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도시는 도시인의 삶과 서사를 담아내는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다!
공간에 깃든 삶의 흔적과 기억에서 욕망이 투영된 공간의 운명까지,
대도시 서울이 품은 시공간의 역사를 들추다!
공간에 깃든 삶의 흔적과 기억에서 욕망이 투영된 공간의 운명까지,
대도시 서울이 품은 시공간의 역사를 들추다!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은 다양한 이력의 약 1000만 인구를 감당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영위되는 텅 빈 무대로만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이 도시와 인연을 맺은 도시인의 삶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고, 도시는 그 하나하나를 담아내는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도시 곳곳에 켜켜이 쌓여 있는 개개인의 각별한 경험은 무색의 공간을 다채로운 삶이 녹아든 애착의 ‘장소’로 바꾸어 주며, 도시를 매개로 하여 다음 세대로 계승된 기억은 시간의 무게와 함께 특정의 공간들에 ‘장소성’을 부여한다. 이렇게 ‘장소성’을 획득한 공간은 이제 공간 자체의 역사를 써 내려가길 서슴지 않는다. 동네에 흔히 위치한 학교, 우체국이나 경찰서 등의 관공서가 비록 건물은 새롭게 바뀌었을지라도 용도만은 수십 년 이상 유지하고 있음을 종종 목격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장소성’의 힘일 것이다. 이 책은 서울 사람들보다는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이 품어 온 오랜 기억을 모은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도시사학회가 기획해서 출간한 《도시는 기억이다》(2017), 그리고 도시사학회와 연구모임 공간담화가 함께 기획하고 펴낸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2022)의 후속작이기도 하다.
‘장소의 기억’, ‘장소성’이 깃든 공간들에 관한 이야기
1부에서는 한양도성 내부에 초점을 맞췄다. 〈서대문, 언덕 위 모던라이프의 명과 암〉에서는 도성 사대문 중 주로 일제강점기 서대문 밖의 변화가 그려진다. 그 변화는 한편으로는 ‘금화장’이라는 문화주택이나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도요타아파트가 건설되면서 ‘모던라이프’를 구현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발에서 밀려난 이들을 수렴하듯 토막촌을 형성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일제강점기 서대문 밖 서쪽과 북쪽으로 나뉜 도시 풍경은 지금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동대문, DDP 아래에 묻힌 이야기들〉은 동대문 일대의 역사 지층을 시간순으로 복원했다. 동대문디자인파크(DDP) 자리는 본래 한양도성 성곽이 지나고 하도감(下都監)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항일 기운을 스포츠로 돌리려 경성운동장이 건설되고, 해방 후에도 서울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기능을 상실한 서울운동장의 재개발 과정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유적은 개발의 방향을 ‘다목적 시민공원’에서 ‘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광화문, 한국 현대사의 현재진행형 공간〉은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 일대의 역사성을 둘러싼 논란이 현재진행형이라고 지적한다. 수도 서울의 역사가 오랜 만큼 광화문 일대의 역사 지층도 몇 겹을 이루지만, 정치적 의도에 따라 ‘전근대 복원’과 ‘현대적인 고층 도시로의 탈바꿈’이라는 상반된 꿈이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펼쳐졌다는 것이다. 또한 ‘복원’이 사실은 ‘새로운 창조’임을 깨달아 역사의 이름을 빌려 파괴를 반복하는 과정에 이제는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청계천, 복개된 삶의 공간〉에서는 도심 한가운데를 가르며 흐르는 청계천의 역사를 오물 처리 기능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맑은 시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청계천은 조선시대부터 ‘오물이 소통하는 곳’으로 규정되었으며 수많은 빈민이 그 천변에 몰려들었다. 행정 당국은 청계천 복개와 복원을 통해 정비를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천변의 풍경은 말끔히 변했으나 그 일대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 또한 함께 정리되고 말았다. 청계천 북쪽 종로 일대를 다룬 〈종로, 거리의 주인은 누구인가?〉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거리의 상징이기도 했던 종로가 일찍이 만민공동회와 3·1운동을 거치면서 인민이 주인인 공간이었음을 일깨운다. 이후 전차나 자동차에 그 자리를 내주고 일상의 무게가 삶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이 거리가 품고 있는 기억은 언제든 다시 우리를 주인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한다. 〈을지로,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풍경〉에는 청계천 남쪽 풍경이 담겼다. 원구단 자리의 조선호텔에 이어 1930년대 을지로에는 당시 동양에서 네 번째로 큰 반도호텔이 들어섰다. 철저히 외국인과 한국인 특권층을 위해 존재했던 그곳은 일반에 문호를 개방한 후에도 여전히 ‘이방지대’로서 소비되었다. 그러나 반도호텔은 더 높은 조망을 제공하는 호텔들에 처음에는 명성을, 다음에는 부지 자체를 내주고 말았다. 〈정동, 근대 서울의 문턱 ‘공사관 구역’〉은 서대문 밖 이야기의 전사(前事) 격에 해당한다. 서대문 안 정동에는 미국과 영국의 외교공관이 들어선 후 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 기지를 조성했다. 서울 진입로에 위치하고 궁궐과 인접할 뿐만 아니라 구릉지라서 전망이 좋았기 때문에, 이후에도 프랑스, 독일 공관 등이 새로 들어서면서 ‘공사관 구역’을 형성했다. 아관파천 이후로는 경운궁으로 상징되는 대한제국의 중심 영역으로 재편되었으나, 1900년대 동아시아 정세 변화 속에서 정동은 또 다른 변화를 맞았다.
‘현장의 삶’, 사람들에게 삶의 현장이자 터전을 제공하는 동네 이야기
2부에서는 도성 밖 공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양도성 사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 밖 이야기는 〈황학동, 가난 속에서 버텨 낸 삶, 공동묘지에서 만물시장으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희문이 ‘시구문(屍軀門)’이라 불렸던 것처럼 일찍이 공동묘지가 형성되었던 광희문 밖 일대는 남쪽에 일본인을 위한 문화주택이 건설되는 동안 북쪽에는 조선인 영세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해방 후 ‘황학동’이 된 후자는 도심과 외곽의 결절지라는 지역적 이점을 기반으로 서울 도심에 대한 지원과 재활용을 담당하면서 지금까지도 만물시장, 도깨비시장 등의 모습으로 격변의 시대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혜화동, 일제강점기 신흥 계층의 거주지〉에서는 도성 내에 위치하면서도 조선시대 내내 대부분 유휴지로 남아 있던 혜화동 일대를 다루었다. 이곳에는 1900년대 후반부터 대한의원을 비롯한 대형 기반 시설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는 경성제대가 들어서면서 ‘학교촌’을 형성했다. 그와 함께 이루어진 교통의 정비는 고급주택지 ‘문화촌’ 건설로 이어져 현재 문화예술공간으로 변한 ‘대학로’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장위동, 못다 한 교외 주택지의 꿈은 현재진행형〉은 도성 밖 한성부 경계에 있던 장위동 이야기다. 농촌 지역이던 이곳에 1937년 부설된 경춘선은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서울로 기차 통근이 가능한 ‘교외 주택지’를 꿈꾸며 개발이 시작되었으나 해방 후에야 재건주택, 부흥주택, 국민주택 단지가 차례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이미 주택전시장이 된 이곳 한편에서 1960년대에 조성된 동방주택지가 신흥부촌의 기억을 담고 2000년대에는 뉴타운사업이 그 뒤를 이으면서 ‘경성 동부의 교외 주택지’라는 장위동의 꿈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용산, 우리 동네와 ‘작은 미국’ 사이〉는 지금의 서울 한가운데 땅을 정조준한다. 용산구 전체 면적의 10퍼센트,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주요 생활공간으로 삼았던 미군 용산기지는 일부 반환되었음에도 아직 한국과 다른 별도의 우편번호를 사용하는 ‘작은 미국’이다. 현재 주한미군의 ‘평택 시대’가 열리기는 했지만, 향후 한·미 간 군사·외교적 관계 변화가 군과 지역사회 간 상호 영향 위에 형성된 용산 미군기지의 공간적 성격을 다시 바꾸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여의도, 도시개발의 시범이자 반면교사〉에서는 한강의 ‘섬’ 여의도가 강으로 둘러싸인 자연적 경계보다는 목동, 광장동과 유사한 도시개발의 역사로 주변 지역과 구분되었다고 설명한다. 고층 건물과 획일적 가로(街路), 주민의 계급적 동질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그것은 외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폐쇄적 지역사회를 등장하게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또 다른 여의도를 양산하기보다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개방적 지역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의도식 도시개발은 강남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추진되었는데, 〈강남, 서울 사람 아니고 강남 사람〉에서 그러한 개발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1960년대 후반 정치적·안보적 선택에서 출발하여 권위주의 정부의 행정력 남용을 통해 집중 지원을 받은 강남 개발은 이제 자체 브랜드화하여 전국적으로 제2, 제3의 강남을 낳고 있다. 강남 개발이 담고 있는 시대성을 고려할 때, 그것이 향후 도시개발에서도 진정한 본보기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구로, 미싱은 아직도 돌아가는가〉는 강남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개발 이야기다.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수출산업의 획기적 발전을 꾀하려는 목적에서 탄생한 ‘구로공단’에는 지방에서 갓 상경한 저학력·저연령의 여공이 모여들었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산업 구조 변화와 함께 ‘구로공단’은 ‘디지털단지’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IT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미싱을 컴퓨터로 대체했을 뿐이다.
‘공간의 명암’,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된 공간의 운명
집은 일상 유지를 위한 최소 조건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욕구 충족의 한도는 사회적 환경에 따라 사람 간 격차가 컸다. 〈집, 개발과 빈곤의 연대기〉는 최소한의 욕구도 충족하기 어려웠던 ‘빈곤’한 사람들의 집에 관한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서울에는 원시 주택인 토막집이 생겨났는데, 해방 후 전쟁을 거치면서 무허가 불량주택은 더욱 늘었다. 이에 다양한 형태의 주택 공급과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이 이루어졌으나, 결과적으로는 어떤 ‘개발’이든 ‘부유’한 자들만을 위한 공간 창출이 아니었는지를 묻는다. 〈백화점, 동경과 허영의 사이〉에서는 사람들의 욕망을 전시하는 백화점을 다루었다. 일제강점기 많은 사람에게 허영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백화점은 해방 후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점차 도시민의 일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할인점이나 온라인쇼핑몰의 등장은 백화점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면서 백화점을 과거의 유물로 남길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지하공간, 땅 밑에 펼쳐진 또 하나의 일상〉에서는 과밀 상태의 지상을 피해 지하 세계로 들어간다. 유류나 가스 비축시설부터 쇼핑·공연 공간, 음식점 등을 갖춘 복합문화시설에 이르기까지 지하공간의 활용 형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다양해졌다. 그렇다면 도시의 미래를 지하공간에 걸어 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지상의 대체보다는 지상과 연결된 활동 영역의 확장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수도, 지하 세계의 거물〉은 일제강점기 지하공간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지하에 관을 묻는 암거 하수도는 수해 대비나 도시 위생을 위해 중요했다. 그러나 식민 통치 기간 내내 지속된 예산 부족 상황은 그러한 ‘신식’ 시설을 어느 지역부터 공사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일본인 주거지를 우선시함에 따라 민족 간 차별 문제로 부각했다. 〈깡패, 도시의 이면에 자리한 자들〉은 도시공간과 깡패의 친화성을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도시에는 사람과 물자가 집중하는 만큼 다양한 이익이 발생하고, 깡패들은 그 현장에서 이익을 갈취하는 동시에 도시의 익명성 뒤에 숨는다. 깡패들은 이익을 좇아 도시 재개발 현장에도 흘러들었고 행정 당국의 방조에 힘입어 폭력적 강제 철거에 앞장섰다. 그런데 교통·통신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이제 깡패들은 도시공간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유곽, 금기와 욕망의 경계〉는 도시공간의 어둠을 좀 더 직접적으로 조명한다. 성매매업소 집결지인 유곽은 개항 후 일본인이 들어오면서 함께 한반도에 이식되었다. 서울에서는 지금의 묵정동과 도원동 일대에 각각 신정유곽과 도산유곽이 들어섰는데, 외부와의 격리성, 군대와의 근접성 등이 입지를 결정했다. 이후에는 조선인 유곽도 만들어졌으며, 해방 후 비록 유곽은 사라졌지만 그 기능은 형태를 바꾸어 끈질기게 존속하고 있다. 〈도축장, 유혈의 증거를 남기지 마라〉는 유곽과는 반대로 누구도 욕망하지 않는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고기를 즐겨 소비하면서도 고기를 생산하는 현장은 멀리하려 한다. 따라서 도축장 부지는 주거지와 이격이 중요했으며, 시가지 확장은 도축장 이전을 요구했다. 신설동과 아현동에 신설된 도축장은 현저동, 숭인동, 마장동으로 이전을 거듭했다. 마장동을 비롯한 독산동과 가락동의 도축장까지 모두 사라진 현재 축산물시장만이 남아 그 연원을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크게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다루는 서울의 이야기는 매우 다양하다. 각각의 이야기에 묻어난 저자들의 개성은 그 이야기들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 주며, 또한 글과 함께 제공되는 풍부한 시각 자료(사진, 지도, 그림 등)가 독자들의 흥미를 끌어내고 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장소의 기억’, ‘장소성’이 깃든 공간들에 관한 이야기
1부에서는 한양도성 내부에 초점을 맞췄다. 〈서대문, 언덕 위 모던라이프의 명과 암〉에서는 도성 사대문 중 주로 일제강점기 서대문 밖의 변화가 그려진다. 그 변화는 한편으로는 ‘금화장’이라는 문화주택이나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도요타아파트가 건설되면서 ‘모던라이프’를 구현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발에서 밀려난 이들을 수렴하듯 토막촌을 형성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일제강점기 서대문 밖 서쪽과 북쪽으로 나뉜 도시 풍경은 지금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동대문, DDP 아래에 묻힌 이야기들〉은 동대문 일대의 역사 지층을 시간순으로 복원했다. 동대문디자인파크(DDP) 자리는 본래 한양도성 성곽이 지나고 하도감(下都監)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항일 기운을 스포츠로 돌리려 경성운동장이 건설되고, 해방 후에도 서울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기능을 상실한 서울운동장의 재개발 과정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유적은 개발의 방향을 ‘다목적 시민공원’에서 ‘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광화문, 한국 현대사의 현재진행형 공간〉은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 일대의 역사성을 둘러싼 논란이 현재진행형이라고 지적한다. 수도 서울의 역사가 오랜 만큼 광화문 일대의 역사 지층도 몇 겹을 이루지만, 정치적 의도에 따라 ‘전근대 복원’과 ‘현대적인 고층 도시로의 탈바꿈’이라는 상반된 꿈이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펼쳐졌다는 것이다. 또한 ‘복원’이 사실은 ‘새로운 창조’임을 깨달아 역사의 이름을 빌려 파괴를 반복하는 과정에 이제는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청계천, 복개된 삶의 공간〉에서는 도심 한가운데를 가르며 흐르는 청계천의 역사를 오물 처리 기능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맑은 시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청계천은 조선시대부터 ‘오물이 소통하는 곳’으로 규정되었으며 수많은 빈민이 그 천변에 몰려들었다. 행정 당국은 청계천 복개와 복원을 통해 정비를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천변의 풍경은 말끔히 변했으나 그 일대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 또한 함께 정리되고 말았다. 청계천 북쪽 종로 일대를 다룬 〈종로, 거리의 주인은 누구인가?〉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거리의 상징이기도 했던 종로가 일찍이 만민공동회와 3·1운동을 거치면서 인민이 주인인 공간이었음을 일깨운다. 이후 전차나 자동차에 그 자리를 내주고 일상의 무게가 삶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이 거리가 품고 있는 기억은 언제든 다시 우리를 주인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한다. 〈을지로,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풍경〉에는 청계천 남쪽 풍경이 담겼다. 원구단 자리의 조선호텔에 이어 1930년대 을지로에는 당시 동양에서 네 번째로 큰 반도호텔이 들어섰다. 철저히 외국인과 한국인 특권층을 위해 존재했던 그곳은 일반에 문호를 개방한 후에도 여전히 ‘이방지대’로서 소비되었다. 그러나 반도호텔은 더 높은 조망을 제공하는 호텔들에 처음에는 명성을, 다음에는 부지 자체를 내주고 말았다. 〈정동, 근대 서울의 문턱 ‘공사관 구역’〉은 서대문 밖 이야기의 전사(前事) 격에 해당한다. 서대문 안 정동에는 미국과 영국의 외교공관이 들어선 후 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 기지를 조성했다. 서울 진입로에 위치하고 궁궐과 인접할 뿐만 아니라 구릉지라서 전망이 좋았기 때문에, 이후에도 프랑스, 독일 공관 등이 새로 들어서면서 ‘공사관 구역’을 형성했다. 아관파천 이후로는 경운궁으로 상징되는 대한제국의 중심 영역으로 재편되었으나, 1900년대 동아시아 정세 변화 속에서 정동은 또 다른 변화를 맞았다.
‘현장의 삶’, 사람들에게 삶의 현장이자 터전을 제공하는 동네 이야기
2부에서는 도성 밖 공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양도성 사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 밖 이야기는 〈황학동, 가난 속에서 버텨 낸 삶, 공동묘지에서 만물시장으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희문이 ‘시구문(屍軀門)’이라 불렸던 것처럼 일찍이 공동묘지가 형성되었던 광희문 밖 일대는 남쪽에 일본인을 위한 문화주택이 건설되는 동안 북쪽에는 조선인 영세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해방 후 ‘황학동’이 된 후자는 도심과 외곽의 결절지라는 지역적 이점을 기반으로 서울 도심에 대한 지원과 재활용을 담당하면서 지금까지도 만물시장, 도깨비시장 등의 모습으로 격변의 시대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혜화동, 일제강점기 신흥 계층의 거주지〉에서는 도성 내에 위치하면서도 조선시대 내내 대부분 유휴지로 남아 있던 혜화동 일대를 다루었다. 이곳에는 1900년대 후반부터 대한의원을 비롯한 대형 기반 시설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는 경성제대가 들어서면서 ‘학교촌’을 형성했다. 그와 함께 이루어진 교통의 정비는 고급주택지 ‘문화촌’ 건설로 이어져 현재 문화예술공간으로 변한 ‘대학로’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장위동, 못다 한 교외 주택지의 꿈은 현재진행형〉은 도성 밖 한성부 경계에 있던 장위동 이야기다. 농촌 지역이던 이곳에 1937년 부설된 경춘선은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서울로 기차 통근이 가능한 ‘교외 주택지’를 꿈꾸며 개발이 시작되었으나 해방 후에야 재건주택, 부흥주택, 국민주택 단지가 차례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이미 주택전시장이 된 이곳 한편에서 1960년대에 조성된 동방주택지가 신흥부촌의 기억을 담고 2000년대에는 뉴타운사업이 그 뒤를 이으면서 ‘경성 동부의 교외 주택지’라는 장위동의 꿈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용산, 우리 동네와 ‘작은 미국’ 사이〉는 지금의 서울 한가운데 땅을 정조준한다. 용산구 전체 면적의 10퍼센트,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주요 생활공간으로 삼았던 미군 용산기지는 일부 반환되었음에도 아직 한국과 다른 별도의 우편번호를 사용하는 ‘작은 미국’이다. 현재 주한미군의 ‘평택 시대’가 열리기는 했지만, 향후 한·미 간 군사·외교적 관계 변화가 군과 지역사회 간 상호 영향 위에 형성된 용산 미군기지의 공간적 성격을 다시 바꾸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여의도, 도시개발의 시범이자 반면교사〉에서는 한강의 ‘섬’ 여의도가 강으로 둘러싸인 자연적 경계보다는 목동, 광장동과 유사한 도시개발의 역사로 주변 지역과 구분되었다고 설명한다. 고층 건물과 획일적 가로(街路), 주민의 계급적 동질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그것은 외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폐쇄적 지역사회를 등장하게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또 다른 여의도를 양산하기보다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개방적 지역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의도식 도시개발은 강남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추진되었는데, 〈강남, 서울 사람 아니고 강남 사람〉에서 그러한 개발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1960년대 후반 정치적·안보적 선택에서 출발하여 권위주의 정부의 행정력 남용을 통해 집중 지원을 받은 강남 개발은 이제 자체 브랜드화하여 전국적으로 제2, 제3의 강남을 낳고 있다. 강남 개발이 담고 있는 시대성을 고려할 때, 그것이 향후 도시개발에서도 진정한 본보기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구로, 미싱은 아직도 돌아가는가〉는 강남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개발 이야기다.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수출산업의 획기적 발전을 꾀하려는 목적에서 탄생한 ‘구로공단’에는 지방에서 갓 상경한 저학력·저연령의 여공이 모여들었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산업 구조 변화와 함께 ‘구로공단’은 ‘디지털단지’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IT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미싱을 컴퓨터로 대체했을 뿐이다.
‘공간의 명암’,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된 공간의 운명
집은 일상 유지를 위한 최소 조건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욕구 충족의 한도는 사회적 환경에 따라 사람 간 격차가 컸다. 〈집, 개발과 빈곤의 연대기〉는 최소한의 욕구도 충족하기 어려웠던 ‘빈곤’한 사람들의 집에 관한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서울에는 원시 주택인 토막집이 생겨났는데, 해방 후 전쟁을 거치면서 무허가 불량주택은 더욱 늘었다. 이에 다양한 형태의 주택 공급과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이 이루어졌으나, 결과적으로는 어떤 ‘개발’이든 ‘부유’한 자들만을 위한 공간 창출이 아니었는지를 묻는다. 〈백화점, 동경과 허영의 사이〉에서는 사람들의 욕망을 전시하는 백화점을 다루었다. 일제강점기 많은 사람에게 허영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백화점은 해방 후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점차 도시민의 일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할인점이나 온라인쇼핑몰의 등장은 백화점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면서 백화점을 과거의 유물로 남길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지하공간, 땅 밑에 펼쳐진 또 하나의 일상〉에서는 과밀 상태의 지상을 피해 지하 세계로 들어간다. 유류나 가스 비축시설부터 쇼핑·공연 공간, 음식점 등을 갖춘 복합문화시설에 이르기까지 지하공간의 활용 형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다양해졌다. 그렇다면 도시의 미래를 지하공간에 걸어 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지상의 대체보다는 지상과 연결된 활동 영역의 확장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수도, 지하 세계의 거물〉은 일제강점기 지하공간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지하에 관을 묻는 암거 하수도는 수해 대비나 도시 위생을 위해 중요했다. 그러나 식민 통치 기간 내내 지속된 예산 부족 상황은 그러한 ‘신식’ 시설을 어느 지역부터 공사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일본인 주거지를 우선시함에 따라 민족 간 차별 문제로 부각했다. 〈깡패, 도시의 이면에 자리한 자들〉은 도시공간과 깡패의 친화성을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도시에는 사람과 물자가 집중하는 만큼 다양한 이익이 발생하고, 깡패들은 그 현장에서 이익을 갈취하는 동시에 도시의 익명성 뒤에 숨는다. 깡패들은 이익을 좇아 도시 재개발 현장에도 흘러들었고 행정 당국의 방조에 힘입어 폭력적 강제 철거에 앞장섰다. 그런데 교통·통신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이제 깡패들은 도시공간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유곽, 금기와 욕망의 경계〉는 도시공간의 어둠을 좀 더 직접적으로 조명한다. 성매매업소 집결지인 유곽은 개항 후 일본인이 들어오면서 함께 한반도에 이식되었다. 서울에서는 지금의 묵정동과 도원동 일대에 각각 신정유곽과 도산유곽이 들어섰는데, 외부와의 격리성, 군대와의 근접성 등이 입지를 결정했다. 이후에는 조선인 유곽도 만들어졌으며, 해방 후 비록 유곽은 사라졌지만 그 기능은 형태를 바꾸어 끈질기게 존속하고 있다. 〈도축장, 유혈의 증거를 남기지 마라〉는 유곽과는 반대로 누구도 욕망하지 않는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고기를 즐겨 소비하면서도 고기를 생산하는 현장은 멀리하려 한다. 따라서 도축장 부지는 주거지와 이격이 중요했으며, 시가지 확장은 도축장 이전을 요구했다. 신설동과 아현동에 신설된 도축장은 현저동, 숭인동, 마장동으로 이전을 거듭했다. 마장동을 비롯한 독산동과 가락동의 도축장까지 모두 사라진 현재 축산물시장만이 남아 그 연원을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크게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다루는 서울의 이야기는 매우 다양하다. 각각의 이야기에 묻어난 저자들의 개성은 그 이야기들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 주며, 또한 글과 함께 제공되는 풍부한 시각 자료(사진, 지도, 그림 등)가 독자들의 흥미를 끌어내고 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서울은 기억이다 : 오늘의 서울을 만든 시공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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