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양장)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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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고명재 시인의 첫 산문!

‘사랑’이라는 이상한 리듬을 말하기 위한 시인 고명재의 무채색에 얽힌 백 가지 이야기!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문학동네, 2022)으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고명재 시인의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판사 난다에서 펴낸다. ‘사랑’이라는 이상한 리듬을 말하기 위한 무채색에 얽힌 백 가지 이야기를 담았다. 무채색은 색상과 채도가 없고 밝고 어두운 차이만 있는 색을 말한다. 흰색에서 회색을 거쳐 검은색에 이르는 무채색은 그 자체로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색. 있고 없음 사이에서 존재하는 비존재의 색이다. 시인이 살펴본 무채 속 풍경은 사랑이라는 밥솥에서 끓어오르는 밥물과 같다. 누군가를 먹이고 돌보려 먹이는 하얀 밥, 흰살 생선, 밀가루, 두부, 멸치의 은빛, 능이버섯, 간장, 양갱…… 고명재 시인은 이 첫 산문집에서 우리에게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같은 사랑을.

나랑 할머니는 둥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엄마가 갖가지 반찬을 만드는 걸 보고는 했다. 특히 나는 엄마가 멸치를 볶을 때 이상한 기대감에 부풀곤 했는데 그건 순전히 멸치의 아름다운 빛깔과 달궈진 팬 위에서의 우아한 궤적 때문이었다. 은빛 멸치를 팬에 올리고 볶기 시작하면 엄마의 손짓 한 번에 얘들이 튀어올랐다. 팬 위에서 차글차글 소리를 내면서 공중으로 휙휙 떼로 날아가는데 그 모습이 자유로운 헤엄 같았다. 저렇게 떼로 움직이며 살아갔겠지. 무엇보다도 나는 멸치의 빛깔이 좋았다. 은화 같은 멸치들이 몇 분 사이에 팬 위에서 금빛으로 눌어붙었다. 그럼 좀, 덜 가난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럼 좀, 할머니가 덜 슬퍼할 것 같아서 그럼 좀, 환기를 할까요? 명랑하게 말하고 가게 문을 활짝 열고 볕을 쬐었다. 그렇게 삼대三代가 멸치 냄새로 매캐한 가게에서 가슴 졸이며 서로를 훔쳐보았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햇빛, 은빛, 금빛도, 낡은 팬도, 멸치도, 물엿도 할머니 백발도 돌이켜보면 모든 게 햇살 속에 있었다. 그 모든 게 사랑의 풍경이었다. _「빛」 부분

어른도 우는구나
어른도 두렵고 슬픈 거구나

8월의 한여름, 자신에게 너무도 큰 사랑을 주었던 새-엄마, 비구니의 부고를 듣고 시인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어서 아이처럼 울다 깨닫는다. 자신이 슬픔에 빠져 그 사랑을 보지 못했음을. 가진 것 없이도 오래도록 안아준 사람. 아주 느리게 성실하게 그저 걸어가라고. 자신의 몸이 망가질 때에도 사랑만 쥔 채로 내가 쓸 종이의 흰빛을 꿈꾸게 해준 사람. 텅 빈 채로 가득한 소리를 내는 목탁, 나무로 된 심장을 보며 시인은 생각한다. 이별의 순간 그가 전해주었던 가르침은 이별이 완전한 사라짐이나 소멸이 아니라 흙이었던 것의 본래 흙으로 돌아감이라는 깨달음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이야기가 남습니다. 몸이 사랑이 됩니다. 또한 그 이야기와 사랑조차 시간에 녹아 다 사라진대도 우리가 함께했다는 것, 눈부신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아요”라고 시인은 신춘문예 당선소감에서 말한 바 있다. 시인에게 ‘눈’은 분명 손바닥에 닿았는데 녹아버리는, 존재와 소멸을 동시에 보여주는 놀라운 물질이다. 이렇게 사라지면서 존재하기에 눈은, 물질이라기보다는 ‘상태’에 가깝다.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시인은 묻는다. 사람의 성분은 뭘까. 왜 빛이 났을까. 어쩌면 사람도 아주 더디게 녹고 있는 눈송이가 아니었을까.

‘언젠가는 꼭 다시 같이 살자’
내 안에 왜 이리 밝은 것들이 가득한가요

형아, 여기서는 경주가 전부 보이고 큰 나무도 보이고 산도 다 보여. 형아, 가끔씩 난 여기 선 채로 형아도 보인다고 생각해. _「능陵」 부분

동생과 어머니, 아버지와 헤어진 채로 할머니 집에 맡겨진 시인은 그곳에서 시라는 이상한 리듬을 배운다. 그에게 시는 인공관절 같은 것. 안에서 빛나며 느리게 펼쳐지는 것. 돕는 것. 삶을 무릎을 무지개처럼 일으켜 접고 걷게 하는 것. 고명재 시인은 말한다. 자신에게 시란 ‘이 사람이 존재했었다’ 그 빛나는 사실을 드러내는 능인지도 모른다고. 한겨울,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을 때 가족을 보러 찾아간 경주에선 마중 나왔던 보들보들한 동생. 그애가 자신을 데려간 눈 쌓인 언덕, 그 왕릉 위에서 잠시 바라본 시간 너머의 풍경처럼.

최소의 말, 최소의 눈빛으로 사랑을 가르쳐준 이는 떠나고 시인은 홀로 걷는다. 그러나 시인은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자신의 등과 어깨를 감싸는 어떤 손길들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 마음의 벼랑에 고드름이 슬고 무릎이 시린 시간, 그런 때야말로 우리가 온기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아름다운 숨, 입김이 보이는 것처럼. 시인에게 조끼는 구구절절한 형식과 장식은 모두 거두고 가장 소중한 것을 데우기 위해 만들어진 의복이다. 조끼는 왼팔 오른팔 거두절미하고서 심장을 감싼다. 뚫린 채로, 구멍 난 채로 사랑을 해낸다. 시인 역시 그러할 것이다.
저자

고명재

2020년조선일보신춘문예를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우리가키스할때눈을감는건』이있다.

목차

들어가며│색색마다거두는게사랑이라…9

1부│많이깎을수록곡물은새하얘진다…21
가루약…23
갈치…25
검버섯…26
검은닭…27
구순암…37
기도…40
기와…42
김밥…44
꿈…45
눈…47
눈보라…49
눈사람…51
능陵…52
능이버섯…57
더위사냥…59
도라지…61
도정搗精…62
돌…63
돌부처…66
동지…70

2부│무의땀은이토록흰빛이구나…71
두부…73
등…76
뢴트겐…77
막걸리…79
메추리알…83
목덜미…85
목련…89
목례…90
목탁…93
목화…95
무…96
물티슈…99
미농지…100
바둑돌…102
백묵白墨…103
백설기…106
백합…107
버짐…108
병간病看…109
부활절…110

3부│너무보고플땐도라지를씹어삼킨다…111
비구니…113
빛…117
뼈…122
사우나…124
살…126
삼우三虞…128
선글라스…130
설렁탕…131
설맹雪盲…133
성체聖體…135
소주…140
손목…141
송이…146
수건…148
수국…149
스티로폼…150
슬하…153
안개꽃…156
안압…158
양피지羊皮紙…161

4부│날수있음에도이곳에남은천사들처럼…163
어깨…165
연근蓮根…167
연탄…170
욕조…171
우유…174
윤潤1…175
윤2…177
윤3…178
윤4…181
시─이야기1…185
빵─이야기2…190
겨울─이야기3…195
이스트─이야기4…199
반죽─이야기5…202
메뉴─이야기6…204
입김…208
입술…209
자개농…213
장독…214
재…215

출판사 서평

“캄캄할땐당신생각을해도되겠다”

알때까지,살때까지,죽을때까지
‘사랑’이라는이상한리듬을말하기위한
시인고명재의무채색에얽힌백가지이야기!

첫시집『우리가키스할때눈을감는건』(문학동네,2022)으로독자들의큰사랑을받은고명재시인의첫산문집『너무보고플땐눈이온다』를출판사난다에서펴낸다.‘사랑’이라는이상한리듬을말하기위한무채색에얽힌백가지이야기를담았다.무채색은색상과채도가없고밝고어두운차이만있는색을말한다.흰색에서회색을거쳐검은색에이르는무채색은그자체로있지만없고없지만있는색.있고없음사이에서존재하는비존재의색이다.시인이살펴본무채속풍경은사랑이라는밥솥에서끓어오르는밥물과같다.누군가를먹이고돌보려먹이는하얀밥,흰살생선,밀가루,두부,멸치의은빛,능이버섯,간장,양갱……

8월의한여름,자신에게너무도큰사랑을주었던새-엄마,비구니의부고를듣고시인은어떤말도할수없어서아이처럼울다깨닫는다.자신이슬픔에빠져그사랑을보지못했음을.가진것없이도오래도록안아준사람.아주느리게성실하게그저걸어가라고.자신의몸이망가질때에도사랑만쥔채로내가쓸종이의흰빛을꿈꾸게해준사람.이별의순간그가전해주었던가르침은이별이완전한사라짐이나소멸이아니라흙이었던것의본래흙으로돌아감이라는깨달음이다.

“우리가사랑하는모든것은사라지지만,이야기가남습니다.몸이사랑이됩니다.또한그이야기와사랑조차시간에녹아다사라진대도우리가함께했다는것,눈부신그사실만으로충분하다는걸이제는알것같아요”라고신춘문예당선소감에서말한바있다.시인에게‘눈’은분명손바닥에닿았는데녹아버리는,존재와소멸을동시에보여주는놀라운물질이다.이렇게사라지면서존재하기에눈은,물질이라기보다는‘상태’에가깝다.눈내리는창밖을바라보며시인은묻는다.사람의성분은뭘까.왜빛이났을까.어쩌면사람도아주더디게녹고있는눈송이가아니었을까.

최소의말,최소의눈빛으로사랑을가르쳐준이는떠나고시인은홀로걷는다.그러나시인은혼자가아님을느낀다.자신의등과어깨를감싸는어떤손길들이있다.세상모든것이얼어붙는겨울.마음의벼랑에고드름이슬고무릎이시린시간,그런때야말로우리가온기로이루어진존재라는걸스스로증명하는아름다운숨,입김이보이는것처럼.시인에게조끼는구구절절한형식과장식은모두거두고가장소중한것을데우기위해만들어진의복이다.조끼는왼팔오른팔거두절미하고서심장을감싼다.뚫린채로,구멍난채로사랑을해낸다.시인역시그러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