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구라는 나무 (김수상 시집)

물구라는 나무 (김수상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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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버려진 삶의 풍경에 다정한 말을 건네다
김수상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물구라는 나무』가 출간되었다. 2013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한 그는 ‘시의 기교가 넘쳐나는 시대에 역사의 아픔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시인’으로, 또 ‘언어의 바다를 온몸으로 항진해 온 흔적을 작품에 오롯이 담는 시인’으로 평가받아왔다. 데뷔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낡고 소외된 것들에게 관심을 가져온 시인은 우리 시대의 가장 평범한 것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풍경 속에서 빛나는 시적 이미지들을 발견해왔다. 이번에 출간한 『물구라는 나무』에서도 그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낡은 언어, 버려진 언어들을 데리고 와서 다시 쓸모 있게 만드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바라보는 것은 ‘바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이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이 시대로부터 소외된 삶들에게 말을 걸어왔던 시인이 이번에는 스스로의 내면의 풍경에 주목한다. 그리고 낡은 삶들을 다독였던 그동안의 다정한 목소리로 스스로의 삶 속에 남아 있는 시적 순간들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그래서 시인의 형편과 내밀한 감정들이 새겨진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마치 그의 삶을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소박한 이미지들을 따라가면서 작품에 담긴 것들이 잃어버린 자기 삶의 편린들과 닮아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번 시집 『물구라는 나무』의 무대는 시인과 독자의 삶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삶의 순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

김수상

경북의성에서태어나2013년《시와표현》으로등단했다.
시집으로『사랑의뼈들』『편향의곧은나무』『다친새는어디로갔나』가있다.
2018년제4회〈박영근작품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5

1부

업(業)·15
잘넘어가는가요·16
영웅좌(英雄座)·17
빛·18
나무자세·20
첫사랑·21
물구라는나무·22
하(?),크게열릴하·24
물다·25
처지다·26
창(窓)의말·27
엔트로피·28
사월·30
산국(山菊)·31
당단풍·32

2부

장미의나날·35
굽은등·36
가다보았네·37
한통속·38
한다리를더건너면-리유(吏洧)에게·40
토끼는귀가길다·42
나비·44
금강역·45
시(詩),다녀가다·46
때죽나무·48
측백나무열매두알·50
첼란은찰랑대고·52
무른가시·53
양말은잘못만들어진거야·54
쉬운일없다·56

3부

점(點)·59
꽃피기전,안심연밭·60
뺨을치며불러보는·62
고관(古館)·64
환호작약·66
컬러노트·68
샤랄랄라이끼·69
처서무렵·70
얼룩·71
사진한장·72
각광받는시·73
중중무진(重重無盡)·76
카프카와포도·78
헌신에대하여·80
돌·82

4부

새사람이되어서돌아오는시간·85
듯의용법·86
상쾌한수평의일·88
구름밖의진실한일·90
바슐라르선생께·92
참외의시간·93
성주대교건너편여름구름은이세상
구름이아닌듯·96
성밖숲왕버들·98
시쓸때마다생각해도시를잘못쓰게
되는자기최면술·100
붙어있다가떨어지는것들·102
카페할리스북쪽창가에서바라본
풍경스케치·104
아름다운나날·106
샤시로라레일·109

해설|김문주(문학평론가)
구원으로서의시쓰기와포월(包越)의시학·113

출판사 서평

‘우리’를포옹하는구원의언어들

십년도더지났는데자꾸생각난다/형편이어려워질때마다수정동고관이눈앞에나타나는것이다/밥벌이때문에가기싫어도할수없이내려간부산/매트리스하나겨우들어가는여인숙을개조한달셋방/나같은사내들이혼자사는곳/맞은편초량의산복도로엔벚꽃이한창이었다/두고온어린아이들생각에/물에맨밥을말아먹어도목이막혔다/상조회사에서일을마치고돌아오면/건너편초량의산꼭대기집들의불빛을부러워했다/피어나는산벚의분홍구름떼/꿈인듯생시인듯그때는담배를참많이도피워댔다/인생은괴롭다는데나도빨리구름처럼사라지고싶었지/순서를기다리던공동세탁기/그래도옥상에널린사내들의빨래는깨끗하였다/초량에는돼지갈비골목이있고/찌그러진냄비에끓여주는감자탕집도있었다/고관에는오래된목욕탕굴뚝만아득히높았고/고관(高官)도대작(大爵)도볼수없었다/흘러가는흰구름,흘러가는산벚의연분홍구름들,/흘러가는초량의빽빽한가난들,/고관의달셋방옥상에서바라본초량의산복도로산벚은/불에덴자국처럼두고두고잊히지않는다/다시가난해질때마다나는고관의달셋방옥상을생각한다/나빠지려고할때마다고관옥상의흰빨래를생각하는것이다
-「고관(古館)」전문(64~65페이지)

김수상시인에게시는슬픔을견디고삶을살아내게하는힘이었다.거대한시련의파도들이삶을덮쳐오고격한정념을치를때면그는조촐한공간에서울분과자괴와환멸의감정들을복기하며이들을시의언어로서안쳤을것이다.부산초량에있는고관마을에서일했던경험이담긴위의시는이번시집에실려있지만경험내용으로보면첫번째시집에수록되었어야할작품이다.“여인숙을개조한달셋방”에서혼자지내며가족의생계를위해적막한노동을하던시절의풍경을꼼꼼하게형상화한작품은,이무렵의시편들과는달리자신의형편을소상하게그리고있다.상황에대한상세한형상화만으로도시인이겪었을신산한마음을핍진하게전달하고있는시는끝에몰린한시절의처지와내면을담담하게그려낸다.시간적거리감이언어적간명함의한이유이기도하겠지만,김수상의시에는현실적궁핍함이시의언어로고스란히옮겨앉는법은별로없다.그의시는기본적으로일상적삶의결여를시적자양으로하고있다는점에서시인과작품을떼어놓고생각할수없으며,이와같은성격은적어도이번시집에까지두루이어지는특징이다.
김수상에게시는자신의현실적곤궁을받아들이고이를자기긍정의자질로서전환할수있는힘의원천이다.시를쓰는것은그에게현실을열어갈수있는가능성을발견하는과정이다.“시인은쓰면서세계를경험한다//쓰는일자체가세계의새로운경험,/삶에시를가두어놓을이유가없는것이다”(「각광받는시」)라는시적진술은그에게시작(詩作)이한편의작품을넘어현실을새롭게겪는경험의장임을웅변해준다.‘궁함이시적수월성의중요한자양(詩窮而後工)’이라는전통시학의관점을넘어그에게시는현실적곤궁을타개하는새로운현실경험의장인셈이다(이대목은김수영의흔적이어른거리는지점이다).그러한점에서유사한두개의어휘를만지작거려새로운시적인식에이르는이시의작법은주목할만하다.이는말을가지고잘노는김수상의시적작업이단순한언어유희를넘어현실을열어젖히는새로운인식경험의한방법임을뜻하는것이다.다시말해그에게언어를다루어문장을만들어가는시작의과정은예상치못했던현실을겪는과정이며,그러한점에서“시인은자기가어디로가는줄을모르는사람”(「각광받는시」)인것이다.아울러그에게이러한시쓰기는곤궁의현실에갇힌자신을새로운인식의세계로포월(包越:감싸안으며넘어서기)하는작업이기도하다.

억울한일이많을때는
이불을덮고일부러땀을내서푹잔다
잠이안와도캄캄한이불속에있으면
언젠가잠은찾아온다
땀으로흥건해진축축한몸
혼자서자주건넜던열(熱)의언덕들을지나면
저절로맑아지는해열의시간이찾아온다
허물많던인간이새사람이되어서돌아오는시간,
아주억울한일이있을때는
더두꺼운이불을꺼내덮는다
-「새사람이되어서돌아오는시간」전문(85페이지)

『물구라는나무』에는이전의시편들과달리격한정념의내용들이휘발되어있다.상실,자괴,수치,궁핍,설움,외로움등의감정들은한결순화(順和)되었고,이자리에자신의마음을다스리는안심(安心)의태도가깊게배어들어있다.김수상의이전시편들이자신의현재에대한성찰과더불어현실을향한응전의태도를보여준것이었다면,이번시집에수록된적잖은작품들에는외부의현실적상황을자신의내면을통해해소하려는자세가곳곳에서발견된다.
“억울한일이많을때는이불을덮고”잠으로써고통스러운현실을해결한다는위의전언은이전의시와는다소결이다른시인의태도를보여준다.현실에대한시인의정념의열도는상당히낮아져있고,고통스러운현실을자기내면을다스림으로써해소하려는태도가본격화되어있다.이와같은시인의인식은“열(熱)의언덕들을지나면저절로맑아지는해열의시간이찾아온다”는육체적경험에바탕을둔자연성에기초하고있다.몸의자연이현실세계에대한시인의태도에중요한전범이되고있는셈이다.몸의경험을현실에대한대응자세로서전환하는시인의모습은,한걸음나아가“저절로맑아지는해열의시간”을“허물많던인간이새사람이되어서돌아오는시간”으로의미를부여하는데까지이른다.외부의현실을내면적으로해소하는이러한태도는이번시집의작품들에서두루발견되는가장중요한특징중의하나라고할수있다.

절마당에수양매실환하다
휘휘늘어졌다
어떤가지들은땅에닿았다
꽃으로잘엮은주렴같다
봄바람에마음을다내주었나
느릿느릿마당을쓸고있다
이제는처지는것들이좋다
솟구치는것들의진절머리,
힘풀고아래로아래로만나붓거리는마음이여,
생각없이사는유순한마음이여,
늘어진꽃가지사이로
내마음도한가지인양
척,감겨든다
-「처지다」전문(본문26페이지)

사찰의마당에휘늘어진‘수양매실나무’를대상으로한작품이다.시인의마음이자연사물을보는시선에투영된시에는“솟구치는것들의진절머리”로압축하여표현된열렬한정념들에대한피로가내장되어있다.“힘풀고아래로아래로만나붓거리는”“처지는것들”의형상이고단한시절을통과하면서치렀을상실감,울분,그리움,자책등의격정으로부터놓여나고싶다는심정을불러일으켰을것이다.“생각없이사는유순한마음”,생각없이살다니,시를통해미루어보건대슬픔과분노를안으로안으로만삭였을그는밀려드는생각들로인해마음의난장을겪었을터,그고단함이수양매실의자연형상에서마음을풀었을것이다.
“유순한마음”이란앞서살폈던「새사람이되어서돌아오는시간」에“저절로맑아지는해열의시간”처럼솟구치는격정을안으로정화하는과정,즉“저절로맑아지는”자연의시간에자신을맡기는상태이다.이와같은내면의변화야말로이번시집의가장중요한특징이라고할수있는데,이런시인의태도는시집곳곳에서발견된다.“지나서생각하면아무일아닌데/혼자서가시처럼분노를키운것은아닌지”(「무른가시」)“뒤집어신으면되는것을/남이미울때도뒤집어생각하고/…(중략)…/혹시뭐라고하면,그냥한번웃어줘야지/뒤집으니정말속이편하다”(「양말은잘못만들어진거야」)는이러한시적진술들은외부현실을마음의문제로수렴하여해소하려는시인의태도를담고있다.나아가“꽃진자리가꽃핀자리/웃던자리가울던자리/이긴자리가진자리”(「때죽나무」)등의표현이보여주는것처럼,이는단순히자연사물이나현실에대한일시적반응이라기보다삶에대한인식과태도의전환에가까워보인다.그것에욕망을덜고비우는과욕(寡慾)이나무욕(無慾)의지향이라기보다안심입명(安心立命),혹은순명(順命)에더근접한듯하다.

누가아픈가보다
너무사랑하면눈이멀어
날개가돋는다
나는공중을헤엄치며
당신쪽으로간다
주저앉아오래울어
송진처럼굳어진자리
산하나를다업고도
내몸은가볍게출렁인다
바라지않는마음이여
눈뜨고꽃잠든다
-「나비」전문(본문44쪽)

김수상의시에빈번하게등장하는정념중하나는과거상실에기반한모티프(motif)이며,자책과버려짐,설움과우수,그리고대상을향한열렬한그리움등은여기에서파생된정념들이라고할수있다.이번시집에서는이러한정념의열도가한풀잦아들었으며,이전의시에서시적장력을형성하는데중요한역할을하였던기이한시적유머나유희의감각은약화되었다.대신진술은보다간명해졌고시의발상은담백해졌다.
이전시편들이부재한‘당신’을향해날아올라“공중을헤엄치”는정념을담은것이라면,위의작품은“바라지않는마음”으로“가볍게출렁이는”나비의형상을펼쳐보여준다.물론시인이형상화한나비의‘출렁임’,중력으로부터자유로워보이는저형상의배후에는“주저앉아오래울어송진처럼굳어진자리”의무게가가로놓여있다.“주저앉아오래울”었던내상(內傷)이‘꽃잠든나비’의형상에내장되어있는것이다.하여저나비의‘출렁임’에는짙은페이소스가어른거린다.그간김수상의시가보여주었던정서적감염력이절실함과열도(熱度)에빚진바적지않은데,“바라지않는마음”이라니,“산하나를다업고도”“가볍게출렁이”는“꽃잠든”나비의형상은홍역처럼치른한시절을통과하여당도한시인의현재를표상하는심미적형상일것이다.
그러나저날개를접고든“꽃잠”이눈을뜨고진행되는잠임을생각할때저심미적형상은,우리가익히보아왔던자연사물에자신의감정을일방적으로이입하는자연(自然)의서정으로길을내지는않을것이다.“눈뜨고꽃잠”에든저“가볍게출렁이는”“바라지않는마음”의이후행로(行路)가궁금해지는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