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지금’은 언제나 새로 돋아나는 잎이다
[야생]은 이향지 시인의 여섯 번째 신작 시집으로, 「거미」, 「별이 보고 싶다」, 「지금-에필로그」 등 62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향지 시인은 1942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1989년 [월간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괄호 속의 귀뚜라미] [구절리 바람 소리]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내 눈앞의 전선] [햇살 통조림] [야생], 에세이집 [산아, 산아] [북한 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를 썼다.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했다.
‘지금-시간’은 실존적 시간이다. 한 인간의 삶은 무수한 ‘지금’으로 구성되며, 실존의 드라마는 그 ‘지금들’이 현재, 즉 ‘지금-시간’으로 다시 떠오르는 존재론적 사건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정전’이라는 일상적 사건이 시인을 “조그만 사기 등잔에 석유를 붓고, 심지 끝을 돋우어서 불을 밝”히던 유년의 할아버지 댁으로, 석유 대신 “토막 초를 얻어 두었다 빌린 책을 읽”던 기억 속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인은 이러한 시간의 실존적 의미를 “‘나’를 따라 옮겨 다니는 ‘지금’이라는 삼각점”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이것이 바로 “나는 ‘지금’의 축적이다”라는 진술의 의미이다. 삶이 ‘지금’의 연속이라는 것, 그리하여 “‘지금’은 언제나 새로 돋아나는 잎이다”라는 주장은, 인간의 삶이 결코 ‘지금’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지금-에필로그」) 이러한 ‘지금’의 시간론은 과거의 ‘지금’이 현재의 ‘지금’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시시때때로 과거의 ‘지금’이 현재의 ‘지금’으로 흘러들거나 현재의 ‘지금’이 지닌 안정성에 균열을 발생시키면서 떠오른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시’는 결국 과거의 ‘지금’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인간의 삶은, 매 순간의 ‘지금’은, 이미-항상 과거라는 시간의 침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이러한 시간의 귀환 현상을 가리켜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온다’고 말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기억 저편의 ‘지금들’은 시시때때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현재의 ‘지금’이 불러들이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스스로 되돌아온다. 실존의 시간은 바로 그렇게 흐른다. 과거의 ‘지금’은 이미-항상 현재의 ‘지금’으로 도래한다. 이 과거의 ‘지금’으로 인해 현재의 ‘지금’은 유의미한 시간이 된다. 인간의 삶에서 이러한 시간의 틈입이 발생하지 않는 ‘지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지금’은 언제나 새로 돋아나는 잎이다”라는 시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시가 실증하는 시간의 존재론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의 삶에서 ‘지금’이 그 안에 숱한 시간을 응축하고 있음을, 과거의 ‘지금들’이 솟아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가능성이야말로 인간이 현재를 새롭게 감각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간의 존재론을 통해 ‘지금’을 새롭게 경험하게 될 때, 시는 동일성의 반복을 치유하는 해독제가 된다. 시인은 시의 이러한 존재론적 위상을 “내가 하루를 사는 동안 너는 천년을 떠돌아 살아 다오”라고 표현한다(「시 11」). 한 개인의 시간은 유한하다. 하지만 시는 그 유한한 시간을 재료로 삼아 항상 새로운 ‘지금’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무한한 시간인 것이다. (이상 고봉준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지금-시간’은 실존적 시간이다. 한 인간의 삶은 무수한 ‘지금’으로 구성되며, 실존의 드라마는 그 ‘지금들’이 현재, 즉 ‘지금-시간’으로 다시 떠오르는 존재론적 사건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정전’이라는 일상적 사건이 시인을 “조그만 사기 등잔에 석유를 붓고, 심지 끝을 돋우어서 불을 밝”히던 유년의 할아버지 댁으로, 석유 대신 “토막 초를 얻어 두었다 빌린 책을 읽”던 기억 속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인은 이러한 시간의 실존적 의미를 “‘나’를 따라 옮겨 다니는 ‘지금’이라는 삼각점”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이것이 바로 “나는 ‘지금’의 축적이다”라는 진술의 의미이다. 삶이 ‘지금’의 연속이라는 것, 그리하여 “‘지금’은 언제나 새로 돋아나는 잎이다”라는 주장은, 인간의 삶이 결코 ‘지금’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지금-에필로그」) 이러한 ‘지금’의 시간론은 과거의 ‘지금’이 현재의 ‘지금’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시시때때로 과거의 ‘지금’이 현재의 ‘지금’으로 흘러들거나 현재의 ‘지금’이 지닌 안정성에 균열을 발생시키면서 떠오른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시’는 결국 과거의 ‘지금’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인간의 삶은, 매 순간의 ‘지금’은, 이미-항상 과거라는 시간의 침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이러한 시간의 귀환 현상을 가리켜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온다’고 말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기억 저편의 ‘지금들’은 시시때때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현재의 ‘지금’이 불러들이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스스로 되돌아온다. 실존의 시간은 바로 그렇게 흐른다. 과거의 ‘지금’은 이미-항상 현재의 ‘지금’으로 도래한다. 이 과거의 ‘지금’으로 인해 현재의 ‘지금’은 유의미한 시간이 된다. 인간의 삶에서 이러한 시간의 틈입이 발생하지 않는 ‘지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지금’은 언제나 새로 돋아나는 잎이다”라는 시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시가 실증하는 시간의 존재론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의 삶에서 ‘지금’이 그 안에 숱한 시간을 응축하고 있음을, 과거의 ‘지금들’이 솟아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가능성이야말로 인간이 현재를 새롭게 감각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간의 존재론을 통해 ‘지금’을 새롭게 경험하게 될 때, 시는 동일성의 반복을 치유하는 해독제가 된다. 시인은 시의 이러한 존재론적 위상을 “내가 하루를 사는 동안 너는 천년을 떠돌아 살아 다오”라고 표현한다(「시 11」). 한 개인의 시간은 유한하다. 하지만 시는 그 유한한 시간을 재료로 삼아 항상 새로운 ‘지금’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무한한 시간인 것이다. (이상 고봉준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야생 (이향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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