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홍시가 될 때를 기다렸다. 노랗게 익은 감을 서둘러 딴다. 나무에서 너무 오래 익히면 물러져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온 감은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고 기다린다. 시간과 햇살이 천천히 감의 속살을 붉고 달콤하게 익혀준다.
문득 내 삶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지나온 세월 속에서 단단하고 떫었던 시간들이 있었고, 그 시간을 견디며 조금씩 익어온 날들이 있었다. 이제는 그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담아 수필이라는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보고 싶었다.
나는 국어 선생님이셨고 글을 쓰셨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할 수 있었다. 책 읽기를 좋아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써왔다. 미국으로 건너와 살아온 반세기 동안에도 나는 삶의 희로애락을 글로 적었다. 힘들다고 푸념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견뎌낼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고 자신을 다독이기도 했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을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은퇴한 지도 어느덧 10년을 바라본다. 돌이켜보면 내 삶도 감나무와 닮았다. 감꽃이 피고 지고, 푸른 열매가 맺히고, 노랗게 익어가는 동안 차가운 비바람과 뜨거운 햇볕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삶의 고비마다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 깊은 곳에 두레박 하나를 내려, 오랫동안 젖어 무거워진 응어리들을 하나씩 퍼올려 햇볕에 말리고, 따뜻한 손으로 토닥여주고 싶다. 그때 비로소 지나온 시간도 한 편의 이야기로 익어갈 것 같다.
긴긴 겨울밤이면 증조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이솝이야기와 옛날이야기, 때로는 오싹한 귀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할머니의 목소리를 따라가며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던 어린 나는 언젠가 동화작가가 되고 싶었다. 19세기 덴마크 오덴세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세계적인 아동문학가가 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처럼, 어린이들의 마음에 오래 남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꿈은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접어두고 살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와 수필을 공부할 기회가 찾아왔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글쓰기의 꿈이 다시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직장에서 은퇴한 뒤에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한 가지씩 실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여행과 글쓰기는 내 삶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 준 특별한 두 가지다.
여행을 떠나면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한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과 목소리, 낯선 곳의 냄새와 피부에 닿는 바람의 감촉, 그 땅을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와 선조들의 흔적,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예술을 오래 바라본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 나의 기억과 느낌, 생각을 포개어 한 편의 수필을 쓴다.
넓은 세상을 여행하며 만난 이야기들을 미주한국일보에 칼럼으로 연재했고, 미주아동문학아카데미에서 동시와 동화를 배우며 오래전 접어두었던 꿈도 다시 펼쳐보려고 한다. 이번 수필집에는 그동안 신문에 발표했던 칼럼과 문예지에 실었던 글, 그리고 몇 편의 수상작을 한데 모았다.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게 되니 설렘과 함께 지난 시간이 새롭게 다가온다.
평범한 삶에서 건져올린 나의 작은 이야기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으면 좋겠다. 삶이 버거운 날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되고, 힘겨운 순간에는 다시 일어설 작은 힘이 되며, 상처받은 마음에는 조용한 위로 한 줄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그 익어가는 삶의 작은 열매가 되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머무는 달콤한 홍시 하나처럼.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묵묵히 응원해 준 남편과 두 아들 가족에게 이 책을 바친다. 영문 번역을 도와준 유니스 박 선생에게도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함께 글을 읽고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토렌스 방 회원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아직 서툴고 부족한 글들이 한층 깊고 맛있는 홍시로 익어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이끌어주신 박덕규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6년 가을,
삶이 익어가는 시간에 미국 토렌스에서
전문가의 말
글 쓰기가 체질화된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접하는 모든 일이 글감이다. 새로운 곳에서 접하는 낯선 풍광과 낯선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날마다 평범하게 경험하는 일상사가 모두 글의 소재요 주제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글들이 읽는 이에게 늘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기는 힘들 것이다. 김영화의 글 쓰기는 그점을 잘 인식한다. 그는 매일매일의 일상을 쓰되 그 일상에서 자신을 각성시키는 어떤 요소를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그 때문에 그의 글을 자잘하고 소소한 것들을 내세우되 그 속에 반드시 자신에게 울림을 준 어떤 것을 담아낸다. 자신을 움직이지 않은 소재가 어찌 남과 가치 있게 만날 수 있으리.
김영화는 은퇴 후 일상을 사는 평범한 일상인이자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여러 곳을 여행하는 부지런한 여행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하루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성실한 수필가이다. 일상의 곳곳에 눈을 두고, 여행지의 작은 사물이며 소소한 자연을 관찰한다. 일상과 여행을 오가는 시간에 당연함과 새로움, 익숙함과 낯섦을 넘나들면서 놓치기 쉬운 움직임을 읽어내고 그것에 의미를 더하고 있다. 그를 통해 이 세상이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