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밤을 다 헤아리지 않는 것은 희극이다 비극은 헤아릴 것이 너무 많을 때 찾아온다
[점점점 볼링볼링]은 김익경 시인의 두 번째 신작 시집으로, 「고독감별사」 「100분 토론」 「비문증」 48편이 실려 있다.
김익경 시인은 울산에서 태어났고, 2011년 [동리목월]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모음의 절반은 밤이다] [점점점 볼링볼링]을 썼다.
김익경 시인은 우리가 너무 쉽게 낙관하는 것을 경계하며 절망과 피폐함으로 고립된 존재의 부정성을 형상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점점점 볼링볼링]이 궁구하는 바는 표제작에서 알 수 있듯이 “차마 젠장이라고 발음할 수 없”어 “된장”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모독과 모욕을 감내함으로써 왜소화된 채 “장롱”에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는 주체의 고통을 우리가 여실히 감각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점점점 볼링볼링」). 유폐된 존재가 자신을 증명할 방법은 없기에, “나는 있습니까 없습니까”를 묻더라도 “나는 있습니다 없습니다”라고 스스로 답할 수밖에 없다(「나는 진짜일까요」). 모순된 정체성으로 자신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주체는 ‘진짜’ 자신을 돌보는 대신 “누구도 잡지 않지만/스스로 붙잡히는 무모한 손금들”의 무의미 속으로 침잠하고 만다(「되돌이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 불가해한 절망을 김익경 시인의 세계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는 불가해한 절망을 내면화한 주체를 향한 시인의 애정이 삶의 부정성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의 아픔을 성찰함으로써 맺는 관계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데 집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비록 때를 놓쳐 관계를 회복할 기회조차 마련할 수 없더라도 “오늘보다 먼저인 어제”를 톺아 “뒤따르기만 했던/저번을 곰곰이 쳐다”보며(「먼저」)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 ‘세 시’와 ‘네 시’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타자와의 거리로 마련하여 안온한 삶의 방식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누구의 희생 따위는 없어”야 한다는 것, “불편을 감당하는 일”을 “불편을 사랑하는 일”로 여기며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손을 버려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행하도록 우리를 이끈다(「홀릭」).
김익경 시인은 주의해야 할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섣부른 환대는 오히려 불편을 양산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성급하게 간극을 메우려다 보면 존재가 지닌 비동시적 동시성을 무너뜨려 다른 형태의 폭력을 강제할 위험이 농후하다. 같은 시간에 있다 하더라도 타자와의 거리를 간과한다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개별 주체의 다양성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입술을 듣”기 위해 “입술만 바라보”며 그 너머의 “얼굴을 지우”는 협소한 관계로 전락할 따름이다(「너를 보기 위해 나를 본다면」). ‘너’를 보기 위해 ‘나’를 보는 것은 이기적 행위일 뿐이다. ‘너’를 ‘너’대로, ‘나’를 ‘나’대로 둘 수 있는 것이야말로 관계 맺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타자의 존재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이자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부를 때까지 오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다(「그림자의 탄생」). 이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 오늘”처럼 자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열쇠”처럼 우리가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기에 늘 잊고 사는 것이기도 하다(「금요일」). (이상 이병국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김익경 시인은 울산에서 태어났고, 2011년 [동리목월]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모음의 절반은 밤이다] [점점점 볼링볼링]을 썼다.
김익경 시인은 우리가 너무 쉽게 낙관하는 것을 경계하며 절망과 피폐함으로 고립된 존재의 부정성을 형상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점점점 볼링볼링]이 궁구하는 바는 표제작에서 알 수 있듯이 “차마 젠장이라고 발음할 수 없”어 “된장”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모독과 모욕을 감내함으로써 왜소화된 채 “장롱”에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는 주체의 고통을 우리가 여실히 감각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점점점 볼링볼링」). 유폐된 존재가 자신을 증명할 방법은 없기에, “나는 있습니까 없습니까”를 묻더라도 “나는 있습니다 없습니다”라고 스스로 답할 수밖에 없다(「나는 진짜일까요」). 모순된 정체성으로 자신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주체는 ‘진짜’ 자신을 돌보는 대신 “누구도 잡지 않지만/스스로 붙잡히는 무모한 손금들”의 무의미 속으로 침잠하고 만다(「되돌이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 불가해한 절망을 김익경 시인의 세계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는 불가해한 절망을 내면화한 주체를 향한 시인의 애정이 삶의 부정성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의 아픔을 성찰함으로써 맺는 관계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데 집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비록 때를 놓쳐 관계를 회복할 기회조차 마련할 수 없더라도 “오늘보다 먼저인 어제”를 톺아 “뒤따르기만 했던/저번을 곰곰이 쳐다”보며(「먼저」)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 ‘세 시’와 ‘네 시’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타자와의 거리로 마련하여 안온한 삶의 방식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누구의 희생 따위는 없어”야 한다는 것, “불편을 감당하는 일”을 “불편을 사랑하는 일”로 여기며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손을 버려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행하도록 우리를 이끈다(「홀릭」).
김익경 시인은 주의해야 할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섣부른 환대는 오히려 불편을 양산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성급하게 간극을 메우려다 보면 존재가 지닌 비동시적 동시성을 무너뜨려 다른 형태의 폭력을 강제할 위험이 농후하다. 같은 시간에 있다 하더라도 타자와의 거리를 간과한다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개별 주체의 다양성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입술을 듣”기 위해 “입술만 바라보”며 그 너머의 “얼굴을 지우”는 협소한 관계로 전락할 따름이다(「너를 보기 위해 나를 본다면」). ‘너’를 보기 위해 ‘나’를 보는 것은 이기적 행위일 뿐이다. ‘너’를 ‘너’대로, ‘나’를 ‘나’대로 둘 수 있는 것이야말로 관계 맺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타자의 존재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이자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부를 때까지 오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다(「그림자의 탄생」). 이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 오늘”처럼 자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열쇠”처럼 우리가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기에 늘 잊고 사는 것이기도 하다(「금요일」). (이상 이병국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점점점 볼링볼링 - 파란시선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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