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그래프 (강순 시집)

크로노그래프 (강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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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버거운 현실을 견디는 ‘나들’에게 공간을 선물하다

강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크로노그래프』가 출간되었다. 1998년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시인은 이전에 출간한 두 권의 시집(『이십 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는 인간의 내적 동력을 담백한 색감의 시어들로 치환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내밀한 언어와 매혹적인 사유가 결합한 감각적 화폭을 보여주는 시인”(유성호 평론가), “가난한 잠과 꿈을 부풀려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신동옥 시인)와 같은 찬사는 현실적 고통과 시적 색감 사이의 먼 거리를 독창적인 시적 상상력으로 연결해온 시인의 시세계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나들’을 자신의 비밀 속으로 초대한다. 그들은 ‘타인’과 ‘나’라는 경계선을 통해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이들이다.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여러 곳에 출몰하여 국경선을 확인”하는, 그래서 “수많은 감정과 정서, 사유와 인식” 사이에서 “당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당신으로 인해 위로받”(《시인수첩》 2022년 가을호 「시여, ‘나들’을 구원하라」중에서)게 되는 시인의 특별한 손님들이다. 시인이 창조해낸 공간들은 그런 ‘나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현실과의 관계를 끊고 “밤의 동사들”인 자신의 언어를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시인이 창조해낸 섬세한 언어의 길을 따라 들어가며, 그동안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던 가장 순수한 형태의 ‘나’와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무능한 ‘나들’ 대신 나의 퍼소나들이 힘든 세상에서 선한 공적 정의(구원)를 실현해 주길 소망”하는 시인과 독자의 공통된 소망이 실현될 수 있다.
매일 반복되는 버거운 현실 속에서 삶의 동력을 찾기 힘들었을 독자들에게, 우리를 해방시키는 “착한 마녀”의 언어를 담은 강순 시인의 시집 『크로노그래프』는 특별한 위로의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저자

강순

본명강수원.제주에서태어났으며《현대문학》을통해등단했다.
시집으로『이십대에는각시붕어가산다』,『즐거운오렌지가되는법』,『크로노그래프』가있다.
경기문화재단우수작가에선정되어기금을받았다.(2019)
전국계간문예지우수작품상을수상했다.(2021)
한양대학교국어국문학과에서박사과정을졸업했다.

목차

시인의말·5

1부-새언어를배운지삼십일

미소가나를택할때·15
밤의나라·16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19
한밤에내가배달된다·22
함구증·24
빈자리·26
시베리아행·28
TheLake·30
안구건조증·32
무리수·34
오늘의처방전·36
노란그림자실종사건에대해말할때
당신도울고있나요·39
감정이산다·42
번아웃증후군·44
미문을생각하다가·46

2부-신은햇살을어디에

새로운신(神)·51
질문의원본을들고·54
엄마는꿈이뭐였어요·56
엄마되기·58
개미의봄·60
서울역프로메테우스·63
사춘기나무·66
리라(lyra)·68
증언·71
어느날아이가죽고싶다고말했다·74
늪속의노랑·76
어떤하루는상용로그함수·79
오후세시에는40킬로의용기가필요해·82
오월의레퀴엠·84
온종일걸었다·86

3부-모두다내이름이야

발목기다리기-꽃1·91
다락방은그런곳이에요·94
18(의세계)·96
사과의유흔·98
예컨대,회전초·100
목마른계절의백서(白書)·102
전사(戰士)-꽃2·104
의자의깊이1·107
기린이오는방식·108
애월녹턴·110
글린다-꽃3·112
멈추지않는나무·115
그레텔의숲·118
의자의깊이2·120

4부-눈물의진화쪼금있음

폐기차,너머의몽환도·123
미래의기억·126
올바른결혼생활-마녀일기9·128
앨리스증후군·130
첫사랑의필름·132
병상창가에새가출몰했다-마녀일기10·134
밀교·135
내가파먹는열살의그림자·136
나비트랩·138
지우개하나빌려줘요·140
수국중에서슬픔을뭉친부분·142
나무이후·144
그때버린신(神)·146
집의방향-마녀일기11·149
다항식·152
당신눈에내가안보이는이유·155

해설|박동억(문학평론가)
관능과슬픔의존재론·159

출판사 서평

‘나’의언어들이‘역사’와만나는새로운방식

잊을수없는대상앞에서잊었다고발음해보는노력처럼,반어의형식은김소월시인이「먼후일」에서표현했던목소리를떠올리게한다.그렇기에강순시인의시가시간이라는주제와반어의형식을취한다는것은곧강순시인의서정적뿌리는현대성에대한체험보다인간존재에대한내밀한체험에기댄다는의미로도읽힌다.『크로노그래프』에서시인이지속하려는“아픈화법”(「시인의말」)은범시대적인존재론적고통,즉누구나겪는필연적인상실앞에서쉽게확답하지못하는인간의자세를암시한다.이시집에서우리는시인이시간속에서방황하는존재의형상화에주력하고있다는것을깨닫는다.예컨대그의시에서자기자신을피노키오로상상할수밖에없는사람(「밤의나라」)을만나게되고,말을할때마다자라나는그의코에주목하게된다.또한“기억을해독하는어둠속”에서나침반을당신에게빼앗기고헤매면서,조금씩신체의절반을잃어가는사람을목격하기도한다(「한밤에내가배달된다」).이처럼그의시에서반복하는모티프는오롯이자신의소유가될수없는자기신체이고오롯이감당할수없는자신의기억이다.

가만히있어도밤이우리를움직인다
동사는과거와현재의우리를합한말

숨을내쉬면네가썰물처럼쓸려가고
숨을들이쉬면내가너를해변에심어놓는다

우리는밀려갔다밀려왔다밀었다당겼다
그만큼의거리를유지하는지구와달처럼
우리인력과원심력을밤에슬피쓰고있다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부분(본문19~21쪽)

기억은존재보다큰것이다.무엇보다시인은그러한기억이‘밤’혹은‘한밤’이되어서야자신에게넘쳐온다고말한다.그의시에서‘밤’은시간이움트고움직이며,마치하나의사역동사인양인간을움직이게만드는순간이다.사람이삶을사는것이아니라마치시간이‘우리’에게틈입하여과거와현재를뒤섞어버리는현기증의체험이기도하다.바로그런식으로불현듯그리움이찾아오는밤이있다는사실은누구에게나익숙한일이다.그런데이작품에서음미할것은그리움의완미한속도와이율배반이다.시인은어떠한속도로그리워하는가.숨을내쉬고마실때마다느껴지는것이그리움이라면,그는‘썰물’의속도로숨을내쉬려한다.또한당신을해변에심고자라기를기다리는마음으로숨을들이쉬려한다.다시말해서그의그리움은씨앗의속도로자라고,썰물의속도로빠져나간다.이더딘호흡법은실은가쁜그리움을피하려는몸짓이다.그리움을견디기위해삶의속도를늦추어보려는것이다.

한편으로그리움의이율배반또한이작품은형상화한다.당신을해변에심어놓는손짓을주목해보자.그손짓은당신이라는추억이다시금자라나기를바라는것일까,아니면당신이파도에휩쓸려사라지기를바라는것일까.따라서아이러니하게읽히는이표현은다음과같은물음을음미하도록유도하는것처럼보인다.요컨대당신을잊을수없다고발음하는혀끝과당신을떠나보낸다고발음하는혀끝사이에서어느쪽이견딜만한것일까.그는이물음을간직한채휘청거리고있다.“지구와달처럼”“인력과원심력”처럼,‘우리’의추억과현재사이에서휘청거리고있다.따라서“우리인력과원심력을슬피쓰고있다”라는문장에서떠올려야할것은떠나보내려는각오와떠나보낼수없는슬픔사이에서헤매는자의모습이다.해변에남는것은그의휘청거리는발자국이고슬픈문장이다.

표제시「크로노그래프」는이시집의주제와형식의본질을눈여겨보게한다.즉상기하려는의지와잊어보려는노력사이에서,그래서때론자신을달래듯잊었다고말해보고그것이거짓임을아는이율배반속에서강순시인의아픈화법은빚어졌다.그렇다면강순시인에게시간은관능이다.이관능성은시인이그리움에기대어시간을가늠하고시간을체험한다는사실을뜻한다.요컨대강순시인에게추억한다는것은상기의문제가아니라살의접촉이다.떠올린다는것은애인의육체를떠올리는것이다.잊는다는것은손끝에서빠져나가는당신의피부를느끼는것이다.

바로이것이시집의1부에서반복하는존재의자세이다.이를관능의존재론이라고명명한다면,관능의존재론이란삶의매순간을접촉으로번역해보는형식이라고설명할수있다.그리고접촉은시간을배반한다.왜냐하면단한순간의접촉조차시간을잊게만들수있기때문이다.또한가장관능적인접촉은기억속에서영원히산다.마찬가지로강순시인의시에서과거를추억한다는것은당신과의관계에깃든희로애락의서사를떠올린다는의미보다아름다웠던접촉의순간을떠올린다는것에가깝다.그렇기에“호수속으로걸어들어가물고기밥이되기전에그가쓸수있는가장아름다운시그러니애인아자본주의의유혹에도흔들리지않는든든하고에로틱한허벅지를보여줘”(「TheLake」)라는문장처럼,시인은애인의허벅지를보는것만으로도세상만사를부차적인것으로취급할수있다.“손을꼭잡고노래를부르는너와따뜻한물속으로같이들어가는네가한꺼번에구겨질순없는거야?”(「빈자리」)라는물음처럼,아름답고가슴저미는추억을향해그는손내민다.

문득당신의물음표가한밤중침대에서발견될때나는허겁지겁일기장에보관합니다만년필을침대맡에둔이유입니다당신의물음표는색깔과크기가매번달라집니다

그래도오늘은의사를만나고왔으니안심입니다내증상에대해의사는항상고개를왼쪽으로이십삼점오도정도기울입니다잃어버린목적어를빨리찾아보라고조언합니다의사는지구의자전축각도만큼해답을가지고있는사람입니다

마당의의자는바람과꽃잎이함께쉴수있는내일을기다립니다당신의물음표를거기다올려놓을테니나몰래언제든다녀가시기바랍니다
-「오늘의처방전」부분(본문36~38쪽)

시간을관능으로느끼는자에게처방전은당신일수밖에없다.또한당신을향한‘나’의물음을던져놓는데그치지않고,“당신의물음표”가무엇인지떠올리고느껴보려고희구할수밖에없다.관능적주체는항상듣는입장에선다.이작품에서일기장은당신의목소리를간직하려는수납장이고보석함이며‘나의귀’이다.일기를쓴다는것은헛되이흘러가는시간에대한손끝의응전이기도하다.한편으로의사는“잃어버린목적어를빨리찾아보라고”‘나’에게조언하고있다.그것은삶이계속된다는자명한사실,즉앞으로의미래를향해눈돌리라는처방이다.또한지구의자전축과마찬가지로이십삼점오도고개를기울인의사처럼,물리적우주의각도와일치하는조언이기도하다.

추억을수납하려는손끝과삶의목표를찾으라는처방사이에서,상충하는두삶의태도를절묘하게이어놓듯강순시인은이렇게말해본다.“마당의의자는바람과꽃잎이함께쉴수있는내일을기다립니다”.어쩌면기다림도삶의목적어가될수있지않을까.내일도당신을위한마당에의자가놓여있을것이라는사실에기대어살아가는삶,그렇게기다림에기대어지속하는미래도가능하지않을까.그리워하는자세와그리움을회피하는자세사이에서,슬쩍강순시인이발견하는것은그리움을빗겨놓는방식이다.더넉넉해진그리움의문법이다.당신과‘접촉’하던내밀한순간을그리던마음은이제“나몰래언제든다녀”가도좋다는여유로나아간다.그것은애써그리운것을쥐려하지않는손이다.당신을애써눈에담지않으려는인내이다.대신그의마음은그리운것을초대하는마당이된다.

오월속에서죽은사람들이쏟아져요이해할수없는시간을묻힌휘장속에서,전단을뿌리듯손을내밀어요

저손들을덥석잡고싶어요무슨사연인지받아들고싶어요아이스크림같은잠일지몰라요계절지난꽃잎을일기장갈피에서꺼내듯메마르게바스러지는목숨들우크라이나에서미얀마에서예멘에서광주에서제주에서사월에서오월에서아무렇게나쏟아져요

어떤장면은TV뉴스에서보았던사람들의표정으로쓰러지며말을잃고어떤장면은영화속사람들이신음을흘리다눈을감아요또다른장면,바닥에버려지는사람들의연속,그들은폭풍같은악몽속에서몸부림치다서서히잠잠해져요
-「오월의레퀴엠」부분(본문84~85쪽)

강순시인의시에서반복하는것은저편의타자와‘손을잡으려는’열망이다.그러나어떤손은쥘수없다.죽은이의절망과아픔을이해하려는가없는심려를이작품은형상화하고있다.이작품에서그러한심려는수많은역사적혁명과참혹을향하고있으며,따라서제목의‘오월’은단순히광주민주화운동만을가리키지는않는다.이작품에서‘오월’이란“메마르게바스러지는목숨들”,그렇게말을잃고신음하며쓰러져간고통과익명의죽음을가리키기위한기표처럼활용되고있기때문이다.그렇기때문에오월은“우크라이나에서미얀마에서예멘에서광주에서제주에서사월에서오월에서”반복되었던참혹에대한역사적알레고리가된다.무엇보다이작품에형상화된오월의근본적인이미지는버려지고상처입으며아무렇게나뒤섞인‘죽은이의손’이다.그‘손’을맞잡아보는것이야말로시인이상상해보는순간이다.

그런데관능의존재론을벗어나서이시를이해한다면어떨까.우리는다음과같은질문을던질수있다.우크라이나에서죽어간사람과미얀마에서죽어간사람은정말서로에게손내밀기를바랐을까.또한반대로그들을살해한손에대해서는,사람을살해하는손역시사람의것이라는진실은어떻게다룰것인가.어떤의미로강순시인의심려는시공간을뛰어넘는다는점에서무차별적이고,피해자의죽음만을부각한다는점에서는선택적이다.그러한사실을시인이성찰하지않았을리는없다.그러나말해야만하는것들이있었다.“바닥에버려지는사람들의연속”을견딜수없는마음이있었다.싸늘해진손무더기가쏟아지는소리가들리듯,찾아오는“폭풍같은악몽속에서몸부림치”던밤이있었다.강순시인의시앞에서우리는물어야한다.인간은인간에게냉담하다는자명한사실앞에서,당신의손을쥘수있다는믿음을간직하는자세란무엇인가.설령죽은이와손을맞잡는순간이가능하지않을지라도,그러한순간을희구하는욕망은아무의미가없는것일까.

마음에는탈출구도해답도없다.다만사람은제몫의시간을살아내고,제몫의마음을견뎌낼뿐이다.어쩌면신만이그러한운명에해답을제시할수있을것이다.그래서시인은줄곧이시집에서신을향해물음을던지고있다.“신은햇살을어디에”(「질문의원본을들고」)놓아두었을까.그러나쉽게신은응답하지않는다.신이침묵하는자리에서시인은‘빵’이상징하는물신으로대체되어버린신(「새로운신」)과“불면과기도,질문과대답에무관심한신”(「그때버린신」)을목격했다고말한다.

막막한질문들,답을청했던순간들은공허한것이었을까.우리는앞서관능이곧살의맞댐이자고통의분유임을논했다.그런데시집의4부에서우리가만나게되는것은좀더생생한고통의감각,예컨대아픈가족사에대한고백같은것이다.우리가이시집에서마주하는고백에따르면,어릴적빚독촉에시달리던아버지가있었고(「내가파먹는열살의그림자」),또한요양병원에모신어머니의아픈목소리가있었다(「다항식」).어떤아픔은유년기부터뿌리깊이지속해온것처럼보이기도하다.어린시절나쁜어른이되지않겠다고다짐해보기도했고(「나무이후」),이후에는“나의썩은뿌리가되지않겠다고결심해”(「나비트랩」)보던순간도있었다.자신이일생견뎌낸슬픔에대해서시인은“그리오래어둠을키운건/너무일찍배운슬픔의구조때문”(「그때버린신(神)」)이라고표현한다.

이‘슬픔의구조’란단순히그가견뎌낸멜랑콜리와불안만을뜻하지는않는다.오히려당신과함께살아온것이기때문에,그래서당신의고통과오래감응했기때문에견뎌내야했던것이기도하다.그래서시인은자기신체가기억의각도를닮았다고말한다.시인은제몫의아픔을견디다가세상을떠난이들을떠올린다.그리고“모든기억은왼쪽으로스며들어서나는왼쪽으로고개를돌린다그리하여나의오른쪽목이조금더늘어나있다”(「미래의기억」)라고쓰고있다.요컨대그는자신을시간의무게에짓눌려‘늘어난’신체로묘사한다.삶의왼편을오래바라본사람,그것은자기몫의아픔보다당신의아픔을오래들여다본사람의자세를암시하는것이기도하다.

그자세를우리는“슬픔의방향”(「밀교」)이라고표현할수도있을것이다.그자세는너무오래당신을향해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