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얼거리는 사람 (정병근 시집)

중얼거리는 사람 (정병근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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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수많은 독백을 하나로 엮어 사랑의 매듭을 짓다
정병근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중얼거리는 사람』이 출간되었다. 30여 년의 시력(詩歷)을 이어가고 있는 시인은 낡고 좁은 1인칭의 내면을 무한한 사유의 공간으로 연결하는 구체성의 언어를 통해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해왔다. 소시민의 삶에 담긴 추억과 상처를 냉정한 인식으로 독해한 첫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2002년)부터 도시적 삶의 매끄러운 결을 도끼날 같은 성찰의 언어로 찍어내어 속이 텅 빈 폐허와 같은 개인의 삶들을 발견해냈던 『눈과 도끼』에 이르기까지, 정병근 시인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한 개인의 삶에서 언어화되지 못한 상처의 시간들을 끄집어내 우리 모두의 언어로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이번에 펴낸 『중얼거리는 사람』은 그간의 성찰적 언어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들의 삶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매듭으로 엮어내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말길이 막힌 사람은 말 병을 앓는다.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말이 몸속을 떠돌면서 정신을 상하게 한다”며 시인은 이번 시집 출간에 앞서 한 인터뷰에서 ‘중얼거림’이라는 단어를 화두로 삼게 된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시인은 여기에 “이제부터 사랑에 대해 나만의 목소리를 가질 것이다. 너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설렘과 떨림, 누구도 아닌 너여서 더욱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오해에 대해 말할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동안의 작품에서는 말길이 막힌 사람들에 대한 심미적 거리 유지를 위해 그들의 삶에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사랑’이라는 온기의 시선을 통해 그들의 삶에 스며들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각자의 중얼거림에 담긴 냉소와 고독을 사적인 언어들로 다독이고, 그것을 자신의 고독과 조심스럽게 엮어 사랑의 매듭으로 완성한 작품들이 이번에 출간한 시집에 담겨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된 극심한 고독의 시대. 경쟁과 불신으로 점철된 현실 속에서 누군가에게 한 마디 진심을 건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진 이 시대에 시인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고독을 타인의 모든 고독 위에 덧대어본다. 그리고 마찰과 파열 뒤에 올 ‘너’를 호명하는 외침을 ‘자유의 언어’로 명명한다. 모두가 자기 언어 속으로만 침잠해 들어가려는 지금, 매끄럽지만 건조한 시간 속에 파묻혀 있던 ‘진심’들을 발굴해 독자들에게 전하는 이번 시집을 통해 독자들은 내면에 잠들어 있던 가장 솔직한 말들을 용기 내어 바깥으로 꺼내볼 수 있
저자

정병근

1962년경주에서태어나동국대국문과를졸업했다.
1988년『불교문학』으로등단,2001년『현대시학』으로작품활동을시작했다.
시집으로『오래전에죽은적이있다』『번개를치다』『태양의족보』『눈과도끼』가있다.
제1회〈지리산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5

1부-중얼거리는사람

다중인격·15
우이독경·17
중얼거리는사람·18
혼자웃는사람·20
이해하는사람·22
되새기는사람·24
두리번거리는사람·25
페이스북·26
자귀나무여자·28
칼몸·30
고구마줄기를벗기는여자·32
꽃차·34
염소는어긋난다·36
통화·38
나비와휠체어·40
칼집·42
말의신사·44
비석은자란다·46
예언의방식·48

2부-나를만났다

머릿속에서전철돌리기·51
사이비를위한시·52
사랑의거지·54
다른말이있다·56
발·58
골몰하는동안·60
돌아와서눕는다·62
공중의창·64
나를만났다2·66
나는명랑하고·68
나는해롭다·70
12월의굴뚝·72
1mm의고독·74
건망·76
누가·78
공부·80
이달의명언·82

3부-공중의이사

귤·87
외면·88
인생·90
숙주론·92
공중의이사·94
매미2·95
창에는행운목·96
참을수없는忍·98
비우거나버리거나·100
등받이·102
아내의살림·104
목없는소파·106
월요일의백화점·108
뉴트리아를먹는밤·110
목련나무·112
긁는다·114

4부-너는너를모르고

비끝·117
꽃과별·118
거울앞·119
부뚜막위의히아신스·120
빛나는방식·122
너라서·124
너는예쁘다·126
듯이·128
해후·130
냄새·131
하루종일비가오면나는·132
발치(拔齒)·134

해설|오민석(문학평론가)
파열의언어와분열된주체·145

출판사 서평

삶의구체성을포기하지않는언어의장인

말하기를가장어려워하는사람은말로말이전혹은말너머의것을붙잡으려는사람이다.말이직업인시인들은말때문에무수한고초를겪는다.그들에겐말이축복이고,‘웬수’이며,저주이고,절망이다.시인은말에매혹당한말의노예이다.시인은말에진저리를치면서말의주술에사로잡힌자이다.시인에게말은가학과피학의채찍이다.그는말을때리고말에게얻어맞으며,말이없이살수없으면서도언제든말을떠나려는사람이다.그러나많은시인은말과의이지긋지긋한인연을짐짓모른체한다.어떤시인은말이이루지못한것을자신의책임으로돌린다.그럴때말은소통과재현의가장훌륭한기제로격상된다.말의신전에서말에게무릎꿇고말의제사장이될때,시인은말의나팔이된다.말은시인의소리통을울려자신을온전히성취한다.아무도말을의심하지않을때,말은세계의주인이되고,세상을‘만든다’.플라톤이래근이천년동안시인과철학자들은말의궁전에서말의시녀역할을했다.그들에게말은실재(reality)를실어나르는편리한수단이었다.그러나니체는무법천지의말에게망치를들이대고이렇게말했다.“실재란언어의범주적그물망에포착되지만,그것은오로지치명적인왜곡을통해서그럴뿐이다.”니체의안테나는언어가범주적사유와결합하면서실재를포착하되그것을치명적으로왜곡함을감지했다.이얼마나무서운발견인가.모든언어가그러므로가짜를생산한다니.자신의‘서정’에빠져언어를의식하지못하는시인들이가끔언어의이수상한짓거리를눈치채지만,그럴수록시인들은언어보다자신들의언어능력을더의심한다.그러나언어를다루는사람들이언어에대한자의식이없다는것은얼마나심각한직무유기인가.

자고로언어의끝장까지가본자만이언어를의심한다.그렇다면정병근은정확히그런시인이다.그는언어가서정을담는훌륭한그릇이라고생각하지않는다.언어가서정을제대로옮기지못하거나왜곡하므로,그에게당면과제는서정의전달이아니라그이전의언어에대한사유이고,사상의배포가아니라그이전의말에대한궁구이다.그는언어의알리바이를믿지않으며,언어의재현능력을의심하고,그것의혐의를끝까지물고늘어진다.그는시를쓰기전에시의재료를따지는시인이고,시의제전(祭典)에한판놀아보겠다고나온언어-무당을삐딱하게째려보는검열관이다.그는마술의지긋지긋한속임수와거짓말에더이상속지않겠다고다짐한불행한마술사이다.마술을갖고놀아야할마술사가그것을믿을수없다면무엇을어떻게해야할까.

근사한말이어디있나
말을많이한날은마음이켕긴다
후환이라는말참두렵다

말이없는사람은
분노를감춘사람
말을쟁여두면병이온다
기괴와기형으로

달변은앙금을남기지
거짓말을복용한날은손톱을깎는다
안경을닦고책갈피를문지른다

나를베어문웃음이
일생의말들을훑으며지나간다
뻥뚫린폐점처럼

근사한말이어디있나
근사한말이어디있나
중독자의눈빛으로

말은병든난간에앉아
지나가는얼굴들을쬔다
입을열면죄가툭튀어나올것같아
큼큼거리며모자를고쳐쓴다
-「말의신사」전문(본문44~45쪽)

정병근에게말은‘요물’이다.말을많이해도문제가되고말을하지않아도문제가된다.말은많이하면거짓과과잉-현실을만들고,하지않으면“분노”를만든다.말은“기괴와기형”의기제이다.말은세계를굴절하고왜곡한다.말은그것때문에“병든난간에앉아/지나가는얼굴들을쬔다”.말의꼬심에넘어가“입을열면죄가툭튀어”나온다.그러므로말의기총소사앞에서시인은말하기를주저할수밖에없다.“큼큼거리며모자를고쳐”쓰는행위는언어앞에서시인이보여주는주저행위이다.한마디로“근사한말”은없다.근사한말이란대상을왜곡하지않는말,실재를있는그대로전달하는말이다.시인이볼때,그런“말의신사”는없다.노자의말대로,“도를도라부르면이미도가아니다(道可道非常道).”존재와재현은일치하지않는다.‘새’라는단어는날거나울지않는다.새라는기호는실물의새와어떤필연적연관도없다.실물의나무는‘나무’라불릴수도있고,‘바움(Baum)’이라고불릴수도있으며,‘트리(tree)’라고불릴수도있다.그러나기호인나무,바움,트리,그어떤것도자라거나죽지않는다.르네마그리트(R.Magritte)가〈단어의사용1〉에서담뱃대를그려놓고“이것은담뱃대가아니다.”라고말한이유가그것이다.마그리트는〈꿈의열쇠〉라는그림에서도말의이미지에“문”이라는단어를,시계의이미지에“바람”이라는단어를,그리고화병의이미지엔“새”라는단어를달아놓았다.소쉬르(F.deSaussure)의통찰대로언어와오브제사이에는아무런필연성이없다.그것들의관계는철저하게자의적이다.기호들은오로지언어체계안에서다른기호들과의관계와차이에의해의미를발생시킬뿐이다.기호가언어체계밖의오브제를지배할때언어와오브제사이의괴리,굴절,왜곡이일어난다.

눈과입을가진자들이
스스로재갈을물고
강철귀로들어야하는경전이있다
쩔렁쩔렁요령을울리며
필생을되새기는말씀이있다
듣지않아야들리는동문서답이있다
-「우이독경」부분(본문17쪽)

정병근은이시집전체에‘말’이란단어를흩뿌려놓은후에그것들사이에“우이독경”,“마이동풍”,“동문서답”같은연결어를부여한다.시인이볼때,말은지시대상을왜곡하고굴절시키므로발화자들사이의모든말은우이독경,마이동풍,동문서답일수밖에없다.이런점에서말은놀랍게도소통이아니라불통의기제이다.“동문서답에몰두하는대화들”때문에주체들은“반목하는결별의디스플레이들”이된다.시인은이런관계속에서자신이“질것이고잘못할것이”고,“버려진다”고하는데,여기에서‘버려지는나’는기호의옷을입고사라진모든오브제를총칭한다.‘도’라고말하는순간도가사라지는것처럼,언어적발화의순간지시대상은사라진다.「우이독경」에서“듣지않아야들리는동문서답”은언어의문법을거꾸로돌리는전략을보여준다.굴절의언어를다시한번거꾸로굴절시키면사라진오브제를만날수있다.그러므로시인은말을가장혐오하고,말과가장어려운싸움을벌이며,말의주술을푸는자이다.

천만번쯤말을삼키고나면
충직한짐승한마리를얻을수있다
이것을갖기위해회심의인내를바쳤다
터무니없는요지부동으로
불쑥쏟은동문서답같은

무한한귀의표정으로고개를끄덕인자만
이곳에들수있다
되새기는草食의표정처럼
첩첩침묵으로다진저뻣뻣한위안을

이런짐승한마리를키우고있다
일찍이그것을몸에들이지않았다면내말은
서까래단청을휩싸는불이되었거나
떠도는소문이되었을것

…(중략)…

먼곳의긍지를모아비석은자란다
모든몰입과유배를소진하고
죽어서우뚝선저묵묵한바윗덩어리를
무어라불러야하나
-「비석은자란다」부분(본문46~47쪽)

오브제를왜곡하는말의횡포를막으려면“천만번쯤말을삼”켜야한다.언어는비상약(砒霜藥)처럼사용해야한다.과도한비상약은생명을죽인다.독소인언어는“회심의인내”로최대한억제되어야한다.그것은“첩첩침묵”의비석처럼아주천천히자라야한다.그리하여“요지부동”이었던말이어느순간“불쑥쏟은동문서답”처럼튀어나올때,즉왜곡을왜곡하고,굴절을굴절할때,“죽어서우뚝선”언어가나온다.상징계의언어가실재계로막건너뛰는그파열의순간,그영지적(靈知的)죽음의순간에말은말을배반하고실재에가까이간다.실재계는그“먼곳의긍지”이다.그것은죽음즉“모든몰입과유배를소진”한후에야순간적으로다가온다.시는그런긍지를향하여비석처럼자란다.시는그런무수한말의죽음위에서세워진다.시인이“서까래단청을휩싸는불”혹은“떠도는소문”에불과한말을삼키거나죽일때,비석의언어가자란다.

기호와재현의불일치는오브제에서만일어나지않는다.주체역시언어의오브제이므로,그것은주체에게도일어난다.상징계의모든주체는언어적으로구성된다.마그리트의시계이미지가‘바람’이라는기호로,화병이미지가‘새’라는기호로재현되듯,모든주체는모든기호로재현될수있다.그러므로주체는그것을호명하는기호의숫자만큼이나다양해진다.하나의,통합된주체는존재하지않는다.모든주체는분열된주체이다.

두더지게임처럼
아무데나내가튀어나온다
망치가있어야때릴텐데

고삐풀린장면들이
무시로문을넘나든다
망치는어디있나

끓는거품속에서
인과도없이무수한내가
다발로태어난다

내가나를이긴다
-「나비와휠체어」부분(본문40~41쪽)

나는하나의나를이기는무수한다른나들로구성되어있다.주체의속성은그안에서“인과도없이”“무수한내가/다발로태어난다”는데있다.여기에서중요한것은“인과도없이”라는부사구이다.정병근이말하는주체의분열은,‘인과’로설명이가능한,욕망/이성혹은무의식/의식사이에서일어나는어떤심리적인현상이아니다.그것은심리가아니라언어의,말의문제이다.언어는부글부글“끓는거품속에서”오브제를호명하지만,하나의기호가아닌무수한기호를동원해서그렇게한다.하나의오브제가무수한기표로분열되듯이,주체도무수한기표로분열된다.말은“무수한”나를만들어“나를이긴다”.너무많은나는기호속에서사라진다.그러므로상징계의아버지는주체가아니라말이다.

전철안사람들의표정도어긋나있다
술자리에앉은사람들의자세도어긋나있다
어긋남은언제든등을돌리고단호하게일어서는힘이다
어긋나는힘으로누군가와결별하고돌아왔다

나는줄기차게어긋났다
나와어긋났고너와어긋났고그와어긋났다
빛나는오해처럼,어긋난사랑에만몰두했다
그누구로부터도남이되기손색없는자세로
-「염소는어긋난다」부분(본문36~37쪽)

상징계안에서존재와재현은일치하지않는다.그것은‘항상’,“줄기차게”어긋나며,영원한결별의상태에있다.말의제왕아래에서사물은자신과어긋나며다른사물과도어긋난다.사람도자신과어긋나며다른사람과어긋난다.어긋남과불통과결별은상징계의규칙이다.그리하여정병근은언어로재현된현실을신뢰하지않는다.그가그려내는풍경은아름다운자연도아니고일상적인삶의공간도아니다.그의시선은늘현실과초현실혹은현실과비현실의중간어딘가에있다.그에게는그중간적인어딘가가현실이다.

천애고아를받았다
어머니는잎의뒷면에알들을슬어놓고
숨을놓았다그늘을다니는피는
고독사한아버지의피
환한창안의온기를그리며
지붕없는날들을풍찬노숙했다

하루세번,쌓인말을부정하고
안온에깃든다짐을털어내고
언제나발바닥시린겨울마당같은
맨발을촉구하는말의선생은누구인가

비애를자긍하는벌거숭이를받았다
걱정없이따뜻해지고싶어요
가는곳마다다른곳이었고
길은늘새로시작되었다
-「사이비를위한시」부분(본문52~53쪽)

화자는잎의뒷면에알을낳고죽은어머니와고독사한“아버지의피”사이에서태어났다.알을낳는어머니가초현실적풍경이라면,출산직후사망하는여성은있을수있는현실의풍경이다.화자는그중간어딘가에서독자에게말을건다.부모를잃은후에화자가겪은“지붕없는날들”의“풍찬노숙”은구체적설명을지운채,둘째연에서“말의선생은누구인가”라는질문으로연결된다.왜궁핍한현실에서다름아닌“말”이문제가되는가.화자는가난과불행의현실에서빠져나와현실도초현실도아닌그중간어딘가에서말의계보적기원을묻는다.이작품에서출생의서사가현실이라면,말에관한질문은시혹은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