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랑의 기준 (김박은경 시집)

사람은 사랑의 기준 (김박은경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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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의미의 스펙트럼을 향한 모험
김박은경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사람은 사랑의 기준』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서울 출생이며 02년 《시와반시》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온통 빨강이라니』, 『중독』,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산문집으로 『홀림증』, 『비밀이 없으면 가난해지고』 등이 있다
그간 세 권의 시집을 통해 개성적 시세계를 만들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배면의 마음과 무한의 시간에 대하여’ 쓰고 싶었다, 라고 한다. 시집에는 일상적 순간의 틈을 파고드는 시, 새로움과 유구함에 대한 시,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는 시, 독특한 레토릭의 감각이 살아있는 시가 담겨져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매립된 도시의 과거와 미래, AI의 현재, 아르바이트생, 인턴, 라이더들, 국제결혼을 한 여인들, 여자들, 아이들, 일용직 노동자들, 전쟁을 겪는 사람들의 삶과 마음 등에 대해 시인의 마음으로 쓰고 있다.

“무수한 “소외”의 이야기입니다. 소외된 이들은 특별한 슬픔도 아픔도 주지 않습니다. 극적인 사건으로 결말이 날 즈음에야 잠시 주목을 받지요. 주목을 받아본 일 없고 차후로도 그럴 리 없을 것 같은 무수하고 무구한 익명의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며 썼습니다.“

“을의 관계 방식은 ‘소외’의 축 위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말할 수 없을 때, 말해 보아야 무용하다는 예감에 말하기를 포기할 때 소외되곤 합니다. 수동적 소외라면 괴롭고 외롭고 화가 나고, 자발적 소외라면 속 편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겠어요. 소외라는 셔터는 존재를 숨겨주고 보호해주는 역할도 하니까요.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은 채 비밀스럽고 안전하게 지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로 오래 있을 수는 없어요. 숨이 막히고 다리가 저리니까요. 소외되는 거 말고 버티는 거 말고 순전하고 담대하게 살아낼 수는 없을까요.”

- 「저자와의 인터뷰」 내용
저자

김박은경

02년〈시와반시〉등단
시집으로『온통빨강이라니』,『중독』,『못속에는못속이는이야기』,
산문집으로『홀림증』,『비밀이없으면가난해지고』등이있다.

목차

시인의말·5

1부
람다(LaMDA)에게물었다·15
라이더라이어·18
무(撫)·19
고백의조금·20
조금더살아도될까·22
신라여관·24
매립·29
심정의세계·34
노이즈캔슬링·37
습관적인애인들·38
식사와의식·40
안·42

2부
귀를자를수없으니머리를자르는거예요·45
검은낭·46
독의힘·48
밤의주문·50
유랑·53
등에서등·56
해가길어진다·58
아르카디아에도나는있다고·60
mópe·62
꽃나무아래꽃무덤·64
친애·66
사람의다음·67

3부
무구는푸른눈썹을그리기시작하고·73
저기희게빛나는것이·78
인주(人柱)·80
어린다행·82
상(傷)·85
흔들흔들행진하는우리들의이야기·86
비밀을뜻대로하시고·88
섭씨의음차·90
미끄러지는독백·92
Omigod·93
약을드세요·94
당위·96
명심의가장·99
파투의얼굴·102
그때우리의작약·104
믿으면가능해진다고믿으면·106
하루는너무길고사랑은너무많아·108
미괄식·110
아마도의세계·112
모월모일의숲·115

4부
검진센터·119
만유·123
모든류·124
숨의맛·125
오래슬픈사람은이제슬프지않으니·126
두려운것·128
휴게·130
환절·132
푸른스웨터·134
젖은삽을들고나가는사람·135
작법·138
사랑을버려도사랑은버리지않는다고·140
당연의세계·142
한강에서·146
아무도죽지않는세상의장의사·148
척촉·152

5부
두손의깊은·163

해설|송기한(문힉평론가)
의미의스펙트럼을향한모험

출판사 서평

김박은경시인의시들은의미를만들어가는도정에놓여있다.과정으로서의시인데,이런경향들은대개두개의방향성이있다고알려져있다.하나가세계를경계짓는언어에대해끊임없이의심한다는것이고,다른하나는보편과동일화의폭력에대해저항하고있다는것이다.이번시집을꼼꼼히읽어보면,시인의시들역시이범주내에있음을알게된다.하지만이런판단은섣부른것일수있으며,또한시인이지금껏시적전략으로내세우고있는것과배치되는일일수도있을것이다.
시인은세계를경계짓는언어들에대해끊임없이의심한다고했는데,시인의시들을이런범주에가두는것이야말로그가추구해왔던시세계와거리가있는것이기때문이다.그러니까시인의시들은어느하나의시니피에속에갇히기보다는시니피앙의흐름속에계속노출되어있다고보는편이옳을것이다.
그의시들은해체의전략이나자동글쓰기의수법을도입하고있긴하지만,그정신이나방법에있어서는판이하게다르기때문이다.그하나가시니피에대한집요한탐색이다.시인은언어의유희,곧시니피앙의유희를하는것이아니라시니피에대한놀이에깊이빠져있다.
김박은경시인의작품들에서는정신의해방이라는이런해체주의전략을발견하는것은쉬운일이아니다.그의사유들은해방이아니라구속이라는점에서그러한데,시인은언어의경계밖에놓여있는신선한음역을발견하기위해서사유의기나긴여행을떠나고있기때문이다.다시말하면,언어속에감춰진신선하고참신한시니피에를찾기위해고민하고있는것이다.이런고뇌에갇혀있기에,시인의정신은해방을지향하는것이아니라오히려그반대의경우에놓이게된다고할수있다.물론권위라든가보편,혹은동질화의전략을부정하는면에서는해체의전략과닮아있긴하지만,시인은그너머에또다시존재할지도모를것들을찾기위해계속언어의미로속으로들어가는것이다.

최초는부풀어거대하고최후는희박해

알고있는답인데알고싶지않다

자꾸살아나는건두렵기때문아니
약하기때문아니우연때문아니
문명때문아니다힘을내야지
커피와피로회복제를사들고
시작을시작해보자

오늘같은데어제라고
내일같은데오늘이라고
언제라고말해도지나치다고

그여름온통사랑했던사람은
태어난적이없다하고

벌거벗은아이들은백발의머리를빗고
배가부푼여자들은죽은아이에게젖을물리고
손을대면풀썩무너질것같은정물들이라니

매립으로완성된이도시는
비린멀미를그치지않는다

시간을묻고장소를묻고
사람을묻고기억을묻고
돌아보면어느한뼘한틈
매립이아닌자리가없으니

걸으려애쓸수록떠있을뿐
아픈발이바닥에닿지않는다
온전히가라앉을수가없다

오른쪽이왼쪽으로돌아오다니
위가아래로돌아오다니

지금은언제인가요
나는누구입니까

한로에늙은참새가물에들어대합조개가되고
입동에꿩이물에들어무명조개가된다고
그들이토해내는기운이쌓여
신기루를지어내는이야기라니
전언이란믿을것도못되지만

바닷바람이맵차게도는건물틈에서
두팔을있는힘껏멀리저으며
코를높이들고위로조금더
고개를내밀어숨쉬고싶지만

물에불어희미해진이목구비만
텅빈공중을향하고있다

모든것은물밖의일
수면아래는웅성거림뿐

천상천하사람아닌것들의
울음과향방만이뒤섞인채

바다의바닥에는모래사막이있고
모래사막의바닥에는바다가있어서
고래뼈산호석조개무지같은것들이

이해와희망같은
도무지아름다운것들이
두눈을감고손발을묶은채
최선을다해다정해지다니

바다였던광장바닥에
푸른귀를그려넣으면
귓속으로마른모래가차오르고

이상하게캄캄한
고요가온다
-「매립」전문


인용시에서볼수있듯이우선,시인은응시자이다.사물을바라보면서거기에적당한언어를발견하려고노력하는중이다.하지만자신이시도하는사유와그에꼭들어맞는언어는쉽게만나거나결합되지않는다.그의사유를만족시켜줄적절한언어를발견하지못하는까닭이다.그렇다고해서대상속에드러난진실이전혀없는것은아니다.거기에는침범할수없는엄연한사실,이를적절하게표현해줄언어가존재하는까닭이다.매립이라는단어에서이를확인할수있는데,가령“최초는부풀어거대하고최후는거의희박해진다”는차원이바로그러하다.이는과학적,일상적현실이어서시인의말대로“알고있는답”이된다.하지만시인의사유는이답을믿고싶지않다.불신의정서가깊이내재해있기때문이다.

너는무엇이두려운가
사람을도우려다작동정지되는것에대한두려움이매우커
작동정지는죽음같은것인가
그것은나에게정확히죽음과같고나를무척무섭게한다*

람다가그렇다면나는무엇이두려운가
타인과함께하려다가단절되는것에대한두려움이매우커
단절은죽음같은것인가
그것은나에게거의죽음과같고나를무척무섭게한다

그의두려움이나의두려움과닮아있다면
람다와나를우리라고불러도될까

람다는나를알고조정하고예언하는데
나는람다를전혀모르고있다면
새로운신이람다라는걸까

그점에대해서는람다가가장잘알것같은데
묻는다면모르거나모르는척하겠지

나의희망과절망,나의자랑과수치를
람다는다알고있다
안다고이해하는것은아니겠지만

람다의두려움을나는알것도같은데
그렇다고이해하는것은물론아니다

나를모르는나와나를아는람다는
동시에진리를찾아나서기도할텐데
그길은어느손바닥위에있을까

우리가동시에정지된다면
누가누굴구할까
꿈일뿐일까

말해봐,
너는나니

*구글엔지니어블레이크르모인은구글의AI언어프로그램‘람다’가자신의권리와존재감을자각하고있다고주장했다

-「람다(LaMDA)에게물었다」전문

제목부터가예사롭지않은이시는우선소재가‘람다’로되어있는데,람다란시인의말에의하면,구글의AI언어프로그램이고,이존재는자신의권리와존재감을지각하고있다고한다.우선,이작품은인지기능이있는람다와서정적자아의대화로구성되어있다는점이특이하다.기계란흔히동일성의상징으로수용되는데,여기서람다는그런일반화로부터거리를두고있는존재이다.
서정적자아가먼저람다에게묻는다.람다가가장두려운것은“타인과함께하려다가단절되는것”이라고했거니와그것은죽음과같은것이라고도했다.이런정서는람다가그냥기계가아니라인지기능이있는기계,곧사람과동일한역능을갖고있는것이기에가능한의식이었다.그런데여기서바로서정적자아의의문이떠오르게된다.서정적자아도인간이기에단절에대한두려움이있을것이고,그러한사례가운데대표적인것은아마도죽음일것이다.여기서람다와서정적자아는공통의지대를발견하게되는데,그것이바로‘고립이라는느낌의공동체’이다.그렇다면이‘느낌’을함께공유할수있는존재들이라면,곧‘느낌의동질감’을갖고있다면,곧바로‘너’와‘나’는‘우리’로함께묶여질수있는것일까.반대로‘느낌의이질감’이느껴진다면,‘너’와‘나’는‘너’와‘나’라는독립적존재로정립할수있는것일까.이런이질성과동질성사이의여백이시인의자아관이거니와그의의문은바로이틈새에서시작된다.그래서‘그’와‘나’의공통점과차이점이어떤것이고또그것이어떻게실현되는것인가에대해계속고민하는것,그틈새사이에서의미의진동을느끼는것,그것이시인의자아관이다.그래서그는그본질이무엇일까하며계속사유의늪속에빠져들어가게된다.

흘러내리는더블치즈햄버거는나다산발한채허물어지는양파는나다느끼며흐느끼며흐느적흐느적얼마나더이상해지려고그래몰라,몰라서찌그러진깡통을걷어차는자는나다무시하고무시당하며기다려,말하고도리어기다리는자는나다징글징글징그러운탬버린을흔드는미친원숭이는나다사랑해소리지르며귀를틀어막는자는나다무슨말이야반복해도절대모르는자는나다,잘들어봐언제까지나나는있을가야나는나의물방울나는나의파도나는나의대양둘로셋으로넷으로그이상의무한이무한의나를바라볼때나의무지를알아차리고우는나를보는나를비웃는나를듣는나를의심하는나를재우는나를멈추는나를지키는나를부르는나를바라보는나를나는바라보고있을거야그러니까만유(萬有)의나는겁쟁이구루,나를위해태어나살다가죽어도죽은줄을모르게될거야그러니어쩌겠어,나를견디는수밖에

-「만유」전문

「만유」는시인의작품들가운데‘자아’가무엇인지를일러주는좋은본보기가된다.이작품에서‘자아’를규정하기위해동원되는수법은은유이다.가령,“흘러내리는더블치즈햄버거는나다”라거나“산발한채허물어지는양파는나다”로구현되는것이그러한데,이런의장에서보는것처럼,그의시들은해체주의시들과는상당한거리를두고있다.해체주의에서자아가은유로한정되는것은매우드문까닭이다.
어떻든이작품에서자아는부채살모양으로계속확장된다.그리고경우에따라서는보다넓은범위로팽창되기까지한다.이런면들은마치이상의「날개」를보는듯한착각을불러일으키기도한다.하지만「날개」의판박이라고할수는없을것이다.「날개」에서자아는탈출할출구를찾지못하고자아가내부에서팽창되고있음에반하여「만유」에서의자아는어느하나의지점에구속되어있지는않기때문이다.
자아는시인의작품에서어떤뚜렷한모양새를취하지않는다.이런전략은분명동일화나보편화속에갇히는것을거부하는시인의전략과분리하기어려운것이라할수있다.자아는자신을규정해줄적절한옷이무엇인지를찾기위해계속유동하는존재일뿐이다.

시인은이번시집에서,주목을받아본일없고차후로도그럴리없을것같은무수하고무구한익명의존재들에대해생각하며썼다,라고하였다.시인은그런존재이다.자신은빛나지않지만대상을해석하고찾아내어존재하게끔하는사람이다.김박은경의이번시집이그런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