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

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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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걷는사람 시인선 78
한경숙 『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 출간

“이 공간에 다른 시간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 지느러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시간을 받아 적는 섬세한 손길
순간에서 영원을 포착하는 경이의 시선
2019년 《딩아돌하》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한경숙 시인의 첫 시집 『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가 걷는사람 시인선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한경숙 시인은 그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 오면서 찰나의 순간에 발견할 수 있는 생동감 있는 시공간을 형상화하여 보여 주었다. 그의 시업은 “삶 속에서 밀고 당기는 크고 작은 힘들을 성찰”(《딩아돌하》 심사평)하는 일이다. 즉,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묘한 시공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일인 것이다. 이번 그의 첫 시집 『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에서는 “이 공간에 다른 시간이 숨어 있는” 세계의 다층적인 차원을 우주적인 상상력으로 펼쳐낸 심도 있는 시편들을 두루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순간에서 영원을 본다. “낮달이 동백 혀에 새겨질 때”를 바라보면서 찰나의 순간에 경이를 발견한다. 시집에 등장하는 첫 시 「단념」에서 “弓弓乙乙(궁궁을을)/弓弓乙乙(궁궁을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는 아마도 동학(東學)에서의 영원한 생명, 완전무결을 상징하는 뜻으로 차용한 것일 텐데, 그러한 의미를 짧은 행간 사이의 넓은 보폭으로 시적 외연을 확장시키면서 탁월한 영원의 장면을 그려낸다. 제목으로 쓰인 ‘단념(丹念)’은 시인의 태도를 일컫는 말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수백 년 동안 단념하지 않은” 동백꽃의 ‘단념(丹念)’과도 마주하게 한다. 그 찰나의 시간이 바로 “순간 속으로 영원이 ‘밀려오는’ 형국”(해설, 김형중)이며, 시인의 곧은 화두이다. 이처럼 시인이 몸소 “파도치는 곳으로” 나아가 “파르르” “밀려오”(「친구에게」)는 시간을 빼곡하게 기록한 ‘영원’은 그가 직관적으로 발견한 시간 속 틈의 세계이다.
시인은 미세한 시간의 균열을 착란과 현기증으로 느낀다. 언젠가부터 “작고 사소한 물건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이 공간에 다른 시간이 숨어 있는 것”을 감지하고, “그 지느러미들이 움직이”는 동안 시인은 “바람의 예감은 바람 너머로”(「정전기」) 넘어가는 현기증을 앓아야 했다. 그리하여 모든 정신적, 신체적 감각의 근원은 “알 수 없는 언어로”만 다가와 시인의 “안부는 다른 행성에”(「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 존재하게 된다. 결국 시인의 그런 어지럼증의 해결책은 다시 ‘단념’으로 회귀되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자신의 존재를 “삶 속에 계속해서 던져진 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자조적인 단언과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숨어 있거나 일상에 바짝 붙어”(「그림자」) 있다는 자기 고백적 언술들은 적지 않은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힘들게나마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고 표현하는데, 해설을 쓴 김형중 평론가는 ‘묻다’라는 단어가 ‘의문을 가지다, 질문하다’와 ‘(땅이나 낮은 곳에) 내려놓고 무언가로 덮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동음이의어 차용에 능한 시인이니 저 ‘묻다’를 후자의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기에 시인의 안부는 단지 땅에 묻어 버리는 것이 되고, 현기증과 착란으로 겪는 이질적인 시공간도 ‘단념’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된다.
한경숙 시인의 시집을 읽는 동안에 독자는 불가항력적인 진공 상태에 놓인다. “순간/펼쳐진 책 위”로 “자음과 모음이 서로의 살을 섞”(「나무는 증발한다」)으면서 “정교한 결을 따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어둠을 마시고 있는 하늘”(「호랑가시나무 언덕 위에 서 있을 때」)을 유영하게 된다. 삶이란 결국 한 편의 “슬픈 이야기”이므로 “슬픔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여러 가지 빛깔의 꿈을 꾸는”(추천사, 문순태) 일처럼 의미 있는 일이 또 있을까. 시인이 오랜 시간 감각의 통증으로 겪어 온 시공간의 왜곡은 아름다운 한 권의 행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시인의 깊은 ‘단념’은 무한한 진공의 상태를 느낄 만큼이나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저자

한경숙

서울에서태어나2019년《딩아돌하》신인상을받으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1부슬픔이벌레처럼따뜻한나의집
단념
놋쇠그릇꺼내고닦는날
모판
부산떡김오례여사께
바람의울음
장미가기어오르기시작했다
정전기
실업급여수급자인정일
평택에서온음성
침대를보내던날
벌레
가계도
달의뒷면1

2부얼음을그리는마음
그사람얼굴에달이스민다
나는다른행성에있다
그림자
얼음산
두려움은늘혼자일때만
이게이별일까?
소문들
태어난날꾸었던꿈
거짓말
호랑가시나무언덕위에서있을때
구름

3부캄캄해서너무맑다
가을목어
노래하는사람
부용동정원에서
춤추는가얏고
와온에서
세방낙조
산벚꽃
설도
가을소나기
와운마을천년송
두개의심장168번느티나무
윙컷
백년을읽는동안

4부흰눈으로돌아가고싶어
괜찮다는말
아침
문득쳐다본밤하늘에찾아온메시지
말이말굽이될때까지
까마귀들이날아오르는시간
나무는증발한다
뿌려지다
바람이분다,살아야겠다,사라져라
아무짝에도쓸모없는사랑이야기를읽고
싶어
독방에서독방으로
오랜침묵
친구에게

해설
말의발굽
-김형중(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