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행 종이비행기 (한명희 시집)

스위스행 종이비행기 (한명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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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등단 30년이 넘는 한명희 시인의 시집 『스위스행 종이비행기』가 시인수첩 시인선 86번째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지금까지 그가 생산한 문장과 우리를 향해 쏟아낸 사유의 지평을 ‘아나키스트’의 위험하고 매혹적인 지평까지 정교하게 파내려감으로써, 자신의 미학을 더욱 확대하고 공고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연하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시인의 결코 에두르지 않는 문장의 묵직하고 매운맛을 느끼게 된다.
한명희의 시를 읽으면 어떤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는 황정산 시인(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그러한 강도는 시인이 추구했던 내적, 외적 자유로움에서 오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많은 것들에 딴지를 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미신과 헛된 편견으로부터 온 것인지 우리에게 까발려 준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신념도 가치도, 우리가 의지하고 살고 있는 가족이나 제도나 인간관계까지도 모두 벗어난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저자

한명희

1992년《시와시학》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으로『꽃뱀』『내몸위로용암이흘러갔다』『두번쓸쓸한전화』『시집읽기』등이있다.〈시와시학젊은시인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대유목시대·13
거미줄연구가·15
메모리얼파크·18
죽고나서야그의이름이밝혀졌다·20
이지,easy,理智·22
나의첫남자들·24
단둘이복숭아꽃잎을본다·26
꽃시절·28
빨간구두아가씨·30
빨강·32
변검을배우고왔다·34
빠른일곱살·36
우산이없는계절·38
다문손·40
꽃중의꽃·42
저빛나는몸에서·43
이십대·44
스펀지·46
어쨌든집을향해·48
이유의이유·50
삼십대의가로수길·52

[2부]
1704호의유령·57
연극배우·58
요양원에면회가기·60
토우들의방·62
푸르스름한그것·64
삼인사각·66
식구·68
새벽비·70
당신은호박이꼭필요하다고했지·72
비둘기,비둘기들·74
여기,독사가있다-블랙위도·76
마른잎이있는풍경·78
틈·80
이주민·82
7과12분의7·84
울다가가자·85
마지막조문객·86
절정·88

[3부]
결혼식과시상식·91
귀없는새·94
투명·96
누구의누구·98
과거여행자·99
스위스행종이비행기·100
다단계행성·102
이런사랑·105
이제·106
완벽한타인·108
너도밤나무와나도밤나무에서·110
오리오리꽥꽥·112
다음에·113
매혹·114
저녁산책·116
밤의놀이터·118
도시락을볼때면·120
사방에서냄새가났다·122
조조영화가참좋았다·123
바다고양이·124
어렴풋한생각·126
벵골고무나무아가씨·128

해설|황정산(시인ㆍ문학평론가)
“아나키스트의시쓰기”

출판사 서평

매혹적이면서도매우위험한‘시집’

시인의시를읽는순간우리는모두시인을따라내게주어진모든것들을버리고때로내게주어진생명까지도버리고가볍고투명한존재가되고싶어진다.“부모가깔아놓은길과/스승이알려준길의교차점/그어디쯤/거기서그는길을잃었다//(중략)//투명해져야겠다는생각이/온몸가득차올랐을때/그는거기서뛰어내렸다//아무에게묻지않고도/스스로길을찾아내었다”(「투명」)는이불가항력적인역린이,저항과되새김이그실체가아닐까.
황정산시인은다시강조한다.시인이된다는것은가지않는길을간다는것이라고.부모도스승도신앙도규범도가르쳐주지않은,어쩌면그모든것들을거부하는길을가는것이다.그것은자유로운길이기도하지만투명하게자신의존재까지도지워야할위험한길이기도하다.한명희시인은이시집의시들을통해이위험한길로갈것을담담한어조로설득하고있다.
이같은매혹적이면서도위험한작품의전개는‘여성’이기때문에부여될수밖에없는사회적욕망과금기를단숨에휴지조각으로만들어버리는이념과의지로도표출된다.물론여성이아닌‘인간’으로서의도약은아나키스트-되기의한계보를이룬다.
이를테면,“저주는풀렸어도/구두를벗지는않을거야/큐빅이박힌빨간구두를신고/계속춤을출거야//악사여연주를계속해요/더크게더빠르게//발가락에서피가솟고/구두에핏물이고여도/춤을멈추지않겠어요//잘린발목으로/계속원을그리겠어요/더크게더빠르게//저주의주문은짧고/춤추는밤은길었지요/덕분에나는/모든스텝을익혔어요//슬로우슬로우퀵퀵/슬로우슬로우퀵퀵//악사여연주를계속해요/저주의날들을/계속기억하겠어요/빨간구두를신고/크게크게원을그리면서”(「빨간구두아가씨」)에은밀하게나타나고있듯,시인은자신에게부여된여성으로서의사회적젠더를주시하고,그것을적극적으로교차하며,‘아나키스트’로서백지화하려고한다.어쩌면이지점에서우리는시집에잠재된매혹과위험을동시에읽을수있지않을까.
또한시인은가부장이라는악습을필사적으로밀어내려는시도도지속한다.“걱정마세요아버지/저는요즘마천루에대해연구하고있어요/높은빌딩일수록/첨단공법이많이들어가니까요/하중을분산시키는방법을/찾아내고야말겠어요아버지//우리아버지/요즘은무엇을연구하실까/무엇이든아버지/제걱정은마세요/저는아버지와다르니까요”(「거미줄연구가」)와같은작품에서나타나듯,시인은가부장을대체할이념찾기에골몰하기도한다.그것이가능한까닭은‘아버지와는다르다’는,평범하면서도구체적인진리때문이다.다름으로써파생되는차이는,그것이보편적윤리에어긋나지않는한충분히아름답고건강하다.



◨다음은시집에관하여시인과나눈짧은인터뷰내용이다.

[Q]주제와이야기의방향은?
[A]내시에일관된주제나방향성이있다고는생각하지않는다.무의식적차원에서의분석이라면분명내시집속에서도내가하고싶은이야기를찾아낼수있을것이다.그러나적어도의식적으로어떤주제를가지고써야겠다고해본적은없다.네루다를알기훨씬이전부터도나는‘시는오는것’이라고생각했다.내가나에게로시가오게만드는어떤‘주술’같은것은있다.그러나그것까지밝힐수는없다.그것은분명부끄러운것이므로.

[Q]이번시집의특징은?
[A]‘나’가나혼자만으로이루어진것이아닌것처럼,‘타인’들속에도내가포함되어있다.따라서나를타인처럼들여다보고,타인들을나처럼들여다보아야했다.내속에너무많은타인들의목소리와타인들속에서발견되는나의모습에주목했다.이모든‘나’는희극보다는비극에,양지보다는음지에,낮보다는밤에조금씩치우쳐있었다.그러나어떤경우에도경쾌함을잊어서는안된다고생각했으므로비극을맑고밝은톤으로노래했다.

[Q]나는어떤시인인가?
[A]나는규정되기싫어하는시인이다.너는이렇다고누군가정의하는순간,나는이전과는전혀다른사람이될준비를한다.아니다.더정확히는그것만이내가아니라고주장하게된다.남들이아는나와내가나는나의불일치.그속에서내시가만들어진다.그러므로나는끊임없이꿈틀거리고꿈틀거리면서앞으로나아가보려는시인이다.
-「저자와의인터뷰」중에서


◨해설들여다보기

“아나키스트의시쓰기”

시인은무엇인가를지키기위해서글을쓰는사람이아니다.종교적교의를설파하고규범과도덕을지키자는글을쓰는것은시인의역할이아니다.시인은그것들너머의세상을꿈꾸는자이고그것의가능성을알리는자이다.그는지켜서얻는안주와평안보다는벗어나서겪게되는불안을기꺼이받아들이고그래서찾게될자유를소중하게생각하는사람이다.그러므로시인은어쩔수없는아나키스트이다.한명희시인의이번시집의시들은이런벗어나기가무엇인지잘말해준다.시인은아나키스트로자신을이렇게규정한다.

나의땅이아니니
집을짓지않습니다

나의대통령이아니니
투표하지않습니다

모든것을주관한다지만
나의신이아니기에
기도하지않습니다

국경근처가의외로
경비가허술합니다

사원이있는동네에서는
오래머무르지않습니다

방향을제일잘아는건역시
유목민이고요

그들을따라
핸드폰과노트북을챙깁니다

어디까지든가볼참입니다
-「대유목시대」전문

이시에서제목인“대유목시대”는‘디지털노마드’를지칭하고있다.디지털로만들어진사이버세계에서는국가가지배하는영토도없고신을모셔야할사원도없다.사람들은그모든것을넘어자유로운세계를항해한다.시인이“투표하지않”고“사원이있는동네에서는/오래머무르지않”는다고선언하는것은바로이노마드의세계에아나키스트로주유하고자하는소망을표명하는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핸드폰과노트북”이라는쓰기의도구가필요하다.시인은이쓰는행위를통해“어디까지든가볼”무모한모험을감행하는자이다.“국경근처가의외로/경비가허술합니다”라는구절이이시에서가장중요한구절이다.우리는경계에서항상걸음을멈추고그것을넘어설때의처벌을두려워한다.그경계가사실은아무것도아니고넘고자하는자에게아무런두려움이되지못함을지적하며그곳을넘자고우리를유혹한다.경계는사실우리의관념을지배하는가상의억압에불과하기때문이다

*

사실우리는모두이주민이다.우리가사는삶의조건자체가우리에게끝없이지금여기를벗어나다른것이되고,다른존재의삶으로살기를강요한다.우리의삶은관계속에얽혀든든하게사회에뿌리내리고있다고생각하지만언제든뿌리뽑히고쫓기고밀려나살수밖에없는이주민의운명을모두가지고있다.특히다변하고복잡한현대사회의삶은이런삶의양식을더욱가속화시킨다.

이주가끝나자
가장먼저나무가베어졌다
큰나무일수록먼저베어졌다
쓰러져서도나무는4층짜리아파트보다컸다

나무가섰던자리마다구멍이생겼다
구멍은생각했던것보다크고많았다
생각지도못한곳에구멍이보이기도했다

…(중략)…

그다음에도
많은일들이순서대로착착진행되었다
그러나이주민이알수있는것은아니었다

사실나무의일도구멍의일도
이주민이관여할일은아니었다

벽뒤에서움직이는저것이무엇인지
이주민은알아도알수없는것이었다

나무가뽑힌자리
다시나무가들어설수는없다는것만이확실했다
-「이주민」부분

우리는내나라내땅에서확고하게뿌리내리고살고있다고생각하지만그뿌리가과연확실한가시인은묻고있다.언제든뽑혀나갈수있고언제든이주자가되어삶의터전을떠나야한다.사람들은이허망한뿌리를자신의근원이라여기며지키고보존하며영원히살것처럼생각한다.그런데따지고보면우리는모두이주민이었다.어디선가떠밀려여기까지와살고있다.역사가그것을말해주고바로우리눈앞에펼쳐지고있는사회현실이그것을잘보여준다.사람들과의관계와그것이만든울타리가얼마나허술한가를시인은우리에게알려준다.확실한것은“다시나무가들어설수없다는것”이라고말해세상에영원한안주와뿌리내림은존재하지않는다는것이다.아나키스트가된다는것은자신의영토에대한미신을버리고이불안한이주와방랑을받아들이는것이다.아나키스트로서의시인은편안한정주를버리고끝없는이유랑의삶을자신의삶으로받아들여야한다.
다음시는벗어나야할곳으로서의집의존재를재미있게표현하고있다.

집이두채라면모두들
부러워하지
한채는적도부근에
또한채는북극부근에있다고하면
다들놀라워하지

지금어디에있니
어디쯤이니
대체어디니
지구곳곳에서전화가걸려오고

나는늘말하지
집으로가는중이야
집에가고있어

나는정말집으로가고있지
안나푸르나를걸어서
북극해를헤엄쳐서
때로는칼라하리를기어서라도

어느집이니
어디로가고있니
얼마나남았니
의문은많아도

그것은언제나모르고모를뿐
그래도열심히열심히가고있어
집을향해가고있어
어쨌든집을향해
-「어쨌든집을향해」전문

시인은집으로부터멀어져전혀다른곳을가면서집으로가고있다고말한다.그것은제목처럼돌고돌아“어쨌든집을향해”가는중이기때문이기도하지만집을벗어난곳에자신이가야할집이있다고시인이생각하고있기에그렇기도하다.“적도부근”이나“북극부근”처럼집을지을수없는곳에집이있다고말하는능청이이를우회적으로말해준다.집을향해가는것이집을벗어나는것이라는이아이러니한행보에시인의길이있음을한명희시인은우리에게넌지시일깨워주고있다.그런데그집으로가는길이쉬운것은아니다.“안나푸르나를걸어서/북극해를헤엄쳐서/때로는칼라하리를기어서”가야하는고행의길이다.집을벗어나,안주해야할영토를벗어나아나키스트로서노마드의삶을사는것이쉽지않음을시인은이리표현한것이리라.
다음시에서처럼아나키스트로서자유로운주체적인간이된다는것은생명의문제까지도근본적인시선으로다시성찰해야할깊은사유를필요로한다.

아무리기다려도스위스행비행기는오지를않고
그는끝내스위스에가지못할테지

알프스며몽블랑이눈에선해도
그의관심은오직베른뿐

베른의의사들은실력있고친절하지만
그를오래기다리지는못할테지

스위스행비행기가오랫동안오지않아도
이번만은누구도탓할수없고

그도문득알게되겠지
베른의날씨가나빠서거나공항에사정이있어서는아니라는걸

그러다차차지켜볼테지
오랫동안묵은고통이자신의몸을떠나가는걸

베른의의사를보지않고도그는마침내안락을찾게되겠지
대성당의종소리같은위로가겹겹이그를에워싸겠지
-「스위스행종이비행기」전문

인간에게가장큰자유는자신의생명을자신이선택하는일일것이다.아무리큰자유를찾더라도태어나고죽음을맞이하는생명에관한일은신이나자연의역할이지인간이선택할수없는일이었다.하지만안락사를선택하는것은죽음마저자신의자유로운의사로감행하는일이다.스위스행비행기를탄다는말은바로그안락사를선택해그것을허용하고있는스위스로간다는말이다.하지만아직은그것이우리에게허용되지않고있다.그래서시인은가상의비행기인종이비행기를타는상상을한다.“오랫동안묵은고통이자신의몸을떠나가는걸”바라보는최고의자유를시인은상상으로나마경험하고있다.시인은시를써비행기를띄우고마지막경험할자유를추체험한다.이렇게보았을때이가상의종이비행기접기는시쓰기의은유이다.
-황정산시인ㆍ문학평론가해설중에서