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슬픔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그리고 아름다움을 어떻게 새로이 만들어 낼 것인가
그리고 아름다움을 어떻게 새로이 만들어 낼 것인가
[슬픔과 아름다움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는 전병준 평론가의 두 번째 비평집으로, 「슬픔과 아름다움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비타협을 유지하는 일이다」, 「새로운 빙하기를 건너는 법」 등 16편의 비평이 실려 있다. 전병준 평론가는 200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으며, [떨림과 사귐의 기호들] [김수영과 김춘수, 적극적 수동성의 시학] [슬픔과 아름다움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한국의 인문학](공저) [인문학, 정의와 윤리를 묻다](공저) 등을 썼다. 현재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병준 평론가에 따르자면 ‘아름답다’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깝다. 무슨 말인가. 전병준 평론가는 이렇게 적는다: “어쩌면 슬픔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가장 근원적인 상태는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나서 자라는 과정이란 상처와 아픔을 겪으며 거기에서 비롯하는 슬픔을 견디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과 기쁨에 대해 그토록 목말라 하는 것도 아픔과 슬픔이 그만큼 더 바탕에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란, 그리고 문학이란 삶의 근저에 있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또한 그에 대한 해석이란 슬픔에 대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 슬픔에 대한 해석을 시작하는 것, 우리에게 닥쳐오는 슬픔에 좌절하거나 탐닉하지 않고 강인하게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으나 잊어버린 것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 곧 아는 대상답다는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을 떠올리는 일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아름답다는 ‘알다’와 ‘답다’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로, ‘알고 있는 것답다’ 혹은 ‘아는 대상답다’는 뜻이니, 여기에는 우리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상기(想起)의 행위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사유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잊어버린 것을 오늘에 살아 있게 하는 행위이다.”
요컨대 ‘기억’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가장 근원적인 상태” 곧 ‘슬픔’을 떠올리는 일이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어떤 상태를 표현한다기보다 ‘기억’을 재차 수행하는 능동사다. 즉 ‘슬픔’을 기억하는 일을 다시 기억하는 행위가 ‘아름답다’의 “진정한 의미”다. 따라서 ‘아름답다’는 재귀적인 맥락을 형성하며 그런 만큼 그 자신을 포함하여 세계를 재정위하고자 하는 실천적 인식인 셈이다. 정식화하자면 시는 ‘슬픔’을 ‘기억하기’다. 그리고 비평은 ‘슬픔을 기억하기를 기억하기’다. 그런데 앞에 적은 문장들은 곧장 수정되어야겠는데, 쓰기와 읽기는 비평뿐만 아니라 이미 시에서도 진행되는 바이며, “쓴다는 행위는 곧 읽는 행위”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즉 시와 비평은 공히 ‘슬픔을 기억하기를 기억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무엇을 뜻하고 입증하는가? 이는 당장 시와 비평 간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시와 비평은 재귀적 맥락의 동사 ‘기억하기’를 함께 진행한다. 이를 두고 ‘공감(Einfühlung)’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공감’은 “과정이며 결과이고, 결과이며 과정”이며, 그래서 “능동과 수동이 함께 얽혀 있고, 과정과 결과가 서로 엮여 있는 작용/현상이며 동시에 운동/사건”이다. 사유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전병준 평론가의 이 결연한 정의는 단지 비평의 위상을 시 곁에 어떻게든 비끄러매고자 노력해 왔던 지금까지의 숱한 매혹과 경이의 고백 혹은 정반대의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은 샴쌍둥이에 지나지 않는 냉소와 탄식과는 분명 층위가 다르다.
전병준 평론가에 따르자면, 시와 비평은 삶의 “근원적인 상태”인 ‘슬픔’을 공유하고 그것을 복원하며 그 과정을 통해 ‘슬픔’을 사유하면서 그 사유 자체를 재사유하는 동시적 운동이자 사건이다. 전병준 평론가가 터놓은 아름다움을 향한 도정은 정태적인 미적 아우라를 해체하고 세계와 자기 자신을 무한 갱신하는 인식-실천이자 윤리다. 이렇게 말이다: “오이디푸스처럼 지혜를 얻고자 하는 자는 뼈아픈 고통과 슬픔을 짊어질 희망을 지녀야 한다. 오직 그때에만 고통과 슬픔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시인이 실천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전병준 평론가에 따르자면 ‘아름답다’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깝다. 무슨 말인가. 전병준 평론가는 이렇게 적는다: “어쩌면 슬픔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가장 근원적인 상태는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나서 자라는 과정이란 상처와 아픔을 겪으며 거기에서 비롯하는 슬픔을 견디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과 기쁨에 대해 그토록 목말라 하는 것도 아픔과 슬픔이 그만큼 더 바탕에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란, 그리고 문학이란 삶의 근저에 있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또한 그에 대한 해석이란 슬픔에 대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 슬픔에 대한 해석을 시작하는 것, 우리에게 닥쳐오는 슬픔에 좌절하거나 탐닉하지 않고 강인하게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으나 잊어버린 것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 곧 아는 대상답다는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을 떠올리는 일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아름답다는 ‘알다’와 ‘답다’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로, ‘알고 있는 것답다’ 혹은 ‘아는 대상답다’는 뜻이니, 여기에는 우리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상기(想起)의 행위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사유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잊어버린 것을 오늘에 살아 있게 하는 행위이다.”
요컨대 ‘기억’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가장 근원적인 상태” 곧 ‘슬픔’을 떠올리는 일이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어떤 상태를 표현한다기보다 ‘기억’을 재차 수행하는 능동사다. 즉 ‘슬픔’을 기억하는 일을 다시 기억하는 행위가 ‘아름답다’의 “진정한 의미”다. 따라서 ‘아름답다’는 재귀적인 맥락을 형성하며 그런 만큼 그 자신을 포함하여 세계를 재정위하고자 하는 실천적 인식인 셈이다. 정식화하자면 시는 ‘슬픔’을 ‘기억하기’다. 그리고 비평은 ‘슬픔을 기억하기를 기억하기’다. 그런데 앞에 적은 문장들은 곧장 수정되어야겠는데, 쓰기와 읽기는 비평뿐만 아니라 이미 시에서도 진행되는 바이며, “쓴다는 행위는 곧 읽는 행위”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즉 시와 비평은 공히 ‘슬픔을 기억하기를 기억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무엇을 뜻하고 입증하는가? 이는 당장 시와 비평 간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시와 비평은 재귀적 맥락의 동사 ‘기억하기’를 함께 진행한다. 이를 두고 ‘공감(Einfühlung)’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공감’은 “과정이며 결과이고, 결과이며 과정”이며, 그래서 “능동과 수동이 함께 얽혀 있고, 과정과 결과가 서로 엮여 있는 작용/현상이며 동시에 운동/사건”이다. 사유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전병준 평론가의 이 결연한 정의는 단지 비평의 위상을 시 곁에 어떻게든 비끄러매고자 노력해 왔던 지금까지의 숱한 매혹과 경이의 고백 혹은 정반대의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은 샴쌍둥이에 지나지 않는 냉소와 탄식과는 분명 층위가 다르다.
전병준 평론가에 따르자면, 시와 비평은 삶의 “근원적인 상태”인 ‘슬픔’을 공유하고 그것을 복원하며 그 과정을 통해 ‘슬픔’을 사유하면서 그 사유 자체를 재사유하는 동시적 운동이자 사건이다. 전병준 평론가가 터놓은 아름다움을 향한 도정은 정태적인 미적 아우라를 해체하고 세계와 자기 자신을 무한 갱신하는 인식-실천이자 윤리다. 이렇게 말이다: “오이디푸스처럼 지혜를 얻고자 하는 자는 뼈아픈 고통과 슬픔을 짊어질 희망을 지녀야 한다. 오직 그때에만 고통과 슬픔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시인이 실천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슬픔과 아름다움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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