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그럼에도 확실한 것이 있다면, 여전히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는 정재훈 평론가의 첫 번째 비평집으로, 「‘문’ 앞에서 쓴, 당신께 보내는 편지」 「마음에서의 시, 그것을 바라보는 비평」 「당신(들)이 말하는 ‘새로움’에 대한 개인적인 의심」 등 25편의 비평이 실려 있다.
정재훈 평론가는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재일코리안 문학과 조국](공저) [키워드로 읽는 아프리카 소설 2](공저)를 썼고, [‘재일’이라는 근거](다케다 세이지 저, 공역)를 옮겼다. 경희대학교, 광운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뉴래디컬 리뷰]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패’의 문법은 흔히 겸양사의 정중한 표현으로 쓰이거나, 좀 더 적극적으로는 ‘실패’를 극복의 대상 또는 과정으로 삼아 보다 정련된 자기를 기획하려는 전략적 장치로 활용되곤 한다. 그런데 이때 ‘실패’는 결국 성공을 향한 도정이거나 그것의 샴쌍둥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과감하게 말하자면 우리 세계에서 ‘실패’는 애초부터 논외였던 셈이다. 그런데 ‘실패’를 주저 없이 고백하고 자인하는 평론가가 등장했다. 이번에 첫 비평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를 펴낸 정재훈 평론가가 바로 그다. 정재훈 평론가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자면 우리 세계에 횡행하는 ‘실패’의 용법은 실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그릇된 인식”이며, “그리고 그 인식에는 누군가의 ‘살아 있음’을 배제하려는 악의가 숨겨져 있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우리 세계에서 실패의 선택적 배제는 참혹하게도 “가난한 목숨들”에게 “무관용의 낙인”을 찍는다. 생각해 보면 ‘실패’는 쓰기와 읽기의 과정 내내 작동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기원이자 나날의 삶이 진행되는 곳곳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상황인데 말이다. 그러니 “실패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정재훈 평론가의 말은 “살아 있음”의 징표로서 ‘실패’를 다시 발견하자는 제안이자, ‘실패’와 더불어 살아갈 새로운 가능성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며, 나아가 “생존의 논리”로 전락한 ‘실패’를 인간 본연의 구성적 조건으로 끌어안자는 선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재훈 평론가는 이를 두고 자신의 비평집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의 지면 여기저기에 “시를 쓰려는/쓰는 마음”이라고 옮겨 적는다. “지금도 어디선가 시를 쓰려는/쓰는 마음은 생존의 논리가 예상하지 못할 결과물인 시를 토해 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울리는 소리야말로 지금의 위기를 견디며 사는 누군가에게 온기와 위로를 줄 수 있는 시이며, 인간다운 용기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울고 있다면, ‘마음’을 지닌 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똑같은 울음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까지 무감각해져 가고 있는 이곳의 무시무시한 변이를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정재훈 평론가의 첫 비평집의 제목은 이해의 불완전함에 따른 불안의 토로가 아니라 비로소 진정한 이해와 소통을 가능하게 출발지로 ‘실패’를 적극 수용한 자의 자기 갱신의 모멘트다. 이렇게 말이다. “저마다의 시는 울림/흐름을 내장하고 있다. 한 편의 시도 읽는 이에 따라 그 울림/흐름이 제각각이다. 어제의 경험으로 비춰 보고 내일의 가능성으로 열리게 될 또 다른 읽기, 그렇게 다시 알아보기가 허락되는 여백이 있기에 우리 각자의 공책에 서로 다른 무늬들이 물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정재훈 평론가는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재일코리안 문학과 조국](공저) [키워드로 읽는 아프리카 소설 2](공저)를 썼고, [‘재일’이라는 근거](다케다 세이지 저, 공역)를 옮겼다. 경희대학교, 광운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뉴래디컬 리뷰]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패’의 문법은 흔히 겸양사의 정중한 표현으로 쓰이거나, 좀 더 적극적으로는 ‘실패’를 극복의 대상 또는 과정으로 삼아 보다 정련된 자기를 기획하려는 전략적 장치로 활용되곤 한다. 그런데 이때 ‘실패’는 결국 성공을 향한 도정이거나 그것의 샴쌍둥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과감하게 말하자면 우리 세계에서 ‘실패’는 애초부터 논외였던 셈이다. 그런데 ‘실패’를 주저 없이 고백하고 자인하는 평론가가 등장했다. 이번에 첫 비평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를 펴낸 정재훈 평론가가 바로 그다. 정재훈 평론가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자면 우리 세계에 횡행하는 ‘실패’의 용법은 실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그릇된 인식”이며, “그리고 그 인식에는 누군가의 ‘살아 있음’을 배제하려는 악의가 숨겨져 있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우리 세계에서 실패의 선택적 배제는 참혹하게도 “가난한 목숨들”에게 “무관용의 낙인”을 찍는다. 생각해 보면 ‘실패’는 쓰기와 읽기의 과정 내내 작동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기원이자 나날의 삶이 진행되는 곳곳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상황인데 말이다. 그러니 “실패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정재훈 평론가의 말은 “살아 있음”의 징표로서 ‘실패’를 다시 발견하자는 제안이자, ‘실패’와 더불어 살아갈 새로운 가능성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며, 나아가 “생존의 논리”로 전락한 ‘실패’를 인간 본연의 구성적 조건으로 끌어안자는 선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재훈 평론가는 이를 두고 자신의 비평집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의 지면 여기저기에 “시를 쓰려는/쓰는 마음”이라고 옮겨 적는다. “지금도 어디선가 시를 쓰려는/쓰는 마음은 생존의 논리가 예상하지 못할 결과물인 시를 토해 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울리는 소리야말로 지금의 위기를 견디며 사는 누군가에게 온기와 위로를 줄 수 있는 시이며, 인간다운 용기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울고 있다면, ‘마음’을 지닌 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똑같은 울음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까지 무감각해져 가고 있는 이곳의 무시무시한 변이를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정재훈 평론가의 첫 비평집의 제목은 이해의 불완전함에 따른 불안의 토로가 아니라 비로소 진정한 이해와 소통을 가능하게 출발지로 ‘실패’를 적극 수용한 자의 자기 갱신의 모멘트다. 이렇게 말이다. “저마다의 시는 울림/흐름을 내장하고 있다. 한 편의 시도 읽는 이에 따라 그 울림/흐름이 제각각이다. 어제의 경험으로 비춰 보고 내일의 가능성으로 열리게 될 또 다른 읽기, 그렇게 다시 알아보기가 허락되는 여백이 있기에 우리 각자의 공책에 서로 다른 무늬들이 물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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