를 받고 허위적시 명예훼손 고소에 ‘혐의 없음’ 처분을 받고 승소하기까지 시인은 싸우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오랫동안 싸우면서 살았다. 가까스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것에는 마취에 가깝게 무감해져야 했던 그 시간이 끝난 여름, 유진목은 스스로 가진 돈을 남김없이 쓰고 일상에서의 생활도 멈추기로 마음먹고 하노이행 비행기에 올라탄다. 설거지를 할 때 그릇을 모두 깨부수고 싶고 빨래를 널다 말고 옷을 전부 찢어버릴 것만 같았던 분노를 잠재우고 싶어서.
시인은 그렇게 하노이라는 공간에서 수년간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온 분노와 그에 잠겨 경험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통과해야 했던 삶을 반추한다. ‘기억의 끈’을 놓고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어디선가 나도 모르게 나를 잃어버리는” 여행을 통해. 이것은 그가 “완전한 여행자”가 되어 멀리 떠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불행한 내가 본 것을 행복한 내가 다시 보려고.
저자

유진목

1981년서울동대문에서태어났다.2015년까지영화현장에있으면서장편극영화와다큐멘터리일곱작품에참여하였고,1인프로덕션‘목년사’에서단편극영화와뮤직비디오를연출하고있다.2016년시집『연애와책』이출간된뒤로는글쓰는일로원고료를받을수있게되었다.2017년산문집『디스옥타비아』,2018년시집『식물원』을썼다.부산영도에서서점‘손목서가’를운영하고있다.

목차

part1나의가장먼미래는아침이다009
part2나는마음이전부인사람이되어버렸고035
part3나는왜하노이에왔을까057
part4방안에서는아무것도잊히지않는다085
part5하노이에는내가있어요115
part6사진의다음은서로를알아보는것이다145

출판사 서평

자고일어나면내가아니길바랐다
아니,잠들면깨어나지않길바랐다

하지만하노이에도착해서반나절을걷다가맨처음알아차린것은이사람들은아무것도모른다는것이었다._63쪽

내것은아무것도없는곳,나는여기서아무도아닌존재가되는곳,아무와도깊은대화를나눌수없고오직나만이나와대화할수있는곳.뜨거운햇빛이몸을관통해버린것만같은여름의하노이에시인은“아무것에도압도당하지않고단지계속해서살아보자는마음하나에만순순히이끌리고싶어온것이다.”하염없이걷던거리에서는옅은망고냄새가났다.오토바이들이질주하는도로한복판에서있어도엘리베이터를타도화장실을가도언제나깔려있던그냄새.시인은문득이달큰한냄새가무엇을닮았는지기억해낸다.“살갗과살갗이서로를스칠때나는냄새”였다는것을,살의에가득차있던마음은너무도오래살의보드라운감촉을잊고살아왔다는것을.“나는혼자서울고밖으로나갈때는웃는사람이다.밖에서도울던시절이있었지만그런날들을지나왔다고지금은쓸수있다.”

그는그저살아있고싶은마음이었다.잠에서깨어나면죽고싶다생각하지않고살고싶은마음.살아있다는생각도그만하고그냥살고싶은마음.살아있음을흉내내느라스스로지쳐있던나.살아있음을행하지않아도되기에잠은달콤한것이라고생각했던시인은카메라를들고거리에서까무룩잠든사람들을보다깨닫는다.그들이너무나도선명히살아있다는사실을.“잠은죽음에속한것이아니라삶에속해있다는것을.”그렇다.“우리는우리에게머물기로한슬픔과함께살아가야한다.슬픔은삶을신중하게한다.그것이슬픔의미덕이다.”

이런젠장
너무아름다워

살아있다는것을의식하는일이얼마나피로한일인지공감하는사람이있다면나는말없이그를안아주고싶다._101쪽

마지막파트6「사진의다음은서로를알아보는것이다」에는시인이팔십만원을주고산중고필름카메라CONTAXT2로직접찍은56컷의베트남풍경이담겨있다.이사진들은시인이셔터를누르던순간의심정으로되돌아가이장면과사람앞에서있는느낌을살려선별하고재배치한것이다.동시에유진목시인은이파트에서자신은어떻게사진을찍는지써내려가며,무엇이자신으로하여금지그재그로달리는오토바이뒷좌석에서곡예하듯손을들어올리고셔터를누르게했는지그순간으로우리를데려간다.

책표지는유진목시인이호텔숙소에서직접찍은사진으로디자인했다.제목‘슬픔을아는사람’은먹박으로,Hanoi라는영문은우윳빛펄박으로구현했다.코팅된종이위에찍힌두종류의박과이를감싸는반투명한트레싱지띠지는표지에인쇄된글자와는다른질감으로읽는이에게다가온다.이차이는표지와눈을마주친이에게저마다의층위를만들어다름을헤아리게한다.농을쓰고과일을깎는묵직한칼을든손을오래바라보았던시인처럼,그칼을쥔빠른손놀림에대한무서움이자신을절대로해하지않을거라는믿음으로바뀌기까지길고도짧았던시간처럼.Hanoi에사용한우윳빛펄박은정면에서바라보면사진에어울리는잔잔한흰빛으로투명하지만책을기울여빛을받으면무지갯빛으로조용히반짝인다.“언제든죽으면된다고그러면다끝난다고스스로를위로하던사람”,어디서든눈에띄지않는사람,빛나는사람들사이에서가끔은그들처럼빛나고싶다고생각하는사람,닌빈에세번째찾아가서야그평원의넓고광활함이복받쳐와헬로키티헬멧을쓴채주룩주룩흘리고말았던그의눈물이그러하듯이.

●작가의말

공항에앉아있다보면어디로든가고싶어진다.누구나그러할것이다.그러나여행에는돈이필요하고시간이있어야하고어디로든갈수있는마음의여유도지녀야한다.실제로몸을움직여얼마간의짐과함께낯선곳으로떠나는일은그런것이다.

지난여름,나는하노이에열흘혹은이주씩세번다녀왔다.내가가진돈을모두쓰기로했고일상에서의생활도멈추기로마음먹었다.

당시내게는수년간차곡차곡들어앉은분노가마음을모두채우고있었는데,이를테면설거지를할때그릇을모두깨부수고싶고빨래를널다말고옷을전부찢어버릴것만같았다.

그래서나는멈추었다.일단멈추고하노이로떠났다.여행자가되어분노를잠재워볼심산이었다.하필하노이였던것은그곳의모든음식이맛있기때문이다.하노이에는맛있는것들이잔뜩있고나는하염없이걷다가그것을먹을수있다.

『슬픔을아는사람』은그세번의여행을기록한책이다.나의작은여행을이제사람들사이에놓아둔다.

2023년4월
유진목

책속에서

나는이제싸우는게힘이든다.너무오랫동안싸우면서살았다.내가무엇과싸우면서살았는지지금은쓰고싶지않다.다만오래싸웠고끝이났다고만쓰고싶다.간밤에는홀가분한마음이벅차기도하여서혼자울다취침약을먹고잠이들었다.싸우지않는마음이라는것이어떤것인지완전히잊어버린참이었다.나는너무오랫동안싸우면서살았다.

싸우는사람은싸우느라너무힘이들어서다른것에는자연히무감해지려한다.그래야만가까스로살아갈수있기때문이다.그렇게가까스로살아있는사람의마음은아무것에도반응하지않고시간을흘려보낸다.나는한달에두세번은상담의를찾아가말했다.좀더무감하게해주세요.아무것도느끼지못하면좋겠어요.약을먹으면뒤척이지않고곧장잠들었으면좋겠어요.상담의는내말을곰곰이듣다가웃으며말했다.그건마취예요.그날은나도상담의를따라웃었다.요즘도가끔씩그말이생각나서피식웃곤한다.

어쨌든긴싸움도끝이났다.하지만너무오래싸운나머지끝이났다는것을실감하지못한듯하다.나는그저끝이났구나생각하면서하노이행비행기를탔다.그리고며칠을걷다가알아차렸다.내마음이더없이무감하다는것을.내무감한마음이하늘도나무도창문도보지않는다는것을.그렇게며칠을걷다가또알아차렸다.창문너머에사람이살고있다는것을.빨래를널고화분에물을주고있다는것을.나는오랫동안빨래도하지않고화분에물도주지않았다는것을.
---pp.22~23

살아있는사람에게행운처럼주어지는여행.나는살아있어서여행할수있다.죽어서도여행할수있다면나는그렇게할것이다.하지만나는죽으면모든것이다끝나기를바라는사람이다.나에게죽음은태어나기전과같은상태를의미한다.그럼에도불구하고죽어서도여행할수있다면나는죽은자로서기꺼이여행할것이다.
---p.76

슬픔은사랑을먹고자란다.슬픔은충만한사랑을알아본다.사랑을먹고자란슬픔은이내충만해진다.

나는슬픔이없는사람을경멸한다.아니,슬픔을모르는사람을경멸한다.슬픔을모르는사람은매사에무례하다.슬픔을모르기때문이다.슬픔을모르는사람은매사에자신이옳다.슬픔을모르기때문이다.

그래서슬픔은중요하다.슬픔이있는사람은무례하지않다.슬픔이있는사람은자신의틀림을가늠해본다.슬픔이있는사람은모든말을내뱉지않는다.슬픔이있는사람은적절히타인과거리를둔다.슬픔이있는사람은타인을해하지않는다.슬픔이있는사람은매사에조심한다.슬픔이있는사람은공감할줄안다.그래서슬픔이있는사람은조용히타인을위로한다.

사람들은각자의슬픔을품고살아간다.슬픔은없애버려야할것이아니다.상처는낫고슬픔은머문다.우리는우리에게머물기로한슬픔과함께살아가야한다.슬픔은삶을신중하게한다.그것이슬픔의미덕이다.
---p.92

닌빈의도로는산을따라굽이지고,가로수가많고,여느도시의도로처럼차나오토바이가넘치지않는다.달리다보면가끔씩차한대오토바이한대가옆을스쳐갈뿐이다.넓은평원에는농을쓴사람들이허리를숙이고농사를짓고있다.가끔무리를진소들이꼬리를흔들며평원을거닐고있기도하다.어느곳은사람이갈수있어보이고어느곳은사람이갈수없어보인다.나는그모든땅의넓고광활함이복받쳐왔다.아름다운산들과평원이이어지는도로를따라비를맞으며자전거를타고트레킹하는사람들을여럿보았다.나는그들이몹시멋져보였다.

비록나는헬로키티헬멧을쓰고울고있지만나역시그들만큼용감하고멋지다고생각했다.
---pp.124~125

닌빈은아름다웠고,아름다운닌빈은나의고통을흔쾌히받아주었다.

여기에두고가면돼.

넓은땅이내게말해주었다.
---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