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김성진 시집)

에스프레소 (김성진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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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김성진의 이번 시집 「에스프레소」에는 응축된 시적인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시인의 말〉에서 풍기는 ‘시 쓰기’의 간절함과 더불어서 시적인 언어에 끝내 닿을 수 없는 시인으로서의 필연적인 한계가 그것이다. 게다가 시집 내 작품들마다 드리운 어둠이 무척이나 짙게 다가오기도 한다. 스스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시공간(“악몽”)에 내몰린 자의 가냘픈 운명을 상기시키면서 또 한편으로 “웬만해서는 감성적 마음을 꺼내 보이고 싶지 않”다는 시인의 단호한 내면의 곡절이 작품들마다 벽처럼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

김성진

2016년《시와사상》시등단
2015년《에세이문학》수필등단
시집『억울한봄』『에스프레소』
수필집『그는이매탈을닮았다』등
진주문인협회회장
《시와편견》편집장
《에세이문학》편집위원

목차

1부
바흐의저녁

등藤
마지막버스
하층민
바흐의저녁
메타인지
41병동
카르페디엠
비의통증
작업표준서
주거에대한소고
폐소공포증
우물에빠진저녁
허블망원경
허블씨은퇴를앞두다
에스프레소
고목
연하선경


2부
바닥론

안개주의보
미래지우기
지족댁
블랭킷에어리어
턱도없는소리
푸른달

바닥론
새도우
아직도배송중
이사하는날
자개농
불편한진실
발자국화석
묘지에서
개짖는소리
줄녹색박각시



3부
압축풀기

실업2
우연히알게된것
대금산진달래
시몽詩夢
하지감자
과민반응
김치볶음밥
고래의여행
사라진나침반
압축풀기
업業
선사시대에서온아이
일기예보는고장나고
집밖은위험해
한파
무아경에들다


4부
심심한고갱님

명태조림
벌의습관
배꼽
지금
낡은아침
진양호
지구사편찬위원회
질량보존의법칙
총선
오보
그리고
섬하나
심심한고갱님
물의윤회
갈증
늙은산
우전雨前을우리며
소문
시집해설

출판사 서평

어둠이밀고들어오는시간

정재훈(문학평론가)

어둠은사랑의권리이고꿈꾸는사람,이미지를보는사람의권리이기도하다.그러나이십사시간불켜진상점들로가득한빛의도시에서우리는스스로의권리를파기한다.이곳에서는거꾸로이미지의소멸,사랑의소멸이일어난다.

〈시인의말〉에서마지막구절을보라.“나는여전히詩에게서도망칠수없다.”악몽과더불어내면의곡절에드리운어둠이떠오른다.이러한어둠은어느시인에게든도망칠수없는시간으로보인다.아마도운명이라여겼을지도모르겠다.운명이뒤섞인어둠은자연스레시간이지나면누구에게나찾아오는것이아니다.사랑과꿈,그리고남들이보지못했을어떠한이미지를보고자하는이들의권리는그만큼의대가를지불했기때문에가능할수있었던것이다.고독한시간을견디며무수한습작들을흘려보낸끝에가까스로건져낸희미한시적인것들은단순히창작의소산물로불려서는안된다.
이곳의관습과상식으로통용되지않으며,무엇과도함부로바꿀수없는것이있으니그것은누군가의사랑이자꿈일테다.‘시인’이라는이름을짊어진자들에게유일한사랑이자비범한꿈이며이곳에서볼수없던생경한이미지라고할수있는‘시’는“빛의도시”로부터가장멀리떨어진변방에서태어난다.어둠을짊어진자들이피워낸사랑의불꽃은멀리서보면마치밤하늘에뜬별빛처럼보였으리다.시인이걸었던곳과그리멀지않은곳에는무수한익명의그림자들이발걸음을옮기고있었을것이다.자신들이품었던사랑과꿈이소멸되고탄압받기를원치않던이들에게저별빛은희미한구원의손길이었을지도모른다.

밤은시간이보내준비우기형식이다.

허공의무게가얼마나될까궁금했을때덜커덩,고요를밟으며온다.적막을깨는포효가공유되는기분이다.막차를기다려본사람은시간의무게를안다.바닥을움켜잡은바퀴소리,기다림은음률이된다.

우주속존재감이어느정도냐는물음이다.

깃털처럼가벼운,느낌조차없는안개의무게다.배추속을채우듯밤은차곡차곡저장되고있다.흔들림을맡기고부터잠은부풀었다가사라지기를반복하며마디를만든다.전혀그렇지않다고,허공의무게가가볍게보이는건우주와호흡하는생명체기때문이라고한다.

속눈썹끝에서바람이가물거리며불어온다.콧구멍을벌렁거리며사색하는후각이반갑기도하다.밤이감각을무디게했지만,전혀그렇지않은척한다.공허한불안감에등골은식은땀이흐른다.잠시넋을놓고있다가표정을잃어버리기도한다.길은가깝지만금세다가오지않는다.부러알려고도하지않는다.단지생각이촉을띄우고있을뿐이다.

붉은꽃받침위불거진유두는입김만스쳐도고개를빳빳이치켜든다.벌초를마친무덤같다.숨을들이마시면소독냄새가가깝게다가온다.가볍다는것은포용할수없을만큼무겁다는또다른말이다.시간은한없이아주한없이무겁게흘러간다.

-「마지막버스」전문

막차시간에접어든버스정류장의적막한분위기가익숙한이들에게“시간의무게”는남다를것이다.육중한바퀴가마지막정류장바닥에쏟아냈을한숨소리,덜컹거리는버스의진동이하루일과를마친고단한무게를느끼게한다.아마도위시의정류장은도심에서꽤나멀리떨어진곳에위치했을것같다.적막과고요가짙게드리운그곳은당장에어느변방을떠올리게한다.노선의가장끝이자,그바깥으로서또다른길목인버스정류장은마치우주와도같은생경한세계가된다.가시거리가제로(0)에가까웠을육중한“안개의무게”를짊어지면서화자가오로지“생각”의“촉”을높게세워저편의“우주”가내쉬는“호흡”까지상상할수있던것도이때문이다.
어둠은빛을거두는시간이다.마치미지의우주“생명체”와도같은어둠의갑작스런손길이한낮의관습을모조리거둔다.시인의어둠은세상만물이당연하다는듯받아들였던빛을,그(의미적)명료함을소거시킴으로써독자인우리를“공허한불안감”으로밀어넣는다.익숙했던감각이의심되고,안개에의해한치앞도보이지않기에두려울수밖에없었을것이다.하지만동시에어둠은희열감을선사하기도한다.잊힌감각(“촉”)이다시되살아나불안감으로인해잔뜩숙이고있던“고개를빳빳이”쳐들게만들고,기어코저승과이승의경계(“벌초를마친무덤”)를넘나들게한다.관습으로무뎌진감각이밤이되어서야마침내눈뜨게되는것이다.

오래전눌렀던벨이이제야들립니다
설익은오이꼭지처럼쓴맛입니다
아무리울어도눈물이나지않습니다
그래요,재즈음악이들려옵니다
에스프레소를마시는하루라고해두지요
안과밖,중간즈음에소리가존재합니다
경계에서생긴쓴맛은오랫동안사라지지않네요
하루를깨끗이씻어욕조에넣어버립니다
목덜미가서늘해옵니다
바닥까지발이닿지않아숨이가빠옵니다
지나간것은다시지나가지않습니다
욕조속온기는그렇게죽어갑니다
황홀한음악이들려왔고
잘린슬픔이하나씩다시자라기시작합니다
벨소리는어제를하나하나해체합니다
떠난다는말이이제야들립니다

-「에스프레소」전문

누군가는마지막정류장을앞두고“벨”을눌렀을것이다.“오래전”에눌렀던벨소리가이제야들리기시작했다는것은어디든기착지일수밖에없다는진리를새삼떠올리게한다.안과밖,시작과끝은정해지지않았다.도착을앞두고울렸을그때의벨소리는이후에도다시울릴것이기에끝이라고볼수없다.그러니“아무리울어도”그울음은끝난것이아니다.누군가의“눈물”은아직흐르지않은것이기에더울어야할시간이있어야할것이며,그렇게언젠가또다시울음이계속될것이기에눈물은여전히눈물로남아있는것인지도모른다.게다가울음은음악처럼감정을전이시킨다는점을떠올려본다면,어느누구도저소리(울음/음악)에가던길을멈추고귀기울일수밖에없을것이다.
에스프레소의진한향기가행인의발목을붙잡았듯시인의시또한우리를깊고진한존재론적매혹에사로잡히게한다.누군가가갑작스럽게건넨“떠난다는말”이처음에는무척이나쓴맛을느끼게했을지라도그것을가만히음미하다보면,떠나려는이와의소중한인연과함께그때의아름다운추억이선사하는감미로움이뒷맛으로다가오는때도분명있었으리라.이처럼시인에게어둠은단지쓴맛만있는것은아니다.위시에서우리가존재로서마주하게될세계의안과밖,또는사랑의시작과끝이라는“경계에서생긴쓴맛”이자아내는“오랫동안”의여운은시간이갈수록처음의쓴맛을넘어또다른맛으로이어질것이기때문이다.“황홀한음악”뒤에감춰진“잘린슬픔”의뒷맛을느낄줄아는이만이존재에대해더깊고진한고민을할수있다.

밤夜을반으로가르자웅덩이가나왔다.
두손으로무릎을감싸고앉는다.낡은하늘은죽은아버지의눈보다깊다.비가오면산이되고눈이오면동굴이된다.입구가무너져내린다.목소리가울리지않아주저앉고만다.내가할수있는거라곤눈을뜨지않는것뿐.

눈을감았을때말했을지도모른다.머리맡의전화기에서신호가울려도손을움직일수없다.나는귀속에담장을만들고있는게분명하다.보이지않아아무것도할수없다.눈과귀가없는터널에서까마귀들만울고있다.

빗방울이툭,떨어진다.
소름이돋고
파동은점점커져모든바닥을숨기고있다.
땅은젖어오는데빗소리는전혀들리지않는다.
떨어진물방울하나처럼
세상의모든공포는바닥에있다.

죽은바람이나뭇잎을흔든다.고개는여전히왼쪽으로만돌려진다.심장이오른쪽에있다.이곳을벗어나야만한다.낮은구멍이보인다.철창으로막혀있고,표지판엔폭발물의카운터다운이시작되고있다.살아있는폐광이다.사람들은동굴을빠져나갔지만,나는나갈수없다.누군가가입구를막아버릴것이분명하다.

-「폐소공포증」전문

“밤(夜)을반으로가르자웅덩이가나왔다.”라는구절을가만히음미해보자.무언가를의도적으로가른다는것은겉을감싸고있던확실한의미에감춰져그동안보이지않은낯선의미를음미하고자함이다.게다가그것을정확히반을가른다는것은그안에가장내밀한중심을마침내바깥으로드러낸다는의미일것이다.거기에서나온(밤의)“웅덩이”는그야말로내밀한장소이다.무심코길을걸었을어떤이에게는발견되지않았을,어둡고습한웅덩이를가만히보고있으면누군가에게쉽게마음을드러내지않았던시인의마음(〈시인의말〉)이다시금떠오르기도한다.그리고“동굴”과“입구”그리고“소리”의공통점도누군가에게쉽게발견되지않는다는것일테다.
위시의화자가느꼈을이른바‘폐소공포증’을정확히반으로갈라본다면어떨까.여기에도여러개의관습적의미의층위들이겹겹으로둘러싸여있는데,특히위시의화자가“이곳을벗어나야만한다.”라고느낀절박감은시의정경을감싼겉표면에불과하다.그안을갈라서들여다보면“땅은젖어오는데빗소리는전혀들리지않는”적막을어렵지않게감지하게된다.“보이지않아아무것도할수없다.”라며공포를느낀다거나무기력에빠지는게아니라,오히려“눈을감았을때”비로소말해지는것들이있다는점을깨닫는것이야말로어둠속에서진리를마주하는순간일것이다.이것은오로지“동굴”을빠져나갈궁리만하는“사람들”과는다른태도이며,‘시인’이라는이름을짊어진자들의형벌과도같은운명이다.

천국은지붕위에있다고
몸은바람에떨고
조건없이두손을모으게하는
절대전능의단호한침묵
구원인가형벌인가
늘고통속에서기다리며견디고있을뿐
천지를창조했다는말은믿을수없어
주먹을쥐고중지를편채하늘을찔러
독재자를향한충성의다짐처럼
우렁차게
빌어먹을
시간이아무리흘러도답은없어
그것이전지전능이라면신神과난도긴개긴
구원의빛이아니라유혹의빛인가봐
세상의중심처럼넓고깊게보이다가
낙엽한잎보다가볍기도해
분노가출렁거려
나를믿지마라
누가저높은곳에유혹을걸어두었나
이미죽었던가
원래살아있지않았던것
헝클어진머리
부스스한조명은바닥을비춰
바람과독대하는푸른고요가잠시지나가고
식은땀이등줄기에흘러내린것
그것은아름다운전율
캄캄하고독특한소리를거쳐절정이올때까지
쉴새없이유혹하고
얼마나나약한존재인가
당신은언제나그렇게비겁해
위선으로세운물렁한성
갈라지는성벽아래차가운
바람이불어

-「벽」전문

앞서“귓속에담장을만들고있는게분명하다”(「폐소공포증」)고느꼈듯이인간의몸은본래‘죽음’에결코벗어날수없다는점에서절대적한계에놓여있다.김성진의시적세계에서죽음은“헝클어진머리”와“부스스한조명”으로무대화된다.이로써엿볼수있는죽음에대한사유는어둠과함께뒤섞여있다.마치도깨비불을연상시키는“푸른고요”와독대하고공포를느낀다(“식은땀이등줄기에흘러내린것”).죽음은아직살아있는자들앞에벽처럼거대하게서서“절대전능의단호한침묵”을일관한다.화자가바라본벽너머에는“원래살아있지않았던것”들이아직살아있는자들의세계로기습적인출몰을준비한다.그것들이이곳으로출몰한대표적인경우가바로‘악몽’이었다.
하지만이것은또한편으로“아름다운전율”이다.두렵고절망스러워도그감춰진이면에는삶에대한아름다운진리가있다고믿는것이다.누군가는죽음앞에서겨우두손모아기도를올리며어찌할바를몰랐겠지만,화자에게이것은지금까지기다려온낯선소리를들을수있는“구원”의순간이다.죽음은삶이라는예측불가한바닥위에온갖관습과“위선으로세운물렁한성”이무너질때비로소모습을드러낸다.물렁한성(城/聲)이바닥으로남김없이흡수될때,그것은분명빗소리처럼“캄캄하고독특한소리”를냈을것이다.“갈라지는성벽아래”로거칠게밀고들어오는“차가운/바람”이내는소리도이처럼기괴하게들렸지만,화자의시선은줄곧어둠속에깃든“유혹의빛”에머물러있었다.

그만바닥을뚫어야지
동그랗게물고기눈을끔벅거리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