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지나가는 길에 서 있었다 (김종윤 시집)

저녁이 지나가는 길에 서 있었다 (김종윤 시집)

$13.38
Description
존재의 삶을 발견하고 이름을 지어주는 시
김종윤 시인의 시집 『저녁이 지나가는 길에 서 있었다』가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초목을 뭉뚱그려 잡초나 잡목이라고 부르지 않고 하나하나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준다. 풀이나 나무 이름을 잘 안다는 사실에서 시인의 독특한 삶의 면모와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잘 드러난다.

금강초롱꽃은,
식민지 시대 가슴 아픈 이야기가 담긴 우리 꽃이지
세상에는 점점 잊히는 이름도 있고
새롭게 고쳐 부르는 이름도 있지만
금강초롱 청초한 이름에는
우리 몸에 아리게 새겨진 빗살무늬처럼
골마다 이랑마다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있지
금강산 바람처럼 금강산 바위처럼
금강산 붉은 소나무처럼
지금도 금강산에서 초롱불로 피고 지는 꽃
-「금강초롱꽃」 부분

나무 이름, 풀이름, 새 이름을 잘 안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존재자에 관심이 많고, 존재자를 사귀며 관찰하는 시간을 오래 가져서 저마다의 다름을 안다는 것이고, 세계의 다양성을 온몸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시인의 자연 친화적인 성향이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도감을 통해 배운 지식이 아니라 생활 현장에서 필요한 만큼 자연스럽게 몸으로 느끼고 익힌 이름들이기에 존재자마다 이름을 알기까지 많은 사연 또한 깃들어 있을 것이다. 몸소 경험한 존재자들의 개성 있는 표현을 놓치지 않고 시로 옮기는 김종윤 시인의 시를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사귐의 노래라고 부를 수 있다.

다람쥐 볼은 볼록볼록 배부른 아기집이라서
비단벌레를 낳고
붉은박쥐를 낳고
하늘다람쥐를 낳고
참수리를 낳고
스라소니를 낳지

우리가 진즉에 지워버린 이름들
-「숲으로 가는 다람쥐」 부분

시인에게 시는 새롭게 이름 짓는 일을 거쳐 생긴다. 이름 짓는 일에는 “이름뿐인 허울의 껍질을 벗”(「기둥」)기고, 이름의 실속을 되찾는 일도 포함된다. 시에서 이름이 어떤 생각이나 뜻이 깃든 낱말일 뿐 아니라 저임을 이르는 일이라면 이름은 어떤 뜻을 다 이룬 것이라기보다 이루어지는 가운데에 있는 일, 곧 어떤 됨됨이, 곧 존재 자체를 이르는 일이라고 여길 수 있다.

밑이 좁아야 쓰러져!

깨진 플라스틱 두레박을 대신할 요량으로 결 좋은 목재를 골라 마름질하고 대패질해서 두레박을 내놓았네 옆에 서서 말없이 보고 계시던 늙은 아버지가 건넨 한마디 말씀

깊은 우물 맑은 물을 힘 있게 길어 올릴 욕심으로, 기술 선생 실력으로 모양 좋은 두레박을 만들었지만 물 위에서 쓰러지지 않는 두레박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바닥에서 넘어져야 비로소 물에 잠기고 속을 채워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아직도 모르고 살고 있네
-「두레박」 전문

두레박으로 달고 시원한 우물물을 길어 마시던 일은 전설이 되었다. 두레박은 모양만 좋을 것이 아니라 우물물에 닿았을 때 잘 넘어져야 제구실을 다할 수 있다. “바닥에서 넘어져야 비로소 물에 잠기고 속을 채워 다시 일어설 수 있음”, 이것이 두레박의 이름에 담긴 본래의 뜻이다. ‘두레’가 “농촌에서 농사일이 바쁠 때 서로 도와서 공동으로 일하기 위하여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이고 ‘박’은 물 떠먹는 바가지를 뜻하므로 마을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도구의 이름으로 이보다 더 좋은 말을 찾기 힘들 것이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사라지는 세태, 존재 자체를 망각하고 사는 현실에서 시인은, 저마다 제자리에서 제 빛깔과 제소리만으로 아름다운 임들의 존재를 시에 모시려고 애쓴다.
시인은 세상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시인은 누구나 체험하고 있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을 말하고, 그냥 지나친 것을 말하고, 그렇게 표현할 생각을 해보지 못한 어떤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시인은 좋았던 일이지만 우리가 잊고 사는 존재도 드러내 밝힌다. 우리의 혼란스러운 느낌이나 감정을 말로 잘 표현하면 그 지각 현실과 감정의 현실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느낌이나 감정에 적실한 이름을 붙이고 서로 공감하면서 느낌이나 감정이 질서를 찾게 도와주는 김종윤 시인의 존재의 향연이 독자를 초대한다.
저자

김종윤

충북옥천에서태어나1998년『공무원문학』으로등단하였다.시집으로『새벽을기다리는마음』,『텃밭,생명의노래』,『길에게길을묻다』,『네모난바퀴를가졌네』,『나뭇잎발자국』,『금강천리길』,『기술교사의학교일기』가있다.현재‘화요문학’,‘좌도시’,‘해밀’동인으로활동하고있다.

목차

제1부
저섬에가고싶다·11
낫들·12
흰종이한장위의꿈·14
가을비냄새·16
눈을감으면·18
봄끝에비로소꿀벌한마리·20
시몬바일스,아름다운그녀·21
암탉의아침·22
층층나무우산·24
봄비안부·25
검둥개·26
오색1·28
11월·30
저녁이지나가는길에서있었다·31
276·32

제2부
그림자·35
대숲에서면·36
숲으로가는다람쥐·38
겨울무창포·40
빗살무늬들·41
이명에게·42
주름잎·44
적막(寂寞)·45
오색2·46
꽃눈·47
한가한날·48
금강초롱꽃·50
이쪽·52
국화들·54
두레박·56

제3부
나비야소풍가자·59
경운기·60
땅강아지·62
마침내·64
상처가기우는세개의풍경·66
어둠속에서우리는·68
멀어지는물살처럼·70
미선나무어머니·71
밀렵·72
탁란·74
피라미들·75
이런,이런,이런·76
포도밭터·78
고구마를사랑하는방법·80
기둥·81

제4부
노(老)각·85
3등·86
연필깎는밤·88
길을잃다·90
꿀벌에게·93
삼십년·94
오래된공·95
길을깨트리다·96
낙엽들·98
늙은메타세쿼이아·99
동병상련·100
동행·102
어떤안부·103
기권이라는용기·104

해설│권덕하·105
시인의말·119

출판사 서평

(약평)
존재와감각의집이되는언어가있습니다.고유한임의몸이되는시가있습니다.임의고유한표현으로어둠을사르며밤을밝히는시인이있습니다.시덕분에임의양태는사라져도임이남긴존재의흔적을통해저임은보존됩니다.희망없는시대,희망이고문한다는말이횡행하는시대에빛의섬이있습니다.임들사이에감각들의일어섬이있고다가섬이있습니다.관계의섬,내삶에서서로몸을주고받는섬,나와임이함께하는섬,우리가회통하여한식구가되는자리에서어둠을밝히는섬,“가슴응어리가풀리”고,“짠내절은상처를꺼내어널어도부끄럽지않을것같은빛의섬”은저임의아름다운표현으로충만한시가아닐까요.
_권덕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