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걷는사람 시인선 90
윤선 『별들의 구릉 어디쯤 낙타는 나를 기다리고』 출간
“나는 불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햇빛과 바람과 구름을 당신 눈 속으로 담는
시의 언어를 감춤으로 드러내는 시인
윤선 『별들의 구릉 어디쯤 낙타는 나를 기다리고』 출간
“나는 불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햇빛과 바람과 구름을 당신 눈 속으로 담는
시의 언어를 감춤으로 드러내는 시인
2018년 《시와반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윤선 시인의 첫 시집 『별들의 구릉 어디쯤 낙타는 나를 기다리고』가 걷는사람 시인선 90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말의 수위를 풀빛으로 잔잔하게 조율해 보세요”(「말을 가두어요, 조세핀」)라는 시구에서 알 수 있듯, 이 시집은 시의 절대적 언어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론적 모색이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 밤과 낮의 경계, 불안과 일상의 경계에 시는 존재하며 그것은 앎과 모름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래서 시의 절대자 혹은 신적인 존재인 듯한 “알 듯도 한 그 사람”은 “소리 없이 붙잡혀/붉은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이/슬쩍 빼앗기는 것이” 시의 미덕이라 알려 준다. 문학평론가 김대현은 해설에서 이러한 시인의 태도를 파블로 네루다에 빗대며, 윤선의 “그 사람”은 네루다의 “시”처럼 “아무도 모르게 다가와 ‘나’의 온몸을 열병처럼 휘감고 ‘영혼 속에서 무언가를 시작하’게 만드는 무언가”라고 말한다.
영혼을 열병 상태의 시적 에너지로 만들기 위해 시인은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야 할까. 역설적이게도 에너지를 가득 채우기 위해 시인의 존재는 비움의 상태이다. 시의 언어를 탐구하는 것 외에 “보여 줄 것도 없는”사람, 그것 외엔 가진 것 없는 존재다. 언어의 비움 상태야말로 시를 받아들이기에 필요 조건이며, “광주리를 들고 걸어 들어오는/알 듯도 한 그 사람”과 내가 “사과를 입안 가득 베어 먹는 시간”을 겪으며 시의 “달콤하고 황홀한 밤”(「훌륭한 밀월」)을 경험한다.
불안과 어둠, 미지, 야생의 존재야말로 문명화된 인간에게 훼손되지 않은 생명의 언어를 가져다준다. 「어부의 아내」, 「방아쇠 손가락」, 「검은 밤」에서 시인은 살아 있는 언어를 갈망하며 기다리고 있다. 시 속에서 야성, 야만의 상징으로 보이는 ‘어부’는 언뜻 에로틱하고 비문명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예술이 가진 속성, 정리되거나 획일화되지 않은 상태, 질서가 자리 잡기 이전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또한 이 무질서의 상태로 접어들기 위해 시인은 “화살 같은 불안을 끌어안고 사방에서 낚아챈 사유의 장/음악으로도 긴 이야기로도 빛나는 문장으로도/닦이지 않는 것들”(「검은 밤」) 때문에 괴로워하며 ‘검은 밤’을 보낸다. 그러나 빛나는 문장은 찾아 나섬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순간 던져짐을 받는 것이다.
그 문장, 생명의 언어를 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오직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이 간절해졌을 때, 마음의 비움 상태가 되었을 때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불면의 자락들을/나는 얼마나 기다리는지” 회의하고, 검은 밤을 지새울 때 시의 언어는 획득된다.
‘검은 밤’을 기다리는 시인을 만들어낸 존재, 시적 유산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운동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술 취한 아버지”, “곱게 차려입은 한복 치마 속으로/마디가 없는 손을 감추고/소풍 따라 나온 어머니”(「어두운 벽지처럼 붙여 두고」)에 대한 기억이다. 그가 “방바닥 가득 써 내려간 사연들이 너무 아파서/울음이 문밖까지 새어 나갈 때쯤” 사람들은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겠지만 그는 기억을 “어두운 벽지처럼 붙여 두고” 시를 쓴다. 그 어두운 벽지 같은 기억이야말로 자신의 시적 원천이며, 시적 원천으로 기록해낸 시야말로 사라진 아버지와 어머니를 시집 속에 되살려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손택수 시인은 추천사에서 “등에 따개비가 지은 집”(「목요일의 아일랜드」)을 이고 사는 붉은바다거북의 수고로운 일상을 지긋이 견디게 하는 힘의 근원은 “새로운 글자를 쏟아 놓”(「나는 일요일마다 굿모닝랜드로 간다」)는 시의 복식호흡이라고 말한다. 일상의 지루한 시간과 고뇌를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시의 존재야말로 “별들의 구릉 어디쯤 낙타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영혼을 열병 상태의 시적 에너지로 만들기 위해 시인은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야 할까. 역설적이게도 에너지를 가득 채우기 위해 시인의 존재는 비움의 상태이다. 시의 언어를 탐구하는 것 외에 “보여 줄 것도 없는”사람, 그것 외엔 가진 것 없는 존재다. 언어의 비움 상태야말로 시를 받아들이기에 필요 조건이며, “광주리를 들고 걸어 들어오는/알 듯도 한 그 사람”과 내가 “사과를 입안 가득 베어 먹는 시간”을 겪으며 시의 “달콤하고 황홀한 밤”(「훌륭한 밀월」)을 경험한다.
불안과 어둠, 미지, 야생의 존재야말로 문명화된 인간에게 훼손되지 않은 생명의 언어를 가져다준다. 「어부의 아내」, 「방아쇠 손가락」, 「검은 밤」에서 시인은 살아 있는 언어를 갈망하며 기다리고 있다. 시 속에서 야성, 야만의 상징으로 보이는 ‘어부’는 언뜻 에로틱하고 비문명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예술이 가진 속성, 정리되거나 획일화되지 않은 상태, 질서가 자리 잡기 이전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또한 이 무질서의 상태로 접어들기 위해 시인은 “화살 같은 불안을 끌어안고 사방에서 낚아챈 사유의 장/음악으로도 긴 이야기로도 빛나는 문장으로도/닦이지 않는 것들”(「검은 밤」) 때문에 괴로워하며 ‘검은 밤’을 보낸다. 그러나 빛나는 문장은 찾아 나섬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순간 던져짐을 받는 것이다.
그 문장, 생명의 언어를 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오직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이 간절해졌을 때, 마음의 비움 상태가 되었을 때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불면의 자락들을/나는 얼마나 기다리는지” 회의하고, 검은 밤을 지새울 때 시의 언어는 획득된다.
‘검은 밤’을 기다리는 시인을 만들어낸 존재, 시적 유산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운동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술 취한 아버지”, “곱게 차려입은 한복 치마 속으로/마디가 없는 손을 감추고/소풍 따라 나온 어머니”(「어두운 벽지처럼 붙여 두고」)에 대한 기억이다. 그가 “방바닥 가득 써 내려간 사연들이 너무 아파서/울음이 문밖까지 새어 나갈 때쯤” 사람들은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겠지만 그는 기억을 “어두운 벽지처럼 붙여 두고” 시를 쓴다. 그 어두운 벽지 같은 기억이야말로 자신의 시적 원천이며, 시적 원천으로 기록해낸 시야말로 사라진 아버지와 어머니를 시집 속에 되살려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손택수 시인은 추천사에서 “등에 따개비가 지은 집”(「목요일의 아일랜드」)을 이고 사는 붉은바다거북의 수고로운 일상을 지긋이 견디게 하는 힘의 근원은 “새로운 글자를 쏟아 놓”(「나는 일요일마다 굿모닝랜드로 간다」)는 시의 복식호흡이라고 말한다. 일상의 지루한 시간과 고뇌를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시의 존재야말로 “별들의 구릉 어디쯤 낙타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별들의 구릉 어디쯤 낙타는 나를 기다리고 - 걷는사람 시인선 90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