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렘 입숨의 책 : 구병모 미니픽션

로렘 입숨의 책 : 구병모 미니픽션

$15.00
Description
거대한 스케일, 세밀한 스케치
오직 구병모만이 구현 가능한
소설의 지상화地上畵
구병모 미니픽션 《로렘 입숨의 책》이 안온북스에서 출간되었다. 200자 원고지 50장 내외의 작품 열세 편을 모은 이번 책에서 작가는 그간 보여준 심미적인 색채를 더욱 강렬하게 내뱉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과 의식을 소설화해내는 능력을 여지없이 펼쳐 보인다. 모두 달라 보이는 열세 가지 색감은 소설을 다 읽고서야 도달하게 될 높은 고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비로소 그 진면모를 알 수 있다. 마치 나스카의 지상화를 마주한 순간처럼 놀랄 수밖에 없는 작품들은 살필수록 짧은 분량 안에 꼼꼼히 덧칠해 새겨 넣은 메시지(또는 메시지 없음)에 숨죽이게 한다.

‘로렘 입숨’은 뜻 없이 셰이프를 잡기 위해 흘려놓은 무작위 더미 텍스트를 가리키나, 그 뜻 없는 낯섦이 우리를 완벽하고 세련된 작품의 세계로 이끈다. 선악에 대한 관념이든, 언어나 예술에 대한 태도이든, 세대나 시대의 위기 감각이든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쉬이 발설하지 않고 소설화하여 그 구조로서 드러나게 한다. 이런 거대한 사고를 세밀하게 소설화하는 능력의 탁월함은 《로렘 입숨의 책》에 실린 다양한 작품으로 그 빛을 발한다. 이것은 소설과 세계에 대한 작가만의 면밀한 대응이며, 비장한 다짐으로 읽힌다. 애써 소설의 존재 의무를 따져 묻는 일이 소설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여기에 모인 소설들과 함께 그 먼 고도에 가닿기를 기대한다.

저자

구병모

1976년서울에서태어났다.경희대학교국어국문학과를졸업하고편집자로활동하였다.2009년『위저드베이커리』로작품활동을시작했다.제2회창비청소년문학상을수상한『위저드베이커리』는신인답지않은안정된문장력과매끄러운전개,흡인력있는줄거리가높은평가를받았다.

데뷔작『위저드베이커리』는기존청소년소설의틀을뒤흔드는,현실로부터의과감한탈주를선보이는작품이었다.청소년소설=성...

목차

화장花葬의도시|신인神人의유배|영원의꿈|동사를가질권리|날아라,오딘|예술은닫힌문|입회인|궁서와하멜른의남자|롱슬리브|세상에태어난말들|누더기얼굴|지당하고도그럴듯한|시간의벽감壁龕

출판사 서평

구병모소설의너른지평을한권의책으로만나다

재밌게읽고나서야그소설의규모와숨겨진의도를알고감탄하게하는것은여느소설가들도탐내는구병모작가의장기일것이다.손에잡힐것같지않은주제들은언제나작가의몸을통과해이야기와인물을입고그윤곽을뚜렷하게드러낸다.

《로렘입숨의책》에실린첫작품〈화장花粧의도시〉는태어나자마자몸에심겨진‘나노시드’가그사람이죽은이후꽃으로피어나면서그삶을증명한다는어느도시의장례정책을통해인간이가진선과악의양면을드러내는듯하지만,반드시착하기만하거나악하기만한사람이없듯이선악을가르는일에는또다른사회적모순이숨겨져있음을보여주는레토릭을구현한다.〈신인神人의유배〉는나스카지상화의탄생에대한거대한상상이다.신비한자연현상에숨겨진절대자와신인의대척국면이한편의이야기를쌓는다.〈영원의꿈〉의‘나’는도서관에서뜻밖에매몽買夢을청하는이를만나별다른의미가없는꿈을팔게된다.생활비로도쓰고집세로도쓰면서안락을누릴즈음더는간밤에꾼꿈을기억하지못하게되고,허탕을반복하던중또다른꿈,자신이꿈꾸었으나펼치지못한꿈을말하게되고,그잃어버린꿈에도값을매기는이야기가꿈처럼펼쳐진다.〈동사를가질권리〉는이책의제목‘입숨로렘의책’의힌트를주는작품이다.도무지말이되지않는것같은소설을쓰고싶었지만말이되지않는소설을쓰는사람에대한이야기뿐이었다는작가의말에서작가의소설에대한도전,정형화되지않고잡히지않는소설을좇는의지가엿보인다.

〈날아라,오딘〉의‘나’는전쟁에동원될개를훈련하며그들에게어떤감정도갖지않으려노력한다.잔인한생체실험용으로쓰이거나대전차폭탄으로쓰일녀석들을굳이사랑할필요는없다는다짐은‘오딘’의출전을앞두고위기를맞는다.지금도세계곳곳에서진행중인전쟁의참화를그대로이입하게하는생생한소설적전치술이숨겨져있다.〈예술은닫힌문〉은오늘날미디어를휩쓴각종오디션예능의비정함을극대화시킨소설이다.현실의오디션과는달리이작품에서의오디션은생과사를다투는전장이다.그들에게주어진시간은90초.게다가예술적성취에는별로관심이없어보이는심사위원들과의소설적대치가인상적이다.〈입회인〉은중세시대의결투제도가부활한미래를그린다.절차가복잡하고결과를장담할수없는법집행이아닌사적인처벌을원하고행하는사람들.‘나’는그러한결투의당사자만큼중요한역할을행하는‘입회인’으로딸에게마지막편지를남긴다.〈궁서와하멜른의남자〉는오랫동안수리하지않은24평짜리구축아파트를밀착묘사한다.세입자인‘나’는아이가태어나육아와집안일을온전히맡게되었고이곳에서벗어나기위해집을내놓은지한참되었지만계약은성사되지않고한겨울을맞았다.그러던어느날낯선남자가집에찾아와집에쥐가득시글하다고주장한다.실재하는것과그것을숨기려하는관리는여느행정력이면의폭력성을눈앞에그려낸다.

〈롱슬리브〉는남들보다눈에띄게팔이길어놀림감이되거나불편을감내해야하는특성을가진친구가‘나’를위기에서구해주는이야기다.잠시잠깐신의실수로태어나게된것같지만그것은두팔로큰그늘을만들어낼수있는엄청난능력의현현인것이다.〈세상에태어난말들〉의주인공‘원’은“신의사전을훔쳐서나온천사”다.원은거대한사전에서어떤단어를지워버려더나은세상을인간에게주고자한다.공격,고독,오염과같은단어를신의사전에서지워내그단어가없어진다면인간은,더나은삶을영위할수있을까,더좋은공동체가될까를생각하게한다.〈누더기얼굴〉은투명인간이다.은유로서의투명이아닌물리적투명인간인‘나’는남에게피해를주지않고살아가려하지만쉽지않다.자신의특성을활용해정의와공익에보탬이되려고도하지만돌아오는건냉대뿐이다.나는이제남들과같은얼굴을갖고싶다.하지만본래나의얼굴을아는사람이세상에없으므로가능하지않다.〈지당하고도그럴듯한〉의‘나’는소설가다.출간작업을하며소설을고쳐나가는,픽션이분명한이이야기에서우리는작가구병모가소설을대하는태도와가치관을엿볼수있다.그것은우리가지당하고그럴듯하다고믿는모든것에대한역설이기도하다.〈시간의벽감壁龕〉은시간을통과하여공간처럼이동할수있는펜던트가개발되었고100년뒤의참담을목격하였지만,인간은미래의절망을엿보았다고해서자신의현재를반성하거나조율하는존재가아님을목도하게한다.

이렇게구병모작가는미니픽션이라는한계가분명해보이는규격에도불구하고영토와시간,인간과신의경계를무참히가로지르고단숨에제압해소설한편의완성도와가능성은규모로결정할수없음을증명해낸다.그렇기에짧은소설이라고해서그품이덜드는게아니라고말하는것이다.또한거대하고도세밀한이야기들과더불어이책에는작품의시작점과쓰고난후의소회등을담은작가노트가작품마다더해져읽는묘미를더한다.우리는구병모작가가가진소설적역량을이해하면서도때론오해했고지당하고도그럴듯하다고믿는근거로부당한요구를더하기도했다.이제우리는작가구병모의너른지평과진수를한권에담아낸《로렘입숨의책》과함께짧음위로켜켜이더해진구병모만깊이를한껏누려볼수있을것이다.

책속에서

신인은제어깨의날개에서깃을하나뽑았다.그팽팽하고두꺼운깃으로,대지에힘을주어돌바닥을천천히긁어내기시작했다.신인에게는영원이라는시간이보장되어있었으므로조금도서두를것없었다.이제막연주를시작하여클라이맥스에이르기까지수백개의마디와소절이남은음악과도같은리듬으로,특별한기교없이붓을대었으나우연히만난점과선에서경이를포착한화가와도같은몸짓으로.신인이그어나가기시작한선은언뜻보기엔무정형으로뻗어나갔다._〈신인神人의유배〉에서

어쩌면그가진정으로바란것은있는힘을다해무의미해지는것이었다.그자신을포함하여지금까지존재했던수많은작가가제각기싸지르거나게워낸모든글은로렘입숨의무한변주반복에불과할지도몰랐고,글을쓰면쓸수록아무것도쓰지않는것이아무거나쓰는것과다를바없어졌으며,그사실을알아차렸을때그는비로소그무엇도쓰지않음―세상에어떤글도존재하지않음이야말로자신이꿈꾸던궁극의글쓰기임을인정하게된것이다.정적보다완벽한음악이없듯이,점하나찍지않은흰도화지가화려한그림을압도하듯이,태어나지않음이야말로가장안전한삶이듯이._〈동사를가질권리〉에서
너는이제그누구도모르는곳으로멀리달아나도좋다.아니달아나야만한다.달리는발에한계가있으니부디날아갔으면좋겠는데,신의보살핌이없이는너나나나그런일은불가능하겠지.우리는모두유한하고보잘것없다는사실에있어서만큼은동일한개체.
_〈날아라,오딘〉에서

쥐라는생물이멸종을한게아니니당연히어딘가에많이들살고있을테고,사람의문화와문명이그것을이부자리나식탁위로올라오지않도록,최소한사람들의눈에덜띄게끔관리했을뿐이었다.선량한시민의삶을위협하지않도록,그것들이없는척,그것들이살아있다는걸모르는척했을뿐이었다.그러니까이것은말하자면관리실패였다.아기를키우는집에쥐라니있을수없는일이었다.마침재건축에대한기대감상승으로인해집주인은다음번에전세금을대폭올릴예정이었고,그녀의남편은지금까지이상으로대출을받을조건이되지않았다.도망치는것말고는답이없었다._〈궁서와하멜른의남자〉에서

그애는어른이되면두팔을벌리고선나무가될지도몰랐다.깜박졸던신의실수로식물의유전자를가진무언가가인간으로태어난것처럼.두팔로나무그늘을만들어주고,머잖아그것이하늘까지뻗어올라갈지도._〈롱슬리브〉에서

말을가진다는것은신이된다는뜻이다.말을남용하다보면자신이언젠가는그말을가졌다고착각할것이다.사람은누구나자기만의신이될날이언젠가는올지도모르고실은이미저마다신을참칭하며신을두려워하지않는다.그러므로어떤말을없애는것은인간사회의불의와불편을덜어내기도할뿐더러그들을궁극적으로신의자녀가될수있도록돕는일이기도할것이다.원은실패가이어진데대해조금도낙담하지않고다음도시로나아간다.세계는넓고도시는많다.어쩌면신의사전에등재된말들을모두지울때까지이세계의도시는남아있을것이다._〈세상에태어난말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