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

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

$18.00
Description
이 책은 윤공희 대주교님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북녘 교회에 관한 구술사이다. 1924년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격동의 역사를 사신 윤 대주교님의 기억은 진남포 본당에서 복사를 섰던 여덟 살 소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 대주교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 속에는 북녘 성당과 덕원신학교 풍경 안에 일제와 공산 탄압 속에서도 양 떼를 돌보던 평양교구 사제와 선교사들, 그 안에서 신앙을 지켰던 신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38선을 넘어 남쪽 땅을 밟은 순간도, 6·25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된 명동성당에서 인민군복을 입은 큰형님께 강복을 준 그날도 대주교님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모든 순간,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오셨다는 대주교님의 고백을 담은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과 민족 화해라는 교회의 소명을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윤공희,권은정

작가,전문인터뷰어,번역가.대학원에서영문학을전공했다.언론사의런던통신원으로오랫동안일했고국무총리실홍보비서관을지냈다.지은책으로「책으로노래하고영화로사랑하다」,「그사람이아름답다」,「젠틀맨만들기」,「불꽃이향기가되어(공저)」,「착한기업이야기」등이있으며,가톨릭관련번역서로「상처입은관계의치유」,「시몬느베이유」,「삶의대화」,「붉은새의선물」등이있다.

목차

추천사·7

간행사·12

1부신앙의요람,평양교구
1장사제성소로이끌린어린시절
우리집안·27|진남포성당·32|복사를서다·37|진남포의은인,스위니신부님·39|배신부의시약소·43신사참배·46|해성학교-교리공부를하다·51|나의반성·56서포예비신학교·59|장정온악니다수녀님과인사·64|소신학교-덕원과서울동성신학교로나뉘다·66

2장아름다운기억,신학교시절덕원신학교신학생이되다·71
신부여섯만나와도내가춤을추겠다·75|소신학교시절·77|공부는열심히·82|최고의교수진·86안셀름로머교장신부·87|루치오로트원장신부·93라틴어선생님·95|아르눌포슐라이허부원장신부·97루페르토클링자이스신부·100|평신도교사들·104|신학교관현악단·106|그레고리오신부님·111|깐또르가되다·114월반을하지않다·117|덕원신학교의학풍·122|담배허용·122자율적인학교분위기-경계는없어·124|신학교에서도내선일체·127|금강산소풍·129

3장나의가족,해방을맞은우리
부모님·137|큰형건희모세형님·140|작은형곤희형님과동생봉희·145|누이동생요안나·147해방을맞다·151|해방후의평양·154|관후리성당재건·156|우리신학생은우리손으로·159

4장시작되는공산탄압
차부제서품·167|덕원신학교-시련을맞다·168|잡혀가신주교아빠스·174|끌려가신교장신부님과독일수도자들·178덕원신학교강제폐쇄·181|평양교구-홍용호주교님을잃다·185길잃은양들은어디로·189|진남포이야기-우리는유대철처럼될거야!·193신부님을지키는신자들·199|조문국신부님·202월남계획을세우다·206|드디어서울에·221

2부사제의길
1장새사제시절과6·25
사제서품-가장기쁜날!·229|첫소임-명동보좌신부·235|6·25발발·236|모리멜리우스에스트·239|피난민들에게고해성사·241|형님을만나다·242|전란중명동성당미사·247|북한군명동성당점령·249|중부보안서에잡혀가다·250|명동에서쫓겨나다·253|다맡기고떠나는길·255|구산공소·259|서울로돌아오다·261|9·28수복후평양으로돌아가다·263|주교아빠스의무덤을참배하다·266|우리는평양교구신부다·269|다시찾은진남포본당·272|영유본당을뒤로하고·275|다시서울로돌아와서·277|포로수용소군종신부로·278|이산가족상봉·282

2장평양교구출신의주교
부산가톨릭도서관부관장·289|성신소신학교교사로일하다·291|감독신부시절·295|로마유학·296|지학순주교와의우정·302|학위를마치다·308|중앙협의회총무시절·309|김남수주교와의우정·310바티칸공의회참석하다·314|주교수품·316|바오로6세알현·318|수원교구장시절·321|서울교구장서리·324|하느님안에서살아온나의삶·328|통일은우리의노력을필요로한다·330

에필로그·334

출판사 서평

기억속에살아있는북녘의교회

한국교회사에서결코빼놓을수없는중요한인물이있다.2022년현재한국가톨릭교회의최고령주교,윤공희빅토리노대주교이다.우리민족에게수난으로가득한역사를몸소체험하신윤대주교님의삶은한반도의현대사이자한국교회의살아있는경험과기억이라해도과언이아니다.1924년평안남도진남포에서태어나신윤대주교님의삶은숨가쁘게흘러왔다.

이야기의시작은진남포본당에서복사를섰던여덟살소년시절로거슬러올라간다.일제강점기가혹했던전시동원체제에서진남포는군산전진기지가되며신흥도시로급변하고,진남포성당은새성전을지어야할만큼날로교세가확장했다.그무렵메리놀회가평양교구에진출하면서진남포성당에도외국인신부가부임했다.어린빅토리노가복사를서던때는메리놀회스위니신부가진남포성당의주임신부였던때였다.일제의폐교위협에도학교를지키고,신사참배를거부한신부님을보며어린빅토리노는사제의꿈을키워갔다.

서포예비신학교에서사제가되기위한첫걸음떼고,빅토리노는일생에서제일중요한시기를보내게될덕원신학교에가게된다.푸른숲속에있는덕원신학교에는최고의교수진이있었다.윤대주교님은스승이었던베네딕토회신부님들을한분한분기억해낸다.덕원신학교를떠난후부터오늘에이를때까지,‘네가원하는게주님의뜻에합당한것이냐’물으셨던스승의질문에답을찾으며,하느님의섭리를찾아오는길을걸었다.

청년시절의기억에는해방후찰나의기쁨과교회가북한정권으로부터당한모진수난도스며있다.일제의징집으로마음졸이며영장을기다리던중에,해방이찾아왔다.도둑처럼조국해방이온날,전쟁물자로몰수된교회종탑의종소리를대신해해방의기쁨이수도원하늘높이울려퍼졌다.하지만해방의기쁨은잠시,북한지역에새로운체제가들어섰다.얼마전까지일본군부대가진을치고있던신학교운동장에는소련군이들어와있었다.상황은더욱나빠졌다,소리소문없이정치보위부에끌려갔다돌아오지않는사제와신자들이늘어갔고,일제에빼앗겼던성전을다시짓는일도공산당의방해와압력으로결국중단되고말았다.

북한전지역에종교탄압의수위가높아져가던1949년봄.한밤중에수도원주교아빠스와교장신부,수도자들이연행되었고,이윽고덕원신학교에강제폐쇄명령이떨어졌다.신학생들이고향으로뿔뿔이흩어지고,이제막차부제품을받은윤공희빅토리노도평양으로향했다.방학때마다찾아뵙던교구장주교님도피랍되어보이지않았다.이대로는이북의신부들은다잡혀갈판국이었다.누군가는이남으로가평양교구의재건을준비해야만했다.윤공희빅토리노는평양교구의존립을위해,1950년1월목숨을걸고38선을넘었다.

서울에도착한지두달만에사제서품을받은그날,윤공희빅토리노신부는하느님의섭리에대해곰곰이생각한다.만약,북한에서사제품을받았더라면,당시평양교구소속사제들의운명처럼공산정권에피랍되어지금의교황청이발표한「20세기신앙의증거자」명단에올라있을지도모를일이다.그리고그때순교하신모든분의삶까지살겠다고다짐하며신부생활을시작할무렵6·25전쟁이발발해공산치하를경험하게된다.인민군군의관이되어내려온형님에게강복을준일도있었고,9·28서울수복전까지구산공소로피신을가간신히위험을피하는일도있었다.인민군들이다시북쪽으로밀려가,군종사제들과함께북쪽으로올라가평양교구성당들을방문해신자들에게성사를주었다,가는곳마다신자들이모여들었다.

그즈음덕원수도원주교아빠스의무덤을참배했고,조만간다시찾아와수도원땅으로옮겨드리리라했지만,아직까지그시간은오지않았다.

책이막바지에다다르면머릿속에는윤대주교님이전해주는북녘교회와신자들의모습이떠오른다.책에실린사진이북녘교회를생생하게각인시키고,아직도북한지역어디에선가숨어있을교우들의믿음이분명히살아있을거라믿고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