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는 쓰기 - 詩란 1

내가 없는 쓰기 - 詩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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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그 무엇을 덜어내도 훼손되지 않고 여전히 넓은, 그런 시에 대해 생각한다.
어두워도 반짝이는, 어두운 부분도 반짝이는 시에 대해 생각한다.
위태로울 뿐 휘청이지 않는 시에 대해 생각한다.”
언제나 문학의 전위, 그 전위에서도 최전방에만 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등단 30년 차, 여덟 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에게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시의 쪽으로, 미지로, 아직 없는 곳으로 향하는 이름이 우리 시단에 있다면 단연 이수명이라 하겠다. 그러니 시로 향하되 시가 아닌 자리를 엿보는 새 시리즈 ‘詩란’의 첫머리에 놓일 응당한 이를 떠올릴 적에, 의심 없이 곧장 향할 자리 역시 바로 그 이름일 터다.
1월부터 12월까지, 그러나 날짜도 요일도 없이, 모월 모일의 ‘쓰기’를 모았다. 매일같이 썼다는 점에서 일기일 수 있겠으나 그저 하루의 형상을 남기는 기록만은 아니다. 언제나 시의 주변을 배회하며 일상의 자리를 대신해 시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여정을 담았다. 나아가려는 목적 없이, 가닿으려는 욕심 없이, 부단히 씀으로써 시를 위한 자세, 시라는 자세를 만들어가는 연습이다.

내가 쓴 모든 글이 완전히 낯설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일까. 모르는 어떤 작가의 글을 처음 읽는 것처럼 내 글을 처음 만나고 싶다. 나는 나를 만나고 싶다. 이 불가능이 가능해지도록 한 글자 한 글자 끄적거린다. (165쪽)

써지지 않으면 써지지 않는다고 쓴다. 아무 일도 없으면 아무 일도 없다고 쓴다. “시를 쓰는 일은 여전히 이상”하다고, “오래 안 되다가 되기도 한다”고 쓴다(16쪽). 그저 떠오르는 대로 쓴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직 씀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곳이 있고, 씀으로만 해방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슬픔이라는 말로 슬픔을 붙잡고” “슬픔을 지나갈 수 있”게 되듯이(262쪽).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쓰기를 묵묵히, “글은 기다려준다”(130쪽)는 점이다.
끝끝내 닿을 수 없고 장악할 수도 없는 사물의 세계, 혹은 의식 바깥의 영역으로 향하는 시인에게 쓰기는 정답을 위한 열쇠가 아니며, 다만 처음부터 잠긴 적 없는 문을 여는 일이다. 시는 자유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수단과 목적 모두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일 뿐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씀으로써, 무엇도 남기지 않고 마침내 남지 않는 곳으로 시인은 간다.

기다리지 않고, 바라지 않고, 뒤돌아서 나는 쓴다. 향하지 않는다. 쓰는 것은 바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쓰는 동안 나는 기다림과 두려움으로부터 조금 놓여난다. 쓰면서 기다림과 두려움과 그 비슷한 것들, 그것들을 역전한 것들에서 한 걸음 떨어진다. 쓰기는 멀어지기다. 틈을 만드는 것이다. 그 틈으로 호흡한다.
기다리지 않고 쓴다. 무엇인지 모른 채 쓴다. 의식의 결락이 일어난다. (21쪽)

그간의 빼어난 시집들이 시의 내부, 시쓰기의 여정이었다면 이번 ‘詩란’을 통해서는 시의 밖이자 시의 주변, 어쩌면 시의 이전부터 시의 이후까지를 포괄하는 ‘쓰기’의 영역을 시도한다. 매일 씀으로써 매일을 낚아채는 것, 하루라는 우연 앞에서 “우연을 기다리고, 우연을 알아보고, 우연을 낚아채”며 마침내 “우연을 만들 줄도 알”게 되는 것(143쪽). 그렇게 시인은 오늘이라는 우연을 만나 남김없이 쓰고, 다음 오늘을 만나러, 다음 오늘을 만들어 건너갈 것이다. 이전 시집과 다음 시집, 지금까지의 시인과 다음의 시인, 그 사이를 잇는 다리이자 건넌 뒤엔 미련 없이 털어낼 사다리와 같은 쓰기. 시인 이수명의 이 새로운 쓰기는 이후로도 이어질 예정이니, 그 첫머리를 두고 『내가 없는 쓰기』라 이름한 연유 또한 그에 짐작해본다.

시집을 낼 때마다 더 쓸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남김없이 털어낸 듯해도 다음 시집이 이어진다. 다음 시집을 내는 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다음 시인일 것이다. 나는 계속 다음 시인이 될 수 있을까. (32쪽)
저자

이수명

1994년[작가세계]를통해등단했다.2001년[시와반시]에「시론」을발표하면서평론활동을병행하고있다.시집으로『새로운오독이거리를메웠다』『왜가리는왜가리놀이를한다』『붉은담장의커브』『고양이비디오를보는고양이』『언제나너무많은비들』『마치』『물류창고』『도시가스』,연구서로『김구용과한국현대시』,시론집으로『횡단』『표면의시학』,비평집으로『공습의시대』등을펴냈다.박인환문학상,현대시작품상,노작문학상,이상시문학상,김춘수시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책머리에5
1월13
2월35
3월57
4월79
5월101
6월121
7월139
8월159
9월181
10월201
11월223
12월245

출판사 서평

아낌없이시가움트는자리,詩란
각기다른시의면면이나란하게이어져나갈
시의흰건반시의검은건반,詩란
시를이야기하는난다의새로운시리즈!

‘詩란’을시작하며

특별히‘시’를콕집어서화제로삼은자리는맞다.그러나그다음‘란’이라할적에이는거창하게지은집이나정리정돈을완전하게마친방을위시하는건아니다.‘詩란’은모서리거나귀퉁이거나가장자리와같은구석의말을사랑하는이들의면이다.발음끝에절로따라붙는물음표처럼미완으로발산되고자유로수렴된다.어쩌다시의‘알’로도읽히게된건시치미가그러하듯시가우연히낳은소소한재미일것이다.

시란무엇일까,그런질문을염두에두지않은것도아니나그품을가두려는정의또한아니다.시론보단가벼이,아포리즘보단헐거이,시산문보단느슨히,그러므로닫기보다열기에관심을둔글들이다.시라는세계,그한세계가하나의알이라면깨어서여는것이도끼일수도,주문일수도,날갯짓일수도있겠다.아무려나줄탁동기이니,쓰는이와읽는이에게동시로만열릴세계임은틀림없으리라.

기다림없이,바람없이,『내가없는쓰기』

“그무엇을덜어내도훼손되지않고여전히넓은,그런시에대해생각한다.
어두워도반짝이는,어두운부분도반짝이는시에대해생각한다.
위태로울뿐휘청이지않는시에대해생각한다.”

1.
언제나문학의전위,그전위에서도최전방에만선다는것은쉽지않은일이다.등단30년차,여덟권의시집을펴낸시인에게라면더욱그럴것이다.그럼에도한결같이시의쪽으로,미지로,아직없는곳으로향하는이름이우리시단에있다면단연이수명이라하겠다.그러니시로향하되시가아닌자리를엿보는새시리즈‘詩란’의첫머리에놓일응당한이를떠올릴적에,의심없이곧장향할자리역시바로그이름일터다.

1월부터12월까지,그러나날짜도요일도없이,모월모일의‘쓰기’를모았다.매일같이썼다는점에서일기일수있겠으나그저하루의형상을남기는기록만은아니다.언제나시의주변을배회하며일상의자리를대신해시의가능성을탐문하는여정을담았다.나아가려는목적없이,가닿으려는욕심없이,부단히씀으로써시를위한자세,시라는자세를만들어가는연습이다.

내가쓴모든글이완전히낯설어지는순간을기다리며현재를살고있는것일까.모르는어떤작가의글을처음읽는것처럼내글을처음만나고싶다.나는나를만나고싶다.이불가능이가능해지도록한글자한글자끄적거린다.(165쪽)

2.
써지지않으면써지지않는다고쓴다.아무일도없으면아무일도없다고쓴다.“시를쓰는일은여전히이상”하다고,“오래안되다가되기도한다”고쓴다(16쪽).그저떠오르는대로쓴다는의미는아니다.오직씀으로만나아갈수있는곳이있고,씀으로만해방되는순간이있기때문이다.“슬픔이라는말로슬픔을붙잡고”“슬픔을지나갈수있”게되듯이(262쪽).분명한것은이모든쓰기를묵묵히,“글은기다려준다”(130쪽)는점이다.

끝끝내닿을수없고장악할수도없는사물의세계,혹은의식바깥의영역으로향하는시인에게쓰기는정답을위한열쇠가아니며,다만처음부터잠긴적없는문을여는일이다.시는자유를위한수단이아니라수단과목적모두로부터벗어나는연습일뿐이다.그렇게끊임없이씀으로써,무엇도남기지않고마침내남지않는곳으로시인은간다.

기다리지않고,바라지않고,뒤돌아서나는쓴다.향하지않는다.쓰는것은바라는것으로부터자유로워지는것이다.자유로워지기를바라는것이아니다.쓰는동안나는기다림과두려움으로부터조금놓여난다.쓰면서기다림과두려움과그비슷한것들,그것들을역전한것들에서한걸음떨어진다.쓰기는멀어지기다.틈을만드는것이다.그틈으로호흡한다.기다리지않고쓴다.무엇인지모른채쓴다.의식의결락이일어난다.(21쪽)

3.
그간의빼어난시집들이시의내부,시쓰기의여정이었다면이번‘詩란’을통해서는시의밖이자시의주변,어쩌면시의이전부터시의이후까지를포괄하는‘쓰기’의영역을시도한다.매일씀으로써매일을낚아채는것,하루라는우연앞에서“우연을기다리고,우연을알아보고,우연을낚아채”며마침내“우연을만들줄도알”게되는것(143쪽).그렇게시인은오늘이라는우연을만나남김없이쓰고,다음오늘을만나러,다음오늘을만들어건너갈것이다.이전시집과다음시집,지금까지의시인과다음의시인,그사이를잇는다리이자건넌뒤엔미련없이털어낼사다리와같은쓰기.시인이수명의이새로운쓰기는이후로도이어질예정이니,그첫머리를두고『내가없는쓰기』라이름한연유또한그에짐작해본다.

시집을낼때마다더쓸것이남아있지않다는생각을한다.하지만남김없이털어낸듯해도다음시집이이어진다.다음시집을내는것은지금의내가아니라다음시인일것이다.나는계속다음시인이될수있을까.(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