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의바깥세계와안쪽세계가만나는자리
소설의한가운데에는뿌리없는나무한그루가서있다.상담실에서만난한소년이종이마다되풀이해그린그나무는,“연필로그린선은가느다란실처럼힘이없었다.마치처마밑에서희미하게흔들리는한가닥거미줄같았다.”임홍순의『그림과만난소년』은이한장의그림에서시작한다.그리고나직이묻는다.말이끝내닿지못하는자리에,그림은어떻게가닿는가.
소년은자기안의어둠을좀처럼말로옮기지못한다.학교에서는존재감없이따돌림을당하고,집에서는부모의불화사이에끼여세상에서가장조용히무너져간다.그런그의손이먼저움직인다.데칼코마니의번짐,모래로그린섬,뿌리없는나무―입이차마꺼내지못한말이종이위로조금씩새어나온다.임홍순은미술심리치료라는낯선소재를빌려,‘말이되기전의마음’이라는오래된물음에새로운통로하나를낸다.그림은여기서치료의도구가되어,소년이제존재를처음더듬어보는언어가된다.
“자기마음을그림으로표현하는것은,한사람의바깥세계와안쪽세계가만나는자리다.그림은가장단순하면서도풍부하게자신을드러내는방법이며,그린사람의진솔한고백의언어다.그림과만나는시간은‘나는무엇을하고싶은가’를묻고참된자아를찾는,행복한만남의시간이다.”
마흔두해동안아이들을가르쳤다.그중한아이를,나는아직도생각한다.
이소설에서가장오래들여다볼것은노교사의태도다.그는소년의빈자리를서둘러메우려들지않는다.진단하지않고,다그치지않고,그저곁에앉아색이번지기를함께기다린다.모든것을빠르게가려내고교정하려는시대에,이작품이조용히내미는것은‘곁에머무는일’의더딘윤리다.한사람이다른한사람의회복을재촉하지않고끝까지지켜보는일―그것이실은얼마나묵묵하고다정한일인지를,소설은서두르는법없이따라간다.
서사는스승의날걸려온한통의전화에서현재와이십년전을포갠다.여든을넘긴화자가옛제자의목소리에이끌려더듬어가는이회상은,한생애의저녁에서길어올린증언이기도하다.작가임홍순은사십이년을교단에섰고,화자는그자신과멀지않다.그래서이소설의문장에는‘지어낸이야기’에서좀처럼나오지않는무게가실린다.전작『저녁종이울릴때』에서한세대의저녁을기록했던작가는,이번에는꺼져가던한생명의새벽쪽으로가만히시선을돌린다.
문장은감정을곧바로말하는대신자연과날씨에마음을기댄다.찌뿌둥하게흐린아침이긴장을대신하고,촉촉이내리다그친비가마음의전환을알린다.오월의아카시아향기,창가에내려앉은비둘기한쌍,진달래꽃잎의비릿하고도향긋한맛―손에만져질듯한감각의결이한시대의정서와한소년의내면을동시에불러낸다.임홍순의비유는늘손에잡히는자리에서솟는다.힘없는연필선은거미줄이되고,닫힌나뭇가지끝은“갇혀있는에너지”가된다.관념이아니라사물로마음을적는솜씨다.
한사람의저녁이,한아이의새벽이되었다.
소설의끝에서,소년의나무는마침내발치에작은씨앗하나를얻는다.그씨앗은싹이터줄기를올리고,소년은그그림에‘세상에하나뿐인꽃’이라는제목을붙인다.손으로무언가를빚는일에가닿은소년은,끝내빵굽는사람이된다.“녀석의마음속에희뿌연불빛이점점밝아지고있었다”고노교사는적는다.
“우리는태어나면서부터저마다다른길을걷는다.걷다가머뭇거리기도하고,방황하며곁길로새기도한다.그러나그길은내가선택한길이다.걷다보면그길이세상사는이치를가르쳐줄때가있다.이세상에무의미한인생은없다.잠시변방으로벗어나있을뿐이다.모든꽃이봄에만피는것은아니다.여름에도,가을에도,겨울에도피는꽃이있다.”
이말은소년에게건네는것이면서,작가가자기자신에게하는말이기도하다.봄에피지못한꽃―더디고늦게온소년의꽃은그래서더욱귀하다.여든을넘겨서도기억을글로옮기고있는작가또한,겨울에피는한송이꽃이다.
『그림과만난소년』은한사람이다른한사람의곁을끝까지지킬때무엇이일어나는지를,가장낮은목소리로증언하는소설이다.기술이사람을앞질러가는시대에,이작품은가장더디고인간적인방식―그저곁에앉아함께바라보는일―의값을조용히묻는다.그리고그물음은,여든을넘겨서도한아이의새벽을그리고있는작가의손끝에서나왔기에,끝내미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