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 시집을 덮을 즈음이면 위로를 받은 사람이 되어 있다
“하느님도 모르는 마음자리를 주체할 수 없을 때, 일기로도, 편지로도, 산문으로도 양에 차지 않을 때 시를 썼다. 내가 바라는 것은 화려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소소한 것들이 부족하고 그리웠다. 세상에는 무수한 시가 있지만, 어딘가가 헐겁거나 빡빡하고 더러는 이가 빠져 있었다. 아귀가 꼭 맞는 시 한 편 써놓고 오래 위안 받곤 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시를 썼다.”(김영선)
위로 받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
아내가 있는 남자들에게
남편이 있는 여자들에게
그리고 자유를 찾은 여자에게 남자에게
그리고 내 세상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1부는 대체로 ‘밥’을 벌고, ‘밥’을 하고, ‘밥’을 먹는 이야기들이다. ‘밥’은 벌기도 힘들고, ‘짓기’도 힘들고, 사는 게 녹록치 않을 때는 입안이 까슬해서 ‘먹기’도 힘들다. ‘밥’은 언제나 과제이고 명제이고 답이었다. 거간꾼인 남편을 도와 밥을 버는 시인은, 대체로 전 재산을 들고 와 각자의 형편에 맞는 집을 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시를 발견하기도 한다. ‘부동산과 시’가 동질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한정된 땅덩어리를 밟고 살아야 하는 거의 모든 유동의 인간들에게 ‘집’만큼 크고 중대한 일도 드물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은 단순히 물리적인 부동산일 뿐만 아니라 한 생애의 희노애락 결과물이도 해서 집을 사고 팔고, 세를 얻기 위해 부동산 중개업소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급매로 집을 처분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대로가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한다.
2부는 가족 이야기다. 어려서 집 나간 엄마를 찾아가는 아버지 따라 길을 나섰다가 하필이면 굴비두릅처럼 포승줄에 엮이어 어슬렁거리며 걷는 죄수 무리를 만났던 것을 복선으로 깔았다. 그날, 금의환향하는 어떤 무리를 만났더라면 시인의 생애는 달라졌을까 궁금하다. 전 우주를 다 털어도 ‘핏줄’을 잘라낼 수 있는 연장은 없다. 하나님도 그것이 되지 않아 천국을 만들고, 부처도 인연설을 설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핏줄로 엮인 사람들 간의 이야기는 마냥 슬프기만 하고 마냥 아프기만 하고 마냥 행복하기만 하지도 않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이해가 되어 버려져 화가 나기도 하는 사람들이라서 드디어 시가 되기도 한다. 시인에게 가족은 시어이다.
3부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를 말하려고 했다. 천체물리학자들은 우주도 언젠가는 소멸하여 사라질 것이라고 하는데, 한갓 100년도 다 못살고 갈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 왜 그 후의 일이 궁금하고, 내가 없는 우주가 부모 잃은 고아처럼 외로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왜 하는 것일까. 뽀글파마에 몸뻬 바지 차림으로 동네를 누비는 아줌마에게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랑’ 같은 것이 있을까? 우리 모두는 누구에게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랑’하는 그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버스가 하루 두 차례 들어오는 외딴 동네, 뒤로 깊은 산을 숨겨두고 있는 유물 같은 구멍가게에서는 유통기한 지난 과자나 음료수 말고 사랑을 팔았으면 좋겠다”라고 노래한다. 이렇게 작고 의기소침한 나도 누군가에게 유통기한 10만년도 더 남은 사랑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면, 먼먼 우주의 시간도 기꺼이 기다려 외로움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4부는 근원 이야기다. 어디에나 신은 있다. 그리고 신은 아무 곳에도 없다. 신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면 서운하다. 그래서 시인은 “한때 나는 나를 삼세의 바다를 흘러가는 조각배라 여기던 적 있었”지만 이제는 “세수대야 냉면 사발보다 너른 우주 어디에 하다못해, 이슬방울만한 내세 하나 따로 없다”고 여기면서도, “맹,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저 좀 더 긴 이별일 뿐인 것도 같”다고 자조한다. 그리고 최첨단 과학으로도 밝혀지지 않는 세상사 일은 얼마든지 있어서 가끔, 먼저 가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또 다른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부러도 한다. 그리움은 고장이 나지 않는 천연 점등이기 때문이다. 한때 “근시안의 내 안에 삼세가 폭설처럼 내리 쌓이던 곳 그 질로 걷잡을 수 없이 길을 잃기 시작했던 곳”도 있는 시인의 영혼은 아직은 “멀리 날아와 죽은 나뭇가지에 오래 앉아 있는 새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우주와 소우주 사이를, 은하의 세계를 가만가만 더듬어가고 있다.
위로 받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
아내가 있는 남자들에게
남편이 있는 여자들에게
그리고 자유를 찾은 여자에게 남자에게
그리고 내 세상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1부는 대체로 ‘밥’을 벌고, ‘밥’을 하고, ‘밥’을 먹는 이야기들이다. ‘밥’은 벌기도 힘들고, ‘짓기’도 힘들고, 사는 게 녹록치 않을 때는 입안이 까슬해서 ‘먹기’도 힘들다. ‘밥’은 언제나 과제이고 명제이고 답이었다. 거간꾼인 남편을 도와 밥을 버는 시인은, 대체로 전 재산을 들고 와 각자의 형편에 맞는 집을 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시를 발견하기도 한다. ‘부동산과 시’가 동질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한정된 땅덩어리를 밟고 살아야 하는 거의 모든 유동의 인간들에게 ‘집’만큼 크고 중대한 일도 드물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은 단순히 물리적인 부동산일 뿐만 아니라 한 생애의 희노애락 결과물이도 해서 집을 사고 팔고, 세를 얻기 위해 부동산 중개업소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급매로 집을 처분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대로가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한다.
2부는 가족 이야기다. 어려서 집 나간 엄마를 찾아가는 아버지 따라 길을 나섰다가 하필이면 굴비두릅처럼 포승줄에 엮이어 어슬렁거리며 걷는 죄수 무리를 만났던 것을 복선으로 깔았다. 그날, 금의환향하는 어떤 무리를 만났더라면 시인의 생애는 달라졌을까 궁금하다. 전 우주를 다 털어도 ‘핏줄’을 잘라낼 수 있는 연장은 없다. 하나님도 그것이 되지 않아 천국을 만들고, 부처도 인연설을 설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핏줄로 엮인 사람들 간의 이야기는 마냥 슬프기만 하고 마냥 아프기만 하고 마냥 행복하기만 하지도 않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이해가 되어 버려져 화가 나기도 하는 사람들이라서 드디어 시가 되기도 한다. 시인에게 가족은 시어이다.
3부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를 말하려고 했다. 천체물리학자들은 우주도 언젠가는 소멸하여 사라질 것이라고 하는데, 한갓 100년도 다 못살고 갈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 왜 그 후의 일이 궁금하고, 내가 없는 우주가 부모 잃은 고아처럼 외로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왜 하는 것일까. 뽀글파마에 몸뻬 바지 차림으로 동네를 누비는 아줌마에게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랑’ 같은 것이 있을까? 우리 모두는 누구에게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랑’하는 그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버스가 하루 두 차례 들어오는 외딴 동네, 뒤로 깊은 산을 숨겨두고 있는 유물 같은 구멍가게에서는 유통기한 지난 과자나 음료수 말고 사랑을 팔았으면 좋겠다”라고 노래한다. 이렇게 작고 의기소침한 나도 누군가에게 유통기한 10만년도 더 남은 사랑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면, 먼먼 우주의 시간도 기꺼이 기다려 외로움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4부는 근원 이야기다. 어디에나 신은 있다. 그리고 신은 아무 곳에도 없다. 신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면 서운하다. 그래서 시인은 “한때 나는 나를 삼세의 바다를 흘러가는 조각배라 여기던 적 있었”지만 이제는 “세수대야 냉면 사발보다 너른 우주 어디에 하다못해, 이슬방울만한 내세 하나 따로 없다”고 여기면서도, “맹,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저 좀 더 긴 이별일 뿐인 것도 같”다고 자조한다. 그리고 최첨단 과학으로도 밝혀지지 않는 세상사 일은 얼마든지 있어서 가끔, 먼저 가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또 다른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부러도 한다. 그리움은 고장이 나지 않는 천연 점등이기 때문이다. 한때 “근시안의 내 안에 삼세가 폭설처럼 내리 쌓이던 곳 그 질로 걷잡을 수 없이 길을 잃기 시작했던 곳”도 있는 시인의 영혼은 아직은 “멀리 날아와 죽은 나뭇가지에 오래 앉아 있는 새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우주와 소우주 사이를, 은하의 세계를 가만가만 더듬어가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 예서의시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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