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람들의 모빌리티 - 모빌리티인문학 총서 53

조선시대 사람들의 모빌리티 - 모빌리티인문학 총서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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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모빌리티로 읽는 조선, 조선인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동의 자유를 누렸을까? 변변한 이동 수단이 없는 일반 백성들은 장거리 여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이용할 수 있었던 양반들은 자유롭게 여행했을까? 신분제의 정점에 있었던 왕은? 모빌리티의 관점에서 조선시대의 제도와 생활을 들여다본 이색적인 책이다.

조선시대의 각 계층은 법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이동에 제한을 받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자유로운 이동이 어려웠다. 하물며 사람이 아닌 재물과 재산으로 취급된 노비의 이동은 불가능했고, 중앙정부에서 부과한 부역을 도맡아 하는 천민의 이동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조선 사회에서 이동, 즉 모빌리티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을까?

책은 이동이 엄격히 제한되었던 천민 계급을 제외한 국왕, 양반, 일반 백성의 신분별 모빌리티 양태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모빌리티에 대한 인식과 시각, 활용의 특성 등을 확인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동의 자유가 큰 계층은 양반-왕-일반 백성 순이지만, 이동의 욕구는 왕-일반 백성-양반 순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저자

신재훈

저자:신재훈

건국대학교사학과를졸업하고동대학원에서박사과정을수료했다.현재부천문화원역사기획팀장으로재직중이다.조선왕릉의천릉遷陵,다산정약용등을연구주제로삼아《다산학사전》,《조선왕릉학술조사보고서》,《디지털순천문화대전》등의다양한학술편찬사업에참여하였다.선문대학교와건국대학교에서한국사를강의했으며,저서로《조선정치편파중계당론서》(공저,2024),《징비록》(공저,2015),《조선왕릉사전》(공저,2021),《해양인문학총서5,바다를지키다》(공저,2021)등이있다.

목차

머리말

제1장모빌리티통제의조건본관과신분
MBTI,혈액형,본관
본관제의역사
고려청자vs조선백자
‘조용한아침의나라’,조선의탄생

제2장왕의이동온행과능행
꽃놀이다니는고려의왕
민폐를두려워한조선의왕
태조이성계가평주온천을찾은까닭은?
세종이사랑한온양온천
세조가온행길에여우사냥을한까닭은?
온천마니아현종
온행때과거시험을치른이유
국왕의대표적이동명분,능행
참배와취미생활사이에서
능행왕중종
외유에서대민행사로
정조,능행에서왕의위엄을드러내다

제3장양반에게특화된형별이자이동유배
부처付處에서위리안치圍籬安置까지
고려의유배형vs조선의유배형
악명높은유배지
유배,사림파성장의배경이되다
좌절과재기사이에서
유배지에서꽃핀학문
제주도의유배인

제4장뜻하지않은해외여행표류
넘쳐나는표류기의배경
조선의해금정책과공도정책
표류를통해알수있는동아시아국제질서
해금정책의배경이된왜구와정성공
홍어장수문순득,동양의신드바드가되기까지
정약용이제안한표류민대응정책
푸른눈의표류인,벨테브레와하멜

맺음말

출판사 서평

능행과유배,표류등‘제한적이동’양태들

전통시대의이동은매우흥미로운주제이다.동서양을막론하고근대이전사회에서사회경제적기반이전혀없는지역으로이동하는것은두려운일이자이례적인현상이었다.변화가거의없는농경사회에서매우드물게일어나는이동은그자체로커다란충격과변화상을초래하는요인이되었다.실제로외부세력의유입은새로운문물의전달자역할을하거나갑작스러운사회변화를이끌어내는자극제역할을하였다.때문에전통시대의이동은근대사회이후의이동보다횟수는적지만더큰영향을끼쳤다.조선사람들의모빌리티양상과효과를파악하려면‘제한적이동’이라는기본조건과함께,그이면에자리잡은사회구조로서본관제,조선의통치이념인숭유억불과농본억말,지방호족중심의지방분권제에서중앙집권적통치질서로의변화,해상무역을금지하는해금海禁정책과중국을천자국으로섬기고이웃국가를교화한다는사대교린의외교정책등을두루살펴볼필요가있다.이를통해개인의이동원인과신분별이동의변화상,이동으로생기는효과와역사적의미등을짚어볼수있다.조선시대사람들의이동양상과변화상을보면,그들역시현대인못지않은이동욕구가있었음을알수있다.

책속에서

고려청자와조선백자의차이는모빌리티의차이와도연관된다.고려와조선에서이동제한의배경으로작동한본관제는고려시대에시작되었지만,고려의지방통치는어디까지나지방호족과세력가들에게어느정도맡겨진지방분권의형태였으며고려말까지중앙집권적통치에는다다르지못하였다.-31쪽

이런상황에서신하들에게둘러싸인답답한궁궐을벗어나백성을직접만날수있는온행은왕권을확인할수있는좋은기회였다.마침현종은지독한피부병을앓고있었으니질병치료를위해온행을나서면신하들도말리기힘들었기때문이다.현종은재위기간동안총5회의온양온행을단행했다.피부병과안질을치유하기위한목적이었는데,실제로현종의증세는세종과세조보다더심각하여침을맞은부분에도부스럼이번질정도여서매우고통스러워했다고한다.-66쪽

정조는원행을통해가장적극적으로왕권강화를도모한왕이자,원행이나능행이더이상국왕의취미생활이나외유·국가의례를위한행사가아님을백성에게보여준왕으로남게되었다.‘관광觀光’,즉국왕의얼굴을백성들이직접보고그빛을실감할수있는기회로삼게하였다는점에서정조는조선사람들에게‘관광’의왕이었다고할수있을것이다.-98쪽

유배인들은자비혹은본가의지원이아니고서는제대로된식사를하기어려웠는데,당시의불편한교통상황으로인해음식물이쉽게부패하여고향에서음식물을지원받는것도거의불가능했다.자연히배를곯거나굶는경우가많아건강이좋아질수없었다.그결과생활의고통을견디지못하고유배지에서도망치다가잡히는유배인들도많았다.하지만도망을치다가잡히면그대로처형되기때문에쉽게결행할수있는일이아니었다.결국낯선환경에서갇힌신세로먹고살것이없어동네사람들에게구걸하는신세,소위‘빌어먹을양반’이되는것이유배초기양반들이처하는운명이었다.-132쪽

해금정책은병자호란이후더강화되는데,이는중국에청왕조가건국되고명왕조가멸망하면서잔존한친명세력이절강성을비롯한남부지역으로이동하여당시해상세력인정성공鄭成功일파와합류하면서청나라의강력한견제가작용했기때문이다.한편북벌을주장하며조용히청에대한복수를주장하던조선정부는정성공세력일부가표류해오자이들에게호감을보이면서내부정세를파악한뒤,청나라사신이파견되자이들을청정부에압송하는이중적인태도를보이기도했다.-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